오셀로 ㅣ 펭귄클래식 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석주 옮김 / 펭귄클래식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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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셀로 셰익스피어 펭귄클래식 2011년 7월 29일 고전모임을 시작하면서 내 독서량이 얼마나 저조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유명한 작품은 죄다 사다놓고 항상 책꽂이에서 언제 읽어줄거냐며 그냥 그렇게 서로 눈싸움만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나하고 셰익스피어 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펭귄클래식의 번역이 잘 되었던건지 문체가 생각보다 옛스럽지 않고 내용도 쉽고 재미있게 전개되어서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가 상당히 좋았다. 시간이 허락 한다면 4대 비극을 차례대로 다 읽어봐야 겠다. 일단 오셀로를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의외로 이아고의 비중이 높았다, 라는 것이다. 책의 제목을 오셀로가 아닌 이아고라 지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아고의 역할이 컸는데 정말이지 이간질의 종결자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강인하지만 단순하며 무어인인 오셀로와 아름다운 아내 데스데모나, 멍청하지만 돈 많은 로더리고(역시나 나중엔 이아고에게 다 빼앗기고 죽음을 맞는), 밋밋한 캐시오와 그들 모두를 조종하는 이아고까지 등장하는 인물은 많지 않지만 개성이 뚜렷하다. 이 작품은 이아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이 작품은 한 사람의 탐욕으로 시작해서 오셀로의 질투 그리고 마지막 복수까지 이어지는 3종 세트로 구성되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오셀로가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스토리의 구조가 신선하지 않았던 이유는 헐리우드를 비롯하여 한국영화 수많은 드라마들이 이런 골격을 기본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뒤늦게 오셀로를 접한 나에겐 어디선가 많이 접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영화가 있었는데 그건 다름아닌 [트로이]였다. 두 작품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오셀로도 그렇게 단순히 겉으로만 본다면 이 모든 일이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집착이며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파리스에게 자신의 아내 헬레나를 빼앗긴 아가멤논이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게 하는 일(훈남 헥토르가 죽었다;;;)이나 이간질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내를 목졸라 죽이는 오셀로는 상황만 다르지 동일 인물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극 중에서 같은 행동을 한다.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상황을 본다고 그토록 사랑하고 아름답다고 세상을 다 줄 것만 같이 데스데모나를 이아고의 말만 듣고 죽이게 되는 상황을 보면서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라는 하나의 인물을 사랑했던게 아니라 누구나 아름답다 칭송하는 한 여인을 소유했던것 같다. 그래서 사랑하는 데스데모나가 떠났다는 슬픔 보다는 아내를 캐시오에게 빼았겼다는 자존심이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다면 잡을 순 있겠지만 그 사랑이 끝난거라면 그냥 놓아주고 행복을 빌어 주는게 사랑이라 생각한다. 작품이 끝으로 가면서 좀 아쉬웠던 것은 데스데모나가 캐시오를 다시 부관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노력하는 장면이 너무 과하게 나왔는데 뭐랄까 좀 극을 끝으로 치닫게 하기 위해서 셰익스피어가 무리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사실 좀 답답할정도로 낙무가내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가장 돋보였던 이아고의 탐욕이 생생하게 묘사가 되는데 그보다 인종이 다른 무어인으로써의 오셀로의 고뇌가 좀 더 표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고전 작품에서 제목으로 쓰여진 오셀로보다 좀더 매력적인 캐릭터가 조연?이라고 생각하니 그 점도 조금 재미있었다. 다른 작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에 등장하는 여자인물들은 너무 순종적이고 현명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사실 불만이 좀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대적 배경이라는게 있으니 어쨌든 속좁은 남편 잘못만난 데스데모나의 최후는 정말 비극 그 자체다. 하지만 고전 중의 고전 답지 않게 쉽게 읽혀서 좋았고 최근에 접했던 작품들 중에서 몰입도가 가장 좋았다. 어려울것만 같았던 오셀로를 이렇게 끝내고나니 니체의 책을 읽었을때처럼 묘한 쾌감이 있었다. 이제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도 흔쾌히 집어 들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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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세트 - 전3권 ㅣ 펭귄클래식
샬럿 브론테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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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에어. 어릴적부터 책 좀 읽는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읽었을 법한 소설이지만 난 서른살이 된 지금에서야 읽었다. 어렴풋이 내용만 알고있을 뿐 자세한 내막이나 작가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기에 모임을 통해서 살럿 브론테를 만나고 숙제처럼 미뤄왔던 소설 '제인에어'를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느낀건 조금더 순수할때,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읽었다면 어쩌면 더 감정적으로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을텐데 하는. 다른 핑계 다 덮어두고 나의 닳아빠진 감성은 제인에어의 삶은 어쩐지 답답하고 융통성없는 답답한 구식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그래도 힘든 삶을 먼길로 돌아가며 더 힘들게 사는것처럼 보여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고아라고 해서, 그녀가 신데렐라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녀를 동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처음부터 불리했지만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자존감으로 거침없이 운명에 대응했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제인에어. 화려하진 않아도 오랫동안 은은하게 빛 날거 같은 느낌이랄까.

"아가씨 운명은 아직 분명하지 않아. 아가씨의 얼굴울 자세히 보니 얼굴 생김새 각각의 특징이 서로 모순되고 있어. 운명의 여신이 아가씨에게 어느 정도 행복을 할당해 주긴 했어. 그건 내가 알아. 오늘 저녁 이곳에 오긴 전부터 알고 있었어. 여신이 그걸 아가씨 한쪽 편에 살그머니 내려놓는 거지. 그녀가 그러는 걸 내가 봤어. 손을 뻗어 그걸 잡는 건 아가씨 본인에게 달려 있어. 하지만 과연 아가씨가 그런 일을 할지 말지 여부를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는 거야.

p_375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그 운명을 힘겹게 싸워내는 힘이다. 제인에어가 계급이 다른 로체스터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제인에어는 절대로 신데렐라가 될 수 없었다는 점, 나쁜남자 로체스터에게는 비밀이 너무 많았다는 점. 끝내 둘은 사랑을 이룰수 없었다는 게 그녀가 가진 태생의 운명이다. 이런 제인에어가 힘겹게 사랑을 이뤄냈다고 하지만 로체스터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채 평생 제인에어의 얼굴조차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제인에어가 운명을 거스른 댓가는 너무 크고 잔인하다.

이 소설이 쓰여진 19세기 영국은 봉건적이고 보수적이여서 여자들은 지적인 소양보다는 얌전히 교양을 쌓다가 나이들어 좋은남자 만나 결혼하면 모든게 해피엔딩이라는 식의, 더군다나 철저한 계급사회로 태어날때부터 운명이라는건 정해져있어 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당시 살럿브론테는 1824년, 언니들과 [폭풍의 언덕]의 작가인 동생 에밀리 브론테와 함께 코오원 브리지 사립 기숙학교에 들어간다. 그곳의 엄격한 규율과 볼품 없는 식사로 두 명의 언니를 잃게되는데 이 사건은 제인에어가 소설에서 기숙학교 로우드로 들어가 힘겹게 살아가며 유일했던 친구를 잃는 장면에서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제인에어가 학교를 졸업한 뒤 손필드에서 계급이 다른 주인 로체스터를 만나 슬픈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실제로 살럿브론테가 기숙생활을 할때 교장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에게 이미 아내가 있었기에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내용이 비슷하게 묘사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해야 했던 작가의 삶이 안타깝지만 그녀의 대표작 제인에어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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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펭귄 클래식 ㅣ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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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고전목록에 상위에 올라가있었는데 이제야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름대로 검색을 해봤는데 제목이 별로 안끌렸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난 제목이 끌려서 항상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취향은 다 제각각인 모양이다.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상당한 이질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고전에 많이 등장하는 종교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왔고 지금은 무신론자인 나에게는 거부감이 드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작가가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작품에 등장하는 제롬과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는 점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최근에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을 읽었는데 그 책의 요지는 예전부터 토속신앙이나 지금의 종교가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죄의식"이라는 감정을 사람들에게 부여해서 스스로 알아서 통제하게끔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런 죄의식의 근원은 금지된 것과 통제를 통해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가 정확한 답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모든 관점은 주관적인것에서 부터 출발을 한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무신론자인 나의 시선으로는 신앙을 위해 사랑을 희생한다는 스토리는 너무나 진부하고 안타깝다.

진실된 사랑의 완성과 사랑의 만족이라는게 과연 있는것일까?

개인적인 생각은 그런건 없다고 본다. 생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다고 하니 의심의 여지가 없는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는 사랑에서 만족을 얻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과 자기를 분리시켜서 사랑을 하는 자신의 감정에 만족을 하는 사람만이 사랑에 있어서 행복과 만족을 느낀다고 하던데 내 생각 역시 그렇다. 관심이 사랑이 되고 사랑이 정이 되고 나중엔 책임으로 가는 일들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마음만 가지고 평생을 살아내기엔 사람의 이기심과 욕심, 질투, 만족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상황들을 배제한체 주인공인 알리사는 사랑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단지 신의 품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런 알리사의 행동은 좀 더 인간적인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에 전념하려고 하는 제롬에게 게속해서 상처를 입힌다.

종교 이전에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종교가 없고 그로인해서 발생한 죄의식이 없었다면 잘 살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너무 쉽고 빠르게 달아오르고 식어가는 시대에 사는 요즘, 순수한 아가페적인 사랑이라는 측면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는 생각한다. 지금은 워낙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많이 더렵혀진 느낌이기에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은 깨끗하고 순수해 보여서 좋았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정작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행복은 멀리하며 고통과 희생만이 고귀하고 성스러움이라고 여겨 고난의 삶을 자처한 알리사의 마음을 훗날 알게된 제롬과 그런 알리사를 감히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자신의 뜻대로 쉽게 다가갈수 없음이 책을 읽고난 후에도 한참이나 가슴속에서 아릿해서 마음이 아팠고 왜 이렇게까지, 란 생각에 사실 짜증이 나기도 했었다. 지금의 나로써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할 것 같은 그들의 사랑에 대한 약간의 질투도.

언제나 이런 작품들을 접할땐 거부감이 드는게 사실이다 작품의 밑바탕엔 커다란 종교 특히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지금의 현실에서 이런 작품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문학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인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번 새롭다. 하지만 2011년에 좁은문을 읽은 나의 시선으로 알리사와 제롬을 바라본다면 아마도 용기가 없었던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에 이 글의 배경이 예전의 프랑스가 아니라 아프리카었다면 아마도 제롬은 성인식때 소 뛰어넘기를 잘해서 알리사를 아내로 맡이해서 잘 살고 있었을거 같다.사회적 관습이나 종교적으로 사람에게 제약이 가해지는 이런 상황들은 언제나 불편하게 다가온다.


이번에도 역시 난 종교가 주는 고통과 제약의 극복을 통해 천국으로 가는 좁은 문에 대해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다.


인간에게 종교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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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ㅣ 펭귄클래식 13
허균 지음, 정하영 옮김 / 펭귄클래식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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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_ 허균의 호민론 중에서

홍길동전은 춘향전과 더불어 워낙에 유명한 우리나라의 고전이지만 제대로 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펭귄클래식의 홍길동은 경판 24장본과 완판 36장본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제대로된 지식이 없는 상태로 읽은 결과 내용이 비슷해서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일단 홍길동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은 홍길동의 행동이나 도술이 아니라 이 글을 조선시대에 썼던 허균의 인생이 더 궁금했다. 그는 서자는 아니었지만 서자의 입장에서 글을 썼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부정과 부패에 글로써 저항했던 아나키스트였다는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아마 그런 사상을 가진 허균이었기에 홍길동이라는 인물이 나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길동은 모두가 알다시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 출신으로 집을 나가고 도적패들과 어울려 활빈당을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나중엔 율도국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인데 여기서 특이했던 것은 바로 율도국이라는 섬인데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오키나와로 추정된다고 하는 설이 있다고 한다. 율도국은 내가 얼마전에 접했던 유토피아와도 맥을 같이 하는 점이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아마도 허균은 율도국 같은 나라를 건설하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토마스모어나 허균이 다른듯 닮은 세상을 꿈꿨다는 것은 아마도 현실에서 자신이 처한 국가의 상황이 어떤지 짐작 할 수있게 한다.

문학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시대를 들여다 볼 수있다는 점인데 그때의 조선이나 지금의 대한민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특히나 서자 출신은 차별을 받거나 조정은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들이 지금과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의 서자는 지금의 IN서울 대 지방대, 부자 대 빈자로 단어만 바꿔넣으면 그다지 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라고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공교육이 죽은 사교육의 나라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조차 없다. 허균이 2011년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이라면 과연 홍길동과 같은 작품을 썼을지가 궁금해졌다. 학자들은 역사는 되풀이 되니 미래를 알고 싶으면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점을 항상 강조하는데 이런 좋은 문학작품으로 조금이나마 그때의 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이 나에게 지금 당장은 어떤 결과물을 가져다 줄 수는 없겠지만 나중을 본다면 분명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빅재미는 엑스맨에 버금가는 홍길동의 도술인데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해봤다. 과연 나에게 저런 도술이 주어진다면 당장 나는 세상을 위해서 어떤 기술을 쓸 것인가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해보았는데 지금 당장 그 기술이 주어진다면 당장 4대강을 원상복귀 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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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ㅣ 펭귄클래식 1
토머스 모어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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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온순하던 양들이 욕심 많고 난폭해져서 사람들을 잡아먹게 되었다'

팽귄클래식의 서문에는 등장하지 않는 구절이지만 내가 알 정도면 꽤나 유명한 구절이 아닌가 싶다. 바로 이 글이 내가 유토피아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모든 지식인들이 입을 모야 한번은 꼭 읽어야만 하는 필독서라고 이야기하고 평소 관심이 많던 사회과학 분야에 단골로 등장하는 책이라 솔직히 지금 읽은 것도 늦은감이 없지 않은거 같다. 유토피아가 씌여질 당시의 상황이 모직물 공업의 발전으로 양모의 수요가 늘자 양의 사육을 위해 감자 밭을 목장으로 만들어 엄청난 기근이 찾아오게 되어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게 되고 급기야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는 내용, 양이 사람을 잡아먹었던 시절에 씌여졌던 이 작품이 어쩌면 지금의 우리의 종교가 되어버린 신자유주의와 끝을 모르고 달리는 산업화로 인해서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고 평등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요즘의 우리 사회와도 어쩌면 많이 닮아있다고 느꼈고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을 집중해서 읽게되었다. 첨부터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이 있어서 긴장하고 읽었던 탓인지 몰라도 생각보단 어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 스스로 전반적인 지식이 없고 스토리 형식으로 내용을 흡수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그냥 완독을 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많이 느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아주 유익한 작품이었다.


일단은 이 작품은 워낙에 유명하다 그리고 서문에서도 밝혔지만농담을 즐겼던?! 작가인 토마스 모어는 곳곳에 애매모호한 의미의 장치 혹은 단어들을 숨겨놓았다고 한다 일단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문외한인 나로써 모든 걸 알고 흡수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래의 구절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천천히 읽어내려 갔었다.

10 page

그러나 ‘유토피아'라는 이름은 다른 명칭의 의미, 즉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는 작품을 읽는 동안 내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권과 2권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라파엘 논센소 라는 인물이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그곳의 상황을 소설 형식을 빌려서 쓴 글인데 본격적인 유토피아의 이야기는 2권에서 부터 등장한다. 실제의 이야기처럼 씌여진 소설형식 이라는 이런 설정 자체가 1516년에 씌여졌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대단히 현대적이고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모어는 자신이 살고 있었던 당시의 영국의 상황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 었던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라면 어떤 나라로 만들 수 있겠다는 하나의 대안을 라파엘 논센소라는 인물을 통해서 풀어내었던건 아니었을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을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나를 끌었던 요소는 꼭 글에 등장하는 유토피아의 정책과 정치적 상황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근무시간 등등 상당히 디테일하게 전개해가는 방식이 꼭 어떤 대선후보의 공략과도 같이 들렸었다. 거의 500년 전에 저런 세상을 꿈꿨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정말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권력은 분산되고 사람들은 돈에 욕심이 없으며 보석보다 철이 더 귀한 세상이며 먹을 만큼만 버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정말이지 멀지 않은 예전에 사람들을 흥분케 했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국가를 연상 시키지만 우리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던 그런 과격하고 새빨간 의미의 국가는 유토피아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정말 허구의 세계라 가능한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정말 저런 국가를 가질 수 없는건가 라는 회의감 마저 들게 만들었다. 지금의 우리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그런 세상은 당연히 오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의 욕심이 경쟁을 부추기고 그럼으로써 질 좋은 상품과 더 많은 재산들이 우리에게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주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걸고 있는것 같다.


스웨덴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민주주의라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나라다. 사민당이 40년 넘게 집권을 하면서 국민의 복지는 세계 최고가 되었고 그 나라 역시 우리나라 처럼 재벌이 있지만 임금소득자기금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시스템을 도입해서 권력이 재벌에 의해서만 돌아가는게 아니라 노동자도 동등한 위치의 자격이 주어지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느껴보지 못한 복지를 그들은 누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뉴스를 접하기도 힘들뿐더러 이런 정보에 다가가려면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위 정치인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가 제일 이라는 주문에 걸려 스스로를 경쟁에 내몰고 고통을 받고 있는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봤다. 모직물 공업의 발전으로 양모가 필요해 농지를 양에게 내어주고 그때문에 사람은 굶어죽고 도둑질을 하여 죄를 짓고 사형에 처해졌던 당시의 영국에서의 토마스 모어에게는 유토피아같은 나라가 필요했을게 분명했을 것이다.

500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 세계에서는 조심스럽게나마 스웨덴이나 핀란드 처럼 조금씩 천천히 이런 나라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희망을 갖게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일이 가능하기 까지는 이런 훌륭한 문학적 유산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루소의 급진적 민주주같은 사상이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어 내지 않았던가 유토피아를 읽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과학 도서들을 읽으면서 정말로 우리가 바라는 국가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건가? 우리 스스로가 포기한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나역시 회의주의자인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을 접하면서 다시 한 번 꿈을 꿔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토피아의 어원은 어디에도 없는 나라지만 인간은 갈수록 평화를 갈망하게 되고 또 그에 맞게끔 진화를 하는게 아니겠는가 조심스럽게나마 유토피아 같은 세상을 꿈꿔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 있어서는 종교적 성향이 강했던 것이 적지않은 실망으로 다가왔는데 무신론자인 나의 관점에서는 토마스 모어도 자신의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는 종교적 철학을 작품에 접목을 시켰고 그게 큰 부분을 차지했을지는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제일 잘 살고 평화로운 유럽인들은 대부분 종교를 버렸다. 종교가 주는 갈등을 없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평화로운 국가가 되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고 나도 그렇게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문장을 적으면서 글을 끝낸다.

74page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조직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살도록 방치합니다. 결국 그들이 자라나서 성인이 되고, 어린아이 때부터 운명적으로 저지를 수 밖에 없게 돼 있었던 범죄 행위들을 저지르게 되면, 사람들은 그들을 벌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도둑들을 만들어내서 그 도둑질에 대해 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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