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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로드 - 고추가 일으킨 식탁 혁명
야마모토 노리오 지음, 최용우 옮김 / 사계절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고추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식재료 중 하나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고추는 웬만한 식탁에는 빠지지 않으며, 고추 없는 한식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고추가 한국에 전래된 때가 불과 300년 전이라면 믿으시겠는가? 그 이전에는 고추장도, 고추를 이용한 붉은 김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고추라는 식물이 불과 300년 만에 한국인들의 식탁을 휘어잡게 된 것일까? 또 고추는 대체 어떤 경로로 저 먼 아메리카 대륙의 원산지에서 한반도까지 전래된 것일까? 이 책은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명쾌한 해답들을 내놓아준다. 또한 한반도 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 유럽 등등 세계 곳곳에 고추가 어떻게 전래되었고 요리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도 설명해주고 있다. 고추와 그 매운맛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한번쯤 꼭 읽어보시는걸 추천한다. 고추요리를 즐기는 한국인으로써 한번쯤 이 매력적인 식물에 대해 알아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것이다.
먼저 이 책은 고추의 원산지, 고추의 종류들과 고추가 매운 맛을 내는 이유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추는 매우 오래전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중요한 식재료였고, 그 종류 또한 매우 다양하다. 고추의 종류에는 크게 안눔, 키넨세, 바카툼, 푸베스켄스 종이 있는데 이 중 우리가 가장 흔히 먹는 안눔 종에 속하는 고추들끼리도 모양과 크기가 천차만별이다. 고추가 왜 그리 매운 맛을 내는지 상상해봤을 법도 한데,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새들에게만 선택적으로 먹히기 위해 그렇게 진화한 것이다. 자연계에 있는 동물들 대부분은 매운 맛을 극도로 꺼려하지만, 새들만 유독 매운맛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고추가 새들에게 먹힐 경우 고추씨의 발아율이 가장 높고, 때문에 매운 맛을 느끼지 못하는 새들에게만 선택적으로 먹히기 위해 매운 맛을 진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고추는 콜럼버스의 항해를 통해 1493년경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다. 콜럼버스 일행은 그토록 찾던 후추를 찾지는 못했으나 후추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고추를 찾았고, 이것을 후추의 대용품으로 유럽에 소개했다. 이 낯선 작물은 스페인 땅에서 엄청난 환영을 받았고, 16세기 중반 무렵이면 스페인 곳곳에서 고추를 보편적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에서 고추는 식용과 값비싼 향신료 대용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관상용으로 재배되기도 하였다. 16세기 스페인의 기록에는 심지어 고추에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는 약효' 가 있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서 고추가 이렇게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많은 유럽 국가들은 고추가 병을 일으키거나 해롭다고 생각했고( 운 맛 때문에 당시 유럽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느껴졌을만도 하다), 감자를 비롯한 신대륙 작물 대부분 역시 비슷한 편견때문에 대중화가 늦었다. 사실 오늘날에도 몇몇 지역들을 제외하면 고추를 요리에 사용하는 유럽 국가는 거의 없다. 그나마 남이탈리아, 특히 칼라브리아 지방에서는 예외적으로 고추를 다양한 요리들에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고추를 이용한 소세지, 소스 등을 먹는데, 어쩌면 무더운 기후때문에 고추가 그렇게 인기를 끈 것일지도 모르겠다(같은 이탈리아라도 북이탈리아 지역에서는 고추를 요리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유럽에서 고추가 많은 인기를 끄는 나라는 예상 외로 헝가리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나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통해 헝가리까지 고추가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헝가리에서 고추는 품종개량을 거쳐 "파프리카"라는 새로운 품종으로 탄생했다. 즉 우리가 먹는 파프리카는 원래 고추였으며, 헝가리에서 품종개량을 거쳐 파프리카로 재탄생한 것이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유럽보다도 고추가 더욱 많은 요리에 이용되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특히 고추를 많이 사용하는 지역은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한국이다. 인도에서는 이미 고추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후추를 이용한 매운 요리들이 많았는데, 16~17세기 경 유럽인들에 의해 고추가 들어온 이후 현재까지도 중요한 식재료로 애용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인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고추가 악령을 쫓기 위한 부적의 일종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인도 북쪽에 위치한 네팔에서도 고추는 감자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식재료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아시아의 최강 고추사랑 국가는 따로 있으니, 바로 부탄이다. 이 동네에서는 말 그대로 거의 모든 요리에 고추가 들어가며, 고추 없는 식탁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때문에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맵게 먹는 국가 중 하나이며, 부탄인들의 일상적인 식사조차 우리 기준에서 보면 '토할 정도로 맵다(저자가 직접 체험해본 결과 나온 결론이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에 걸맞게 지역마다 음식과 조리법이 천차만별이다. 중국 안에서도 가장 고추를 애용하는 지역들은 쓰촨성, 윈난성, 구이저우 성 등 중국 서남 지방이다. 나머지 지방들은 고추를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 덥고 습한 서남지방의 기후가 큰 작용을 한게 아닐까 싶다. 흥미롭게도, 중국은 동북아 3국 중 고추의 대중화와 전래가 가장 늦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고추에 대해 언급한 서적은 17세기 말에 가서야 나왔으며, 17~18세기 중국의 요리 서적들에는 고추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요리 서적에서 고추가 모습을 드러낸건 19세기가 되어서였다. 중국 서남지역에서 고추가 대중적으로 재배, 이용되기 시작한것은 20세기 초반부터였다. 참고로 중국인 중 의외의 인물이 고추를 즐기기로 유명했으니, 그는 바로 모주석이었다. 매운 요리가 발달한 후난성 출신인 마오쩌둥은 고추광이라 불릴 정도로 고추 요리를 즐겨먹었으며, 고추 없이는 식사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모주석은 매운 고추요리야 말로 혁명가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음식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마 지나치게 매운 고추 음식들이 그의 뇌와 판단력에 나쁜 작용을 일으킨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고추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고추를 최초로 언급한 문헌은 17세기 초에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고추가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일간에 가장 격렬한 접촉(???)이 있었던 시기가 임진왜란이니, 임진왜란 시기에 고추가 일본으로부터 들어왔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고추가 들어온 이후에도 한동안은 독이 들었다는 소문 때문에 요리에 잘 이용되지 않았다. 17세기까지도 고추는 김치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18세기가 되어서야 고추가 들어간 김치가 탄생했다고 한다. 즉 우리가 지금 먹고있는 새빨간 김치는 겨우 200년 전에야 탄생한 셈이다. 그렇다면 고추를 거의 이용하지 않는 일본과 달리 유독 한국에서 고추를 이용한 요리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한국의 육식 문화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육식을 금기시했으며, 주로 생선류를 먹었다. 때문에 고기의 누린내를 잡아줄 향신료가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조선시대 이후로 육식을 즐겨했고, 향신료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고추가 들어오기 이전에 흔히 쓰인 향신료는 후추였는데, 이것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온 비싼 수입품이었기에 일반인들은 쉽게 접하기 힘들었다. 반면 고추는 한국에서도 잘 재배될뿐더러 값이 쌌기에 후추를 대체할 향신료로 빠르게 퍼져나간 것이다. 이것 외에도 한국에서 고추요리가 크게 유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들이 존재한다.
1.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내기 위해서라는 설
2. 겨울에 부족한 비타민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는 설
3. 소금 공급 부족을 고추의 매운맛으로 보충하려 했다는 설
4. 고추의 빨간색과 매운맛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인식 때문이라는 설
의외로 4번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민간신앙에서 고추는 귀신을 막아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금줄에도 사용된다. 개인적으로 이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한국의 고추 붐을 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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