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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이영도 외 지음 / 황금가지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이매진 단편 공모전, 황금드래곤 문학상, 과학기술 창작문예, 디지털 작가상, KT&G 상상마당 문학공모전 등 화려한 입상 경력을 자랑하며 온·오프라인 안팎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이 쓴 책이라지만, 10명의 저자 중 내가 알고 있는 작가는 단 두 명이었다. <드래곤 라자>의 이영도와 얼마전 멀티어쩌구란 상을 받은 김이환, 이렇게 단 두 명. 그렇다고 그들의 책도 읽어본 것도 아니다. 한국환상문학이라고 불리울 만한 것 중에 읽은 것이라곤 꼴랑 <그림자 자국>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도 조금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정말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긴했지만 워낙 내가 읽지 않던 이야기들이라 생각하며 괜히 겁부터 냈다.
어째서인 환상문학, 결국 "판타지소설"이라는 장르만 보면 해리포터시리즈가 떠오르기보단, 대여점에 수북히 꽂혀있는 무협지같이 허구맹랑하며, 표지 또한 음침한 분위기만을 풍기는 책이라고만 생각이 든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채 생긴 환상문학에 대한 선입견은 "한국환상문학단편집" 이라 이름붙여진 책들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고, 이번 책 역시 호기심반 거부감반 이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읽어보지도 않은 채 거부하기보단, 읽어본다음 정당한 이유를 들어 싫어하자는 마음도 들었고, 이 책의 표지에 끌리기도 했고, 도서관에 신간으로 들어온 것을 기회로 삼아 이번 기회에 읽어보게 되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 단편집이란 특성때문에 이 책 속의 총 10개의 단편 중엔 너무나 재미있어 미칠 것 같은 이야기도, 그냥 그런 평작 정도의 이야기가 고루 섞여 있었다. 유독 눈길을 끌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는 정희자의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이였다. A라는 사람이 소설을 쓰는 사람 B에 대해 소설을 쓰며, 그 소설 속에서 B는 소설을 쓰는 사람인 C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고, 그렇게 F라는 소설가에 대한 소설까지 이어진 상황에서 F가 A에 대한 소설을 쓰는 이야기여서, 말그대로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서로의 이야기는 어디까지이고 누가 어디까지 써야하는지가 불명확하면서도 결국 그들간에 대화로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형식의 이야기에 반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껏 소설 속 주인공이 소설을 쓰며 그 소설을 들려주는 이야기는 몇번 읽었지만, 그 소설 속 이야기가 무한반복되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하나의 순환고리를 이어주는 이 이야기와는 다른 느낌이기에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소재로 정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인 박애진의 <학교>였다. 학교에서 살아남아 어느하나 재물로 바쳐지지않는 회사에 들어가 결혼을 하고 평범한 아기를 낳아 키우는 것이 꿈인 한 소녀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야기는 학교에서 노동을 하고, 포인트를 따며, 높은 점수로 졸업을 하는 것이 목표였던 온다리쿠의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였다. 다만, 온다리쿠의 이야기가 학교에서 탈출한 소년들이 과거로 이동하는 것과는 달리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재물로 바쳐질 것같은 상황에서 학교를 벗어나서도 또 다른 공동체에서 소외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조금 더 섬뜩한 면이 있었다. 수없는 경쟁을 통해 대학에 들어가도, 또 다시 수없는 경쟁을 통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되고, 직장에 들어가서도 수없는 경쟁을 통해 승진하여야 하는 어디 하나 살기 편한 곳이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결국 벗어난 곳에서도 그런 현실 속에 갇혀버리며 어느 곳 하나 살기 편한 곳이 없는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듯한 이야기에 더욱 소름이 끼친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상자 속에서 나온 고양이의 이야기인 <은아의 상자>나 토란의 모험을 그린 <노래하는 숲>, 속사이는 돌을 통해 역사가 바뀌고 바뀐 <뮤즈는 귀를 타고>, 봉사활동점수를 모으듯 선행포인트를 모아 천국에 간다는 <천국으로 가는길>이나 달팽이에게 해준 이야기가 현실이고, 그 현실이 결국 다른 친구에게 해준 이야기이며, 아무튼 끊임없이 순환하여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도 하나 같이 매력있는 이야기들이었다. 환상문학이라 하면 "용"이 나오고 "마법사"가 나오는 그런 이야기일 것만 같던 생각을 비웃듯 현실같으면서, 현실이 아닌 그런 이야기들에 푹 빠져버리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모든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었지만 의외로 가장 밋밋하다고 느껴졌던 이야기는 이영도의 <샹파이의 광부들>이었다. 네이버캐스트에서 연재한 <에소릴의 드래곤>의 후속작이라기에 먼저 <에소릴의 드래곤>을 읽는 공을 들였건만.. <에소릴의 드래곤>에 미치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유일하게 <그림자 자국>이란 그의 책을 읽었었고, <드래곤 라자>라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의 저자이기에 조금은 기대했는데.. 너무 짧은 이야기 탓인지 재미를 느껴보기도 전에 끝나버린 듯한 느낌과 딱히 마음에 끌리는 설정이 없어 너무 아쉬웠다. 용과 협상을 하고, 용과 싸워 이기던 <에소릴의 드래곤>의 후속작이라지만 늑대인간과 더스번경이 등장하는 것 외엔 별로 후속작 같지도 않고.. 아무튼 이 책속의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그냥 밋밋할 뿐이었다.
정말 읽는 내내 달콤 쌉싸름했다. 내가 알지 못하던 작가들의 거침없는 입담에 반해버렸고, 은연 중 드러나는 현실에 씁쓸함을 느끼게되며, 단편집이기에 느낄 수 있었던 다양한 색깔의 이야기들에 푹 빠져버리게 되었다. 이제까지 "환상문학"은 "무협지의 옆을 차지하고 있는, 인터넷 소설과도 같이 조금은 낮은 수준의 문학"이라 생각했던 나의 편견을 확 바꾸어준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아무래도 조만간 이 책의 저자들이 참여했던 <U, Robot 유, 로봇>이나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그리고 김이환 작가님의 <절망의 구>를 하나씩 하나씩 섭렵해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