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10인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IVP / 199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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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독교가 2000년에 걸쳐서 오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기도, 그리고 논쟁과 합의가 있었습니다. 또한 고비고비마다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그동안의 흐름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했지요. (물론 그 모든 것은 한 사람만의 힘으로 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구요.) 

그런데 솔직히,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막연하게 들어는 보았지만, 정작 그들이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을 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사상이 워낙 방대하기도 하고, 그 시대의 배경까지 알아야 하는 일이라서 엄두를 내지도 못했지요. 신학생들이야 그래도 교회사상사 시간에 조금씩은 배웁니다만 일반인들은 그나마도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에 질리기도 쉽구요.


  오늘 소개하는 책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일단 얇습니다!!! 겨우 190페이지 밖에 되지 않아요!! 이 얇은 책 한권에 10명의 사상을 담아냈습니다!! 아니 이런일이!! 그 이름을 보면, 예수님의 신성을 주장했던 아타나시우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던 어거스틴, 우리의 죄를 배상하려면 십자가가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주장한 안셀름,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우리 수준에 맞게 계시한다고 보았던 아퀴나스, 종교 개혁의 깃발을 높인 들어올린 마틴 루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한 칼뱅, 교리적 측면보다 생활적 측면의 개혁에 관심을 두었던 쯔빙글리,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회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조나단 에드워즈,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한 칼 바르트, 인간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갈망에 대해 고민했던 CS루이스입니다. 우와~ 어마어마하지요? 이런 일을 과연 누가 해냈을까요?


  저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 중 한사람입니다. 20대에 이미 분자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수재였던 그는 그 이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역사신학으로 방향을 틉니다. 탁월한 통찰력과 왕성한 저작활동으로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자리매김을 했고 지금은 옥스포드대학에서 석좌교수를 하고 있지요. 

  사실 내공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들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은 허세를 부리는 것이거나 오히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그것을 쉽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10명의 거인들의 삶과 사상을 이렇게 얇은 책에 요약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그가 해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내공이 만만찮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자가 쓴 다른 책들은 보통 500페이지를 넘습니다.) 

  물론 거대한 내용은 이렇게 압축하다 보니 당연히 많은 이야기들이 삭제됩니다. 그들의 사상 중 아주아주 일부만 소개하는 차원에 그치지요. 따라서 저자의 바람도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이 위대한 사상가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들의 책을 직접 읽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얇다고 해서 우습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역사신학의 고수답게 저자는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잘 풀어주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냥 믿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예 맞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안셀름의 말을 인용하자면 '믿음은 이해를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일단 믿음을 갖게 되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은혜이지요. 너무나 다양한 방식으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미 믿은 것을 이해하려는 자연스러운 욕망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배워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생긴 다음에는 그 믿음은 자라야 하는 것이며, 그러려면 지적인 사고와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저자는 철근을 넣어서 보강한 콘크리트에 비유합니다. 즉, 이해를 통해 보강된 믿음은 압력을 받아도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또한 보디빌딩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그러면,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성경만 읽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서, 기독교 사상가들에 대해서 읽는 것은 그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성경구절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고, 이전에 까다롭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을 꿰뚫어 볼 수도 있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간증을 통해서 감동받을 수도 있구요. 성경은 물론 개인이 묵상하기에도 유익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서 나눌 때 훨씬 풍성해진다는 것은 우리들도 이미 경험한 사실 아닙니까? 그러니 이렇게 위대한 사상가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토론하는 자리에 초청받는다면 얼마나 좋은 기회이겠습니까? 물론 너무 어렵게 얘기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다행히 맥그래스는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책을 읽다보면, '해 아래 새것은 없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하는 질문이나 그와 연관된 질문들은 대부분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했던 질문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다른 그리스도인이 제시한 답변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오늘날에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도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읽고 냈던 리포트의 제목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이나 나나'였습니다. 교수님이 웃으시더군요.^^


히브리서 12:1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을 믿음의 경주라고 표현할 때 이미 앞서서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응원석에 앉아서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믿음의 선배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고민과 나름대로의 해답,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기 위한 열정과 갈망은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빛을 비춰주기도 하며 큰 힘이 됩니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목은 'A Cloud of Witnesses (증인의 구름)'이랍니다. 왠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구름기둥이 생각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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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生生 심리학 - 생활 속에서 써먹는, 살아 있는 생생 심리학 1
이소라 지음 / 이밥차(그리고책)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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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심리학이 대유행입니다. 인터넷에는 '남자들은 모르는 여자들의 심리'라거나, '당신의 지갑을 열게 하는 마트의 심리전' 등의 이야기들이 넘칩니다. 심리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출간되었구요. 이제는 아동심리, 청소년심리, 노인심리 등으로 점점 더 세분화 및 전문화 되고 있고 심리치료 또한 각광받고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의 아픔이 많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이제 좀 먹고 살만해져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처음부터 책으로 기획된 것은 아닙니다. 카톨릭대학교 심리학과를 다니던 저자가 (어린 대학생이라는 이야기지요.) 자신의 블로그에 재미있는 심리학 이론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방문자가 300만명을 넘게 되고 결국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이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게 되고 책으로 엮이게 되는 것이지요. 요리법, 여행기, 육아법.. 등등 각종 분야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혹시 압니까? 이 서평들도 나중에 모여서 책이 될 지. ^^;;)


  이 책에는 블로그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55개의 내용을 엮어 놓았습니다. 책을 읽어보면 먼저, '이렇게 당연한 것을 이론으로 만들다니!' 하는 생각이 드는 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킨십이 아이에게 좋다, 여럿이 일을 할 때는 혼자 할 때보다 열심히 하지 않는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이런 것들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이런 것들을 실험과 관찰을 통해 증명을 하고 이름까지 붙였더군요. 스킨쉽이 좋다는 것은 '접촉위안', 집단 작업을 할 때 성취가 떨어지는 것을 '사회적 태만', 첫인상의 중요성을 '인상의 초두효과' 등등으로 말이지요. 왠지 좀 있어보이지 않습니까?^^


  또, 어떤 것들은 읽어보면 '오호~그렇구나'하고 반응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심리학자 앨리어트 애런슨과 다윈 린더는 80명의 실험참가자를 모집해서 서로 개인에 대한 평가를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절반은 실은 미리 실험자와 짠 사람들이었지요. 이 스파이들은 다음의 4가지 유형 중 한가지를 택해서 진짜 실험참가자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1유형 : '지적으로 보이시네요. 아무리 봐도 호감형이에요' ->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으로 말하기
2유형 : '공부 못할 것 같아보여요. 암만 봐도 비호감이다.' ->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으로 말하기
3유형 : '귀엽게 생겼네요. 근데 좀 생각 없어 보인다.' -> 긍정적으로 말하다 부정적으로 말하기
4유형 : '까칠할 것 같아요. 그래도 책임감 있을 것 같네요.' -> 부정적으로 말하다 긍정적으로 말하기


그리고 나서 진짜 참가자들에게 스파이들에 대한 호감도를 평가하라고 했는데요. 호감도 평균점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위 : 부정적 -> 긍정적
2위 : 일관된 긍정적
3위 : 일관된 부정적
4위 : 긍정적 -> 부정적


이었습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나서 바로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이전의 긍정적인 평가도 왜곡하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평가 후 바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 이전의 부정적인 평가도 신뢰할 수 있는 지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면 지적한 후에 좋은 면을 같이 칭찬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넌 다 좋은데 이게 문제야.'라고 하는 것 보다는 '넌 이 점만 고치면 진짜 좋은 녀석이야' 라고 하는 것이 잘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지요. '오호~ 그렇구나'


  좀더 간단한 실험 하나만 더 이야기해볼까요? 독일의 사회학자 프리츠 스트랙이라는 사람이 한 실험인데요, 실험 참가자를 두 집단으로 나눠서 A그룹에게는 볼펜을 이로 물고 입술을 벌리고 만화책을 보게 하고, B그룹에게는 볼펜을 입술로 물고 만화책을 보게 했습니다. 볼펜을 이로 물고 입술을 벌리면 웃는 듯한 표정이 되고, 입술로 물면 불만이 있는 것처럼 입이 나오게 되기 때문이지요.(지금 한번 해보세요.) 그리고 나서 만화책이 재미있었냐고 물었더니 A그룹 사람들이 더 많이 재미있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웃겨서 웃는게 아니라 웃으면 웃긴다는 말이 옳은 것으로 증명된 것이지요. '오호 그렇구나~' 재미있지요?^^

 

  이런 재미있는 실험과 이론들과 더불어 돈을 아끼는 심리학적 방법, 호감을 일으키는 방법 등 제법 쏠쏠한 팁들도 들어 있습니다. '똑똑하게 보이려면 말을 빨리 하라','공돈을 목돈으로 만들고 싶다면 2주만 참아라' '결심을 지키려면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녀라.'.. 은근히 재미있습니다.
 

  기독교는 심리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요? 현대의 교회가 복음보다는 심리학에 더 빠져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고 조작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잘 사용할 수 있다고 보시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가 선용이고 어느 정도부터가 남용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이런 책에는 심각하게 반응하지 말고 그냥 가볍게 웃으면서 읽어주면 됩니다. 상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내용들이거든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재미있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원래 미술을 전공하려고 했었다고 하더군요. 어쩐지..) 이 글에서 그 그림들을 보여드릴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거나 복잡할 수 있는 심리학의 이론들을 재치있는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쉽고 생생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내공과 노력이 놀랍고 가상합니다. 이런 수고 덕분에 우리는 키득대면서 책을 술술 읽고 쏠쏠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잠깐, 제 아내가 대학 때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공부했었는데, 혹시 그래서 제가 넘어간 것은 아닐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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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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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의 멘토를 한분 소개해야겠네요.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김두식 교수님입니다.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변호사이고, 국가 인권위원회를 비롯한 많은 시민단체의 자문을 맡기도 하신 분이지요. 보수주의 분위기에서 자란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 이제는 조금 삐딱해져서(?!) 폭넓은 시각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루는 데 관심이 많은 분입니다.


  저랑 어떤 관계시냐구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냥 독자와 저자의 관계일 뿐이지요. 그런데도 제가 감히 그분을 저의 멘토라고 칭하는 이유는, 제가 그분의 글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서들의 내용이 다양하고 좋습니다. <헌법의 풍경>에서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법인 헌법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땅에서는 어떻게 지켜지거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평화의 얼굴>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며, <불멸의 신성가족>에서는 법조계의 전관예우, 마담뚜, 브로커등에 대해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는 진정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그리고 더 좋은 점은 글을 쓰는 자세가 참 진솔하고 친근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경어체를 씁니다. (지금 제가 쓰는 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참 솔직하게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은근한 유머도 가지고 있구요. 그래서 그의 글쓰기는 저의 글쓰기의 멘토가 되기도 합니다. 잘 따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알고보니 이 분이 또 영화광이셨더군요. 그래서 강의에 영화를 자주 인용하신답니다. (아니, 이럴수가! 이것도 저랑 비슷하네요!!)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요청으로 '영화와 인권'이라는 강의를 몇 차례 하셨고 그러다가 결국 코가 꿰여서 이런 책까지 내게 된 것이지요. 이 책의 부제가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이야기'이거든요. 여러가지 부분에서의 차별을 바라보며 인권을 이야기하되, 우리에게 익숙한 (또는 낯설기도 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좀 까다롭고 딱딱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부드럽게, 또한 강렬하게 전달됩니다. 물론 글쓰기의 고수인 저자의 친절한 안내가 우리를 잘 인도해주고 있지요.

 이 책에서 저자는 청소년 인권, 성소수자 인권, 여성 폭력, 장애인 인권, 노동자의 차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인종차별 등에 대해서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무려 81편의 영화를 이용해서 말이지요!!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저자는 다름을 인정하자고 합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쌓이고 쌓이면 엄청난 인종학살까지 가져온다고 경고하지요. 1994년 100일동안 9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르완다학살의 시작도 '우리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키도 크고 잘생겼고 똑똑하다.'는 차별의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차별을 서구의 식민세력이 이용하고 강화했고 그에 대한 후투족의 오랜분노가 결국 투치족에 대한 대량 학살로 드러났다는 것이지요. 하루에 1만명씩 죽였다니요!! 정말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저자가 또 강조하는 것은, 인권감수성입니다. 그게 뭐냐구요? 바로 '불편함'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까칠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예를 들어 스파르타와 페르시아군의 전쟁을 그린 영화 <300>을 본 우리들은 근육 빵빵한 남자들의 야성미에 감탄하지만 저자는 그 안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읽어내고는 불편해합니다. 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있느냐구요? 그 용감무쌍한 스파르타군의 배후를 치도록 샛길을 알려준 배신자가 우리가 꼽추라고 부르는 척추장애인이거든요. 실제 페르시아전쟁을 기록한 헤로도투스의 <역사>에는 장애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에이, 그냥 오락영화에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구요? 저자는 그런 식으로 술술 넘어가다보면 인권감수성이 무뎌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우리 사회 곳곳, 아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몸에까지 배어 있는 차별의식을 드러내고 교정하지요. 대단한 내공입니다.  


 참, 저자의 진솔하고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글쓰기도 제가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지요? 한 부분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네요. 청소년 인권을 다루는 부분에서 자신의 딸과 있었던 갈등을 소개한 부분입니다.


 "제 딸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엄마 아빠 같은 찌질이로는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졌고, 집에 올 때면 동급생 남자 친구들의 호위를 받았습니다... 자꾸 충돌하게 되면서 고민하는 저에게 유선생님은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버려야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법칙입니다. 사춘기 자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게 다 자기에게 주어진 지랄을 쓰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도 했습니다... <네 멋대로 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저는, 부모라는 직업에 필요한 것은 자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지, 기대나 닦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제 관점이 변하자 딸도 변했습니다...물론 딸에게는 앞으로 더 써야 할 '지랄'의 총량이 엄청나게 남아 있을 것이고, 부녀간의 충돌도 계속되겠지요..."


 좋지요? 이런저런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읽다보면 360페이지의 제법 두꺼운 분량인데도 쉽게 책장이 넘어갑니다. 아는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면 '나도 알아!' 하고 무릎을 치기도 하고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나중에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마음이 뜨끔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슬며시 미소짓기도 하고, 함께 분노하기도 하다보면 어느새 인권감수성이 조금씩 갖추어지게 됩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아내와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책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아내가 묻습니다.

 '당신이 이 책에서 말하려는 인권이 도대체 뭐야?' 

 저자는 대답하지요.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거야.'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기억하시나요? 바로 마태복음 8:12절에 나온, 예수님의 유명한 황금률입니다.

 영화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인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의 표현으로 한다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지요. 쉽지 않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더더욱 가져야 할 자세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교회가 더 차별과 배제, 획일과 독단에 빠져 있을 때가 많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진리를 지킨다는 미명으로 차별과 정죄를 정당화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회개해야겠습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내 입맛대로 교정하려고만 했던 자세를 고쳐야겠습니다. 강자에게는 꼼짝하지 못하면서 약자에게는 가혹하게 굴었던 비겁함을 바꿔야겠습니다. 단호하게 진리를 선포하셨지만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셨던, 특히 당시에 차별받던 여자와 죄인과 환자와 세리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지시고 포용하셨던 예수님을 닮아가야겠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불편해하는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불편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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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톰 라이트 지음, 노종문 옮김 / IVP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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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으로 모두들 침통해진 일주일동안, 이 땅에 왜 이런 고난과 악이 있는지에 대해 다시한번 묻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땅에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에서 神正論(신정론)이라는 분야가 별도로 있을 정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도 하나님께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도서관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보면서 다시한번 생각하고 있을 때 눈에 띈 책이 바로 톰라이트의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저자의 분석과 관점이 제게는 설득력이 있어 보였고, 지난 주일에 제가 했던 설교도 이 책의 논의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톰라이트는 지금 가장 Hot한 신학자입니다. 학자이면서도 대중적인 글쓰기를 동시에 해내는 역량 때문에 더 잘 알려지게 되었지요. 그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들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기존 교리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그러다보니,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있고, 존 파이퍼와 칭의에 대해서 한바탕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칭의논쟁’, ‘톰라이트 칭의를 말하다’로 번역되었지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사람입니다.

  저자는 아예 ‘성경은 악의 기원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못 박습니다. 대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1. 하나님이 악에 대해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2. 악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지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악을 묵과하지 않고 심판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제가 있는 우리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피조세계를 복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지 않고 이루어져 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인격, 행동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악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승리의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는 악을 처리하시고 이 우주를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비전을 보여주는 신호탄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서 악을 당장 제거하지 않으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악을 억제하셔서 세상이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은 막고 계시며, 언젠가는 악을 모두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피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 문제가 대단한 것이 아닌것처럼 가볍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런 것은 실제로 우리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 때 가지게 되는 태도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우리 눈 앞에 나타나면 오히려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지요.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대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분법적 태도도 버려야 합니다. 이분법적 태도는 저편과 우리편을 가르고 저편을 악으로 규정하는 태도입니다. 십자군때도 그랬고, 이라크전쟁때도 그랬으며, 우리도 날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대신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합니다. "악은 나와 남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을 가로질러 있다." 우리 안에도 악은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악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 문제의 해결책의 한 부분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십자가의 방법으로 악을 처리하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십자가의 길로 가야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서 부활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망을 품고, 회개와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성취를 믿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배우고, 기도와 거룩함과 더 넓은 세상 속에서의 행동을 통해 그 둘을 하나로 결합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소망을 품는 우리들은 오늘도 다시 일어섭니다. 회개하며 용서하고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다 알 수 없어도 믿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것이 악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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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셔 2015-01-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자서전
클레이본 카슨 엮음, 이순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에는 개인의 생일을 기념하는 공휴일이 2개가 있습니다. (엄청나지요? 우리도 충무공 탄신일이 공휴일이면 좋겠습니다만^^;;) 도대체 누구의 생일이길래 공휴일로까지 지정한 것일까요?

  하나는 2월 셋째 주 월요일,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 Day)'입니다. 조지 워싱턴과 아브라함 링컨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미국의 건국 대통령과 남북통일 대통령이 생일이 비슷하게 겹쳐 있으니 공휴일로 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의 생일을 기념하는 것일까요? 바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월 셋째 주 월요일입니다.)


  이렇게 생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만 봐도 루터 킹 목사님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지요. 1955년 12월 1일 로사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에 항의해서 일어난 몽고메리 버스보이콧 운동의 대표가 된 후 (그 때가 겨우 26살이었습니다!) 1968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괴한의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킹목사님은 인권, 평등, 비폭력저항의 아이콘이었고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1964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지요.


  기독교인으로서 흑인차별은 참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 어느 교수님께서 미국의 남침례교단이 성경을 사랑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남부지역을 'Bible belt'라고도 부른다고 말씀하시길래 손을 들고 질문을 했지요. "교수님, 그런데 그 바이블 벨트가 동시에 가장 흑백차별이 심했던 지역인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교수님께서는 어물거리면서 넘어가셨구요. (제가 좀 까칠했나요?)

  하나님을 믿고 가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의 십자가가, 진리의 성경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혹시 저도 지금 성경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엉뚱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킹목사님은 그런 것에 저항해서 싸운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끌었던 싸움의 방식은 폭력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잘못된 것에 침묵하지 않고 항의하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는 말자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주장한 비폭력저항주의는 상대세력에게 도덕적 타격을 가해서 사기를 약화시키고 양심을 자극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인들 중에도 킹목사에게 협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고, 세계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도 성공적이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흑인들 스스로가 무력감을 벗고 자신도 훌륭한 인간이라는 새로운 자존감으로 도덕적 목표를 이루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킹목사님을 그저 '비폭력저항주의를 실천한 운동가'정도로 생각해오셨던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진면목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시대의 모순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인함과 지혜도 겸비하고 있었지요. 사실 비폭력저항은 연약한 운동이 아닙니다. 무저항주의와 혼동하면 안됩니다. 비폭력저항은 폭력보다도 오히려 더 큰 용기와 강인함이 요청되는 운동방식입니다. 킹목사님은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그 운동방식을 끝까지 고수했고, 그 정신을 연설로 표현해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I have a dream'을 비롯한 명연설들이 그의 가슴에서 쏟아졌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설에 공감하며 거대한 흐름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킹목사님은 생각보다 과격한 사람입니다. (평화주의라고 해서 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가 자꾸 시위를 하고 긴장을 조성한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킹목사님은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흑인의 지위향상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물은 KKK단이 아니라 '정의'보다는 '질서'에 더 관심이 많은 온건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들은 정의가 존재하는 적극적 평화가 아니라 긴장이 없는 소극적 평화를 선호하며 우리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악한 사람들의 완벽한 몰이해가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의 천박한 인식입니다... 우리 세대는 사악한 사람들의 증오에 찬 언행뿐만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의 겁에 질린 침묵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고 반항세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주님의 몸을 더럽히고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정말 날카로운 통찰 아닙니까? 우리의 무관심을 질타하고 우리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꾸짖는 준엄한 선언이 아닙니까? 킹목사님의 이런 선언은, 그리고 그가 보여주었던 불꽃같은 삶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는 목사로서 복음운동과 사회운동을 분리시키는 태도에 대해서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사회적인 복음운동을 주창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의 영혼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또한 개인의 영혼을 변화시키려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성직자는 실업문제와 빈민가와 경제적 불안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사회의 부정과 부패, 제도적/구조적 불의에도 관심을 가지고 저항해야 합니다. (방법은 다양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회의 불의에는 침묵하거나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소위 영혼구원에만 집중하면 된다거나, 개인의 도덕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제한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아야'합니다.  


  킹목사님이 베트남전쟁에 반대했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지만 평화주의에 대한 킹목사님의 일관성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킹목사님의 신앙적 양심은, 그리고 그의 비폭력주의 사상은 전쟁 (더구나 베트남 전쟁처럼 명분 없는 전쟁)에 찬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전쟁 반대운동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미국인들마저 그에게 등을 돌립니다. 흑인들까지도 킹목사님을 비난했지요. 그에 대해 킹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특정 상황에 처하게 되면 비겁한 사람은 '안전한가?'를 다지고 편의주의자는 '편리한 방법인가?'를 따지며,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호응이 좋을까?'를 따진다. 하지만 양심적인 사람은 '옳은가?'를 따진다. 살다보면 안전하지도 않고 편리하지도 않으며 사람들의 호응도 좋지 않은 생각을 양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아.. 맞는 줄 알지만 걷기는 쉽지 않은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이 따라야 할 길입니다. 킹목사님이 그 어려운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길이 예수님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킹목사님이 꿈꾸었던 그 세상은 사실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차별이 없어진 것 같고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인종적, 문화적, 신체적인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있지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생명을 살리는 세상입니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일한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지만 동시에 약자도 보호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것이 킹목사님이 꿈꾸었던 세상이며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킹목사님의 뒤를 이어서 다시 한번 외쳐야 합니다.


 "We have a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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