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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시 그레이스 - 21세기 용서의 바이블
도널드 크레이빌 외 지음, 김재일 옮김 / 뉴스앤조이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2006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니켈 마인스라는 마을에서 세 딸의 아버지였던 32살의 로버츠라는 사람이 웨스트 니켈 마인스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학교는 아미시 마을의 자녀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였지요. 그리고 오전 11시 5분, 날카로운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로버츠가 6~13세의 여자아이 10명을 일렬로 눕히고 총을 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경찰이 교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5명은 이미 죽었고, 5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끔찍한 총기사건은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총기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미국이지만 이 사건이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문명과 거리를 두고 평화롭게 사는 아미시 마을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이제 미국에서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는 선언과 같은 사고였던 것이지요. 작은 마을은 수많은 언론과 방문객으로 북적거리게 됩니다.
그런데, 곧 더 큰 충격이 있었습니다. 니켈 마인스 아미시 사람들이 범인을 용서한 것입니다!! 그들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몇 시간 뒤에 범인을 용서한다고 선언했으며, 로버츠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로버츠의 장례식에도 찾아갔으며, 그들을 위해 돈을 기부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아미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전세계는 다시 한번 들썩거리게 됩니다. ‘용서’라는 단어가 내내 화제의 중심에 있게 됩니다. 아미시 사람들이 보여준 말과 행동에 대해 경외와 찬사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미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용서를 베풀 수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이 책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미시 사람들은 아나뱁티스트의 후예들입니다. (잠깐만요~ 역사공부하고 가실게요~) 아나뱁티스트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루터나 칼빈등 주류 종교개혁가들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이란 개인의 결단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다시 침례를 행합니다. (그래서 재침례라는 뜻의 아나뱁티스트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개인의 신앙을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요. 이런 태도는 주류 종교개혁자들로부터도 극심한 반대를 받습니다. 결국 아나뱁티스트들은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박해받고 수천명이 순교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한 평화주의를 실천합니다. 폭력을 거부한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려는 태도를 버리고 원수를 사랑한 것이지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습니다.
1569년, 아나뱁티스트라는 이유로 잡힌 빌렘스라는 사람이 탈옥을 합니다. 그러나 곧 발각되어 교도관과 읍장에게 쫓기게 되지요. 빌렘스가 얼어붙은 호수위를 달려서 건넌 뒤, 쫓아오던 교도관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이 때 빌렘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돌아가서 그 교도관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읍장에게 체포되어 화형되고 말지요.
아미시는 그 아나뱁티스트의 분파 중 하나입니다.
아미시는 수백년간 내려오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거리를 둡니다. 세금을 내거나 투표는 할 수 있지만, 징집은 거부합니다. 공직도 피하지요. 또한 그들은 공동체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일단 교회를 중심으로 대가족을 이루어 모여서 생활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책임집니다. 따라서 보험에 가입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사회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공동체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과학기술에도 거리를 둡니다. 자동차보다는 마차를 이용하고, 전기도 최소한만 사용합니다. 전화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과학기술이 공동체를 조금씩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것들을 포기합니다. 공동체의 규율에 복종하기로 서약하고 따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단순하게 따르려고 합니다. 깊이 생각하거나 따지기 보다는 실천하는 데에 더 신경을 씁니다. 심지어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신비이므로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무례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에서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들의 신앙은 교리보다 실천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특히 마태복음을 좋아하며, 그대로 실천하려고 합니다. 산상수훈을 중시하고, 주기도문을 늘 암송합니다. 마태복음의 주된 주제 중 하나가 ‘용서’라는 것을 아시나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 뒤에는 이상하게도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는 구절이 따라옵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는 붙어있지 않습니다) 또한 18장에는 그 유명한 ‘일만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가 나오고 나서 역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로 마무리 되지요. 아미시들은 이런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그리고 실천하지요.
총기 사건이후,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용서할 수 있나요?’라고 질문하자 그들은 오히려 당황해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면 당연한 것 아니에요?’라면서 말이지요. (솔직히 하나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들은 권위에 복종하고 절제하는 것을 훈련합니다. 용서에 대한 성경말씀을 듣고 암송하며, 위대한 순교자들의 이야기들을 되풀이해 듣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는 먼저 형제자매를 찾아가 화해하고 용서합니다. 그런 모든 과정 속에서 용서가 그들의 삶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용서는 원한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들도 용서가 쉬운 것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좀 위로가 됩니다..)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몇 번을 되풀이해 용서해야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그들의 오랜 전통 속에서 함께 하기에 그들은 용서를 훈련하고 실천합니다. 그리고 그 용서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세상은 경악했습니다.
아미시들의 신앙과 삶에 100% 동의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과 상황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옳으니까요.) 신학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그들은 정규 신학 공부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과학 기술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고루해 보입니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세상에서 마차를 타고 느릿느릿 따라가고 있다니요!!) 세상과 너무 분리 되어 있기 때문에 전도와 선교에 소극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도 마태복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가 정의의 이름으로 보복하려 할 때, 그들은 용서합니다. 우리가 개인의 자아 실현을 강조할 때, 그들은 공동체를 세웁니다. 우리가 국가기관에 가난한 이웃들을 떠맡길 때, 그들은 섬깁니다. 우리가 머리로만 알고 말로만 떠드는 ‘말씀’을 그들은 묵묵히 몸으로 살아냅니다.
아미시들이 사용하는 찬송집에 이런 찬송이 실려 있습니다.
이 생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세상의 모욕과 싸움을 무시해야만 하고
십자가를 매일 져야만 한다
이것만이 주님의 보좌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그 길이다
더 부끄러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