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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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년전 필리핀에 선교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5일밖에 안되는, 그야말로 초단기 사역이었지요.
산족(말 그대로 산에 사는 민족입니다) 선교를 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을 따라 산족학교를 갔지요. 신발도 없고 속옷도 입지 못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음이 짠했지만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우리 선교팀이 먹고 버린 닭고기를 주워서 깨끗이 발라먹던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눈물이 나와서 혼났습니다.
 
사실 그 아이들은 그래도 나은편에 속합니다. 이 세상에는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2005년 유엔의 보고에 따르면,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 가고 있으며, 비타민 A의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의 1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천만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아니, 인류역사상 최고의 생산성과 부의 축적을 자랑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지구 한쪽에서는 엄청난 양의 음식 쓰레기가 쏟아져서 처치 곤란이고,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하느라 음식을 줄이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니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저자는 이 문제를 파고 들어갑니다.


저자는 학자이면서 동시에 활동가입니다. 대학에서 강의하고 제3세계 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또한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 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지요. (그런면에서 이론과 실무경험을 겸비하고 있는 보기드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었던 기아의 참상을 가감없이, 그러나 담담한 목소리로 전달합니다. 담담한 목소리어서 오히려 더 가슴이 아프지요. 또한 이 책은 아빠와 아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계의 아픔을 아들에게 알려주고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도록 도와주고 싶어하는 아빠의 마음이 뚝뚝 묻어나지요. (제가 아들들이 있어서 그런지 더 깊이 와닿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기아의 참상만 전달했다면 이 책은 우리가 많이 보아왔던 TV다큐멘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갑니다. 책 제목을 다시 보십시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입니다. 저자는 그 원인까지 따져 들어갑니다. 정말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릴까요?


유엔에서는 기아를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기아'란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한 기아를 의미합니다. 가뭄, 태풍들의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상황이지요.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생산력저조, 인프라의 부족, 극도의 빈곤, 질병의 만연 등으로 인한 기아이지요. 이 두가지 모두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나는 것은, 인재(人災)로 인한 기아입니다. 정치적인 무능, 부패 같은 것들이지요. 기아해결보다는 전쟁준비나 체제수호에 광분하는 북한, 고위 관리들이 식량 수입독점권을 가지고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세네갈, 군벌들의 세력 다툼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소말리아 등지에서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이 책에서 그런 내용을 보면서 분노하게 되지요.


그런데, 저자는 또 한발 더 나아갑니다. 자본주의나 국가주의의 이면을 들춰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세계시장에 비축된 곡물의 가격을 좌지우지하는 곡물메이저회사와 투기꾼들을 비판합니다. 그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 곡물의 가격을 올리는데, 그렇게 되면 재정이 부족한 가난한 나라나 국제기구는 돈이 모자라서 기아를 해결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또 각 나라들이 자국의 농산품의 가격을 보호하기 위해서 공급을 제한해서 가격을 올리고 잉여 농산물을 폐기하는 것도 비판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실 자본주의 전체를 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자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다국적 기업의 문제점도 폭로합니다. 네슬레와 칠레의 아옌데대통령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지요. 좀더 자세히 살펴보지요.

1970년대 당시 칠레는 많은 아이들의 영양실조가 사회적 문제였다고 합니다. 소아과 의사 출신이었던 아옌데라는 사람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면서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공약했고 결국 당선되었습니다. 사회주의적인 공약이었지요. (지금 우리나라도 무상급식 등으로 이래저래 시끄럽지요?) 그런데 당시 칠레의 분유시장은 다국적 기업인 스위스의 네슬레(그 유명한!)가 거의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아옌데는 네슬레에게 분유를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네슬레는 협력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아옌데의 사회주의적 개혁에 대해 미국이 매우 경계하고 있었고, 아옌데 정권의 사회개혁이 성공해서 중남미 국가들에 전파되면 결국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이 침해받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미국은 더 나아가 칠레에 대한 지원을 끊고 운수업계의 파업을 조종하는 등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온갖시도를 합니다. 재정위기와 군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나라는 혼란해지고, 결국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피노체트에 의해 아옌데는 살해되고, 칠레는 다시 암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영양실조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기 위해서 많은 나라에서 군부정치를 지원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그 후 피노체트는 15년간 대통령을 하면서 3000명이 넘는 반대파를 죽이고 수천명을 고문하고 추방하는 등 악질적인 정치를 하다가 민주화를 요구하며 일어난 시위대에 의해 축출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절망하게 됩니다. 너무 거대한 문제가 얽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좌절과 절망만이 남은 건가요?'라는 아들의 질문에 저자는 '그래'라고 슬프게 대답합니다. 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없는 것일까요? 아들은 다시 질문하지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나요?' 아빠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거야. ' 이렇게 아들과의 대화가 끝나지요.


그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낭만적인 접근으로 구제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사람들을 적자생존의 원리로 밀어넣으며, 결국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그래서 경쟁에 뒤쳐지고 돈이 없으면 바닥에 있는 것이 당연시되는 모든 원리와 생각에 저항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짐 윌리스 같은 복음주의자는 지금 우리가 가장 대항해야 할 것은 동성애나 낙태가 아니라 빈곤이라고 선언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지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것은 개인의 도덕보다는 사회의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지요. 물론 퇴폐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이 사회에서 도덕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외쳐야 하지만, 도덕과 윤리의 영역으로만 하나님을 축소시키고 나머지 영역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면 더 큰 영역에서 하나님의 원리가 지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전파와 사회활동이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교사운동을 했던 독실한 크리스쳔인 송인수선생님도 일반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설립해서 비정상적으로 되어 있는 사교육을 바로 잡기 위해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교육의 과열로 인해 대다수의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고통이 심화되고 있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기독교사운동만으로는 그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기에 더 힘든 싸움에 뛰어든 것입니다.

'닥터 노먼 베쑨'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실려 있지요.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보다 마음을 고치는 의사가 고수이고, 사회를 고치는 의사가 최고수이다.' (원래 더 멋지게 표현된 것 같지만 기억이 잘 안나서 제 식대로 고쳐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다보니 조금 막연해집니다. 그렇게 엄청난 기아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요. 그런 거대한 싸움을 하기에 우리 스스로가 너무 작아보이니까요.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시민운동에 몸을 던질만큼 용감하지도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일단은 소시민적이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어려운 아이들을 후원하는 일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작은 일에만 신경쓰다가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거창한 이야기만 하면서 정작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위선적이기까지 하니까요. 그렇게 시작해서, 조금씩 지경을 넓혀나가야겠지요. 그런 운동을 하고 있는 (우리를 대신해서) 시민단체나 기관을 후원하는 일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분별하는 눈을 기르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원리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과, 그런 원리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도 가지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다시 해야겠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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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결혼했어요!
박수웅 지음 / 두란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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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정도 되었나요? 모교회인 다사랑교회 청년부 교사를 하고 있을 때, 학생들에게 어떤 세미나를 권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청년들의 관심사인 이성교제에 관한 세미나였지요. 이미 연애의 기술과 작업의 정석, 밀당의 예술을 넘어 절제되지 않은 성, 일시적인 쾌락이 TV나 영화, 인터넷을 통해 청년들의 눈과 귀와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 때에 하나님을 믿는 청년들은 어떻게 연애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미나였지요.
사실 교회 내에서 연애나 성에 대한 담론은 절제와 금지 일변도였고 그결과 오히려 순진한 청년들이 화려한 바깥세계(?)의 유혹에 준비되지 않은 채로 노출되어 시류에 휩쓸려 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때 만난 것이 저자의 전작, '우리..사랑할까요?'였습니다.
그 책을 읽고는 청년들에게 주저없이 권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교회 집사님 (사실 저의 어머니였지요^^) 의 후원을 받아 (받아냈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만^^) 그 책의 저자가 진행하는 세미나에 보냈던 것입니다. 다녀온 학생들이 실제적이어서 유익했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자가 또 하나의 책을 내놓았더군요. '우리 사랑할까요?'의 후속탄. '우리, 결혼했어요'입니다. (벌써 8년전에 내놓았는데 이제야 보았습니다..)


사실, 부부관계는 영원한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보신 (성경에서 '좋지 못하다'는 단어가 처음 나온 것이 바로 이 부분이지요. 그 전에는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셔서 짝 지워주신 이후, 부부는 가장 친밀한 연합을 누리는 상대이며,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동시에 때로는 야당, 심지어는 웬수가 되기도 하는 존재로 지금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부관계에 대한 책은 이미 수도 없이 나왔고, 각종 세미나와 TV프로그램도 절찬 상영중입니다.


그래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읽으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물론 결혼에 대해서 신자와 불신자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기는 합니다. 신자들도 사회적 인간이며, 문화적 인간이니까요. 별에서 온 그대처럼 지낼 수는 없지요.
하지만 결혼 자체가 하나님의 고안품이며 (가정이 교회보다도 먼저 세워졌습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언약관계'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우리들만이 가지고 있는, 또한 마땅히 가져야 하는 관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을 겸비하면서도 동시에 실제적이고, 다른 나라의 경우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심정과 상황을 이해하는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훌륭한 도우미입니다. (감사하게도 요즘은 이런 좋은 도우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저자는 의사입니다.(목회자가 아니어서 오히려 호감이 갑니다. 목사님들의 말씀은 좋긴 하지만.. 왠지 너무 거룩하지 않나요?^^)  가정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고 잘 나가던 병원직을 사임한 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가정을 회복시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요.
또한, 본인이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 때문에 가족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갑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많은 결혼이 힘든 이유는 혼수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혼수라구요? 저자가 말하는 혼수는 '가정설계도'입니다.
'가정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란 어떤 모습인가'를 알고 가정의 모습을 설계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것들을 알려주면서 함께 가정을 세워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설계도는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하나됨'입니다. 서로 다른 두사람이 만나서 한몸을 이루는 것이 가정의 목적인 것입니다.(창 2:24)
그러므로 부부는 온전한 육체적 결합과 더불어 정서적, 영적으로도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몇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이혼 위기에 있던 2만쌍을 회복시킨 저자의 상담'이라는 선전문구가 인상적인 책이었지요.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른지, 화성인과 금성인이 지구에 와서 만난 것과 같다고 하면서 남녀의 다른점에 대해 기술한 책이었습니다. 책에 따라 한동안 '나는 화성인이라구','너는 여잔데도 화성인 같네?'등등의 말들이 유행했었지요. 그책의 결론에 뭐라고 써 있는줄 기억하시나요?
'이 책의 내용을 다 잊어버리더라도 이것만 기억하라.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명언입니다. 또한 진리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남녀는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서로 공부해야 하지요.


또한 가정설계도는 거룩,비전,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가정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 설계도에 따라 건물이 지어진다면, 설사 부유하지 않더라도, 큰 일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으며 또한 그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의 좋은점은, 무지무지 실제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조금만 읽어보시면 금방 아시겠지만, 술술 읽힙니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사례들은 딱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아침마당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게다가 교회에서는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던 부부간의 성에 대한 이야기도 다룹니다.(좀 약하기는 합니다만..^^;;)
또한 저자가 매우 유머러스하게, 직접 강의를 하듯이 글을 썼기 때문에 웃고 공감하며 끄덕이며 읽다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장에 이르게 되지요.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자, 100인분의 재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몫은 1인분입니다. 나머지는 맛있게 끓여서 이웃과 나누십시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이웃과 나누는 99인분이 되겠네요^^


그나저나, 1인분은 제대로 만들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아야 겠습니다. 아무리 요리책이 좋아도 주방장이 형편없으면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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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시 그레이스 - 21세기 용서의 바이블
도널드 크레이빌 외 지음, 김재일 옮김 / 뉴스앤조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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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6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니켈 마인스라는 마을에서 세 딸의 아버지였던 32살의 로버츠라는 사람이 웨스트 니켈 마인스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학교는 아미시 마을의 자녀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였지요. 그리고 오전 11시 5분, 날카로운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로버츠가 6~13세의 여자아이 10명을 일렬로 눕히고 총을 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경찰이 교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5명은 이미 죽었고, 5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끔찍한 총기사건은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총기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미국이지만 이 사건이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문명과 거리를 두고 평화롭게 사는 아미시 마을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이제 미국에서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는 선언과 같은 사고였던 것이지요. 작은 마을은 수많은 언론과 방문객으로 북적거리게 됩니다.

 

 그런데, 곧 더 큰 충격이 있었습니다. 니켈 마인스 아미시 사람들이 범인을 용서한 것입니다!! 그들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몇 시간 뒤에 범인을 용서한다고 선언했으며, 로버츠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로버츠의 장례식에도 찾아갔으며, 그들을 위해 돈을 기부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아미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전세계는 다시 한번 들썩거리게 됩니다. ‘용서’라는 단어가 내내 화제의 중심에 있게 됩니다. 아미시 사람들이 보여준 말과 행동에 대해 경외와 찬사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미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용서를 베풀 수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이 책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미시 사람들은 아나뱁티스트의 후예들입니다. (잠깐만요~ 역사공부하고 가실게요~) 아나뱁티스트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루터나 칼빈등 주류 종교개혁가들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이란 개인의 결단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다시 침례를 행합니다. (그래서 재침례라는 뜻의 아나뱁티스트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개인의 신앙을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요. 이런 태도는 주류 종교개혁자들로부터도 극심한 반대를 받습니다. 결국 아나뱁티스트들은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박해받고 수천명이 순교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한 평화주의를 실천합니다. 폭력을 거부한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려는 태도를 버리고 원수를 사랑한 것이지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습니다.

 

 1569년, 아나뱁티스트라는 이유로 잡힌 빌렘스라는 사람이 탈옥을 합니다. 그러나 곧 발각되어 교도관과 읍장에게 쫓기게 되지요. 빌렘스가 얼어붙은 호수위를 달려서 건넌 뒤, 쫓아오던 교도관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이 때 빌렘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돌아가서 그 교도관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읍장에게 체포되어 화형되고 말지요.

 

 아미시는 그 아나뱁티스트의 분파 중 하나입니다.

 

 아미시는 수백년간 내려오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거리를 둡니다. 세금을 내거나 투표는 할 수 있지만, 징집은 거부합니다. 공직도 피하지요. 또한 그들은 공동체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일단 교회를 중심으로 대가족을 이루어 모여서 생활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책임집니다. 따라서 보험에 가입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사회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공동체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과학기술에도 거리를 둡니다. 자동차보다는 마차를 이용하고, 전기도 최소한만 사용합니다. 전화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과학기술이 공동체를 조금씩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것들을 포기합니다. 공동체의 규율에 복종하기로 서약하고 따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단순하게 따르려고 합니다. 깊이 생각하거나 따지기 보다는 실천하는 데에 더 신경을 씁니다. 심지어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신비이므로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무례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에서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들의 신앙은 교리보다 실천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특히 마태복음을 좋아하며, 그대로 실천하려고 합니다. 산상수훈을 중시하고, 주기도문을 늘 암송합니다. 마태복음의 주된 주제 중 하나가 ‘용서’라는 것을 아시나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 뒤에는 이상하게도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는 구절이 따라옵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는 붙어있지 않습니다) 또한 18장에는 그 유명한 ‘일만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가 나오고 나서 역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로 마무리 되지요. 아미시들은 이런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그리고 실천하지요.

 총기 사건이후,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용서할 수 있나요?’라고 질문하자 그들은 오히려 당황해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면 당연한 것 아니에요?’라면서 말이지요. (솔직히 하나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들은 권위에 복종하고 절제하는 것을 훈련합니다. 용서에 대한 성경말씀을 듣고 암송하며, 위대한 순교자들의 이야기들을 되풀이해 듣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는 먼저 형제자매를 찾아가 화해하고 용서합니다. 그런 모든 과정 속에서 용서가 그들의 삶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용서는 원한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들도 용서가 쉬운 것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좀 위로가 됩니다..)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몇 번을 되풀이해 용서해야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그들의 오랜 전통 속에서 함께 하기에 그들은 용서를 훈련하고 실천합니다. 그리고 그 용서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세상은 경악했습니다.

 

 아미시들의 신앙과 삶에 100% 동의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과 상황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옳으니까요.) 신학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그들은 정규 신학 공부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과학 기술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고루해 보입니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세상에서 마차를 타고 느릿느릿 따라가고 있다니요!!) 세상과 너무 분리 되어 있기 때문에 전도와 선교에 소극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도 마태복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가 정의의 이름으로 보복하려 할 때, 그들은 용서합니다. 우리가 개인의 자아 실현을 강조할 때, 그들은 공동체를 세웁니다. 우리가 국가기관에 가난한 이웃들을 떠맡길 때, 그들은 섬깁니다. 우리가 머리로만 알고 말로만 떠드는 ‘말씀’을 그들은 묵묵히 몸으로 살아냅니다.

 

 아미시들이 사용하는 찬송집에 이런 찬송이 실려 있습니다.

 

이 생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세상의 모욕과 싸움을 무시해야만 하고

십자가를 매일 져야만 한다

이것만이 주님의 보좌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그 길이다

 

더 부끄러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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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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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79년에 쓰여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이 소설은 제 생각에 모든 기독교인이 한번쯤 읽고 고민해야 하는 책입니다. 어떤 신학이론보다도 더 치열하게 하나님에 대해 고민하고 대들고 심지어는 대안까지 제시하는 소설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보다 더 치열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용 자료의 방대함, 주제의식의 무거움에 저자의 필력까지 더해져 명작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의 두 이야기가 맞물려 있는 액자소설입니다. 과거 부분에서는 아하스 페르츠라는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과 대결하고, 현실에서는 민요섭과 조동팔이 현실의 악과 고통의 문제로 하나님께 저항합니다. 특히 과거 부분이 더 치열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는 아하스 페르츠가 더 비중이 높지요. 사실 아하스 페르츠는 현실의 민요섭과 조동팔의 투영인 셈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 땅의 고통이라는 부조화 때문에 고민하던 아하스 페르츠가 그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결국 만난 영적인 존재로부터 듣게 된 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득한 옛날, ()은 원래 선()의 부분과 지혜의 부분이 공존하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천지를 만들었지요. 특히 인간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었기 때문에 선과 지혜, 정의와 자유가 공존하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선이 욕심을 내어 인간에게서 지혜와 자유의 부분을 빼내어 선악과에 가둬놓고 독선으로 지배하지요. 그래서 지혜는 뱀을 통해 인간에게 지혜와 자유를 돌려줍니다. 그에 따라 인간에 대한 지배를 잃게 된 선은 분노하고 저주하지요. 죄라고 불리는 것은 원래 지혜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 본성에 들어 있던 것입니다. 지혜를 잃은 독선이 그것을 죄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인간을 단죄하고 저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인간들에게는 불행의 나날들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지혜는 이제 선을 찾아가서 차라리 인간에게서 자유를 거둬들이고 다시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가서 살게 하라고 양보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부분을 포기하더라도 인간의 고통을 줄여주겠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선은 인간들이 자유를 지닌 채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사람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지혜의 제안에 답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제 지혜는 아하스 페르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다. 그 거짓된 사람의 아들을 찾아가 그가 빵과 기적과 권세를 가지고 왔는지 알아보아라. 만약 그가 그것들을 가지고 왔다면 나의 반쪽이 내 제안을 받아들여서 인간들에게서 자유를 거둬들이고 반쪽의 구원이나마 이루겠다는 것이나, 그것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내 권유를 거부했다는 것이고, 너희에게는 아직 더 많은 고통의 세월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 때는 그 거짓된 사람의 아들을 그가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이 땅은 너희가 책임지거라..”

 

진리를 알게 된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찾아가서 빵과 기적과 권세를 가지고 왔는지 물어봅니다. 그리고, 예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격렬하게 비난합니다. 독선의 말씀과 공허한 천국의 약속으로 인간을 정죄하고 기만하지 말고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명령으로 죄책감과 절망을 더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인간을 내버려두어도 인간들의 선과 지혜로 도덕과 윤리를 터득하게 해 줄 것이며 혼란과 어둠에 묻히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하스 페르츠는 몇 번 더 예수님을 찾아가 같은 논리로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하고, 아하스 페르츠의 논리에 감동을 받은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 눈치채셨겠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사탄입니다. 그리고 그와 예수님의 첫 번째 대화는 광야에서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시험이지요. 그가 만난 위대한 영 또한 사탄의 원조쯤 되는 존재이지요.

저자는 아하스 페르츠의 입을 통해 묵직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선한 하나님과 이 땅의 악의 공존.. 어느 것 하나 쉽게 대답할 수 없지요. 거기에 더해 소설 뒤에 해설을 맡은 이남호교수는 기독교의 교리들은 인간들의 매저키즘적 속성에 기반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가 없다는 주장,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교리 등이 모두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그런 논리들은 이 땅의 고통과 불평등을 합리화 시켜서 부당한 사회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끔 강요한다고 주장합니다. 참 신랄하지요.

 

우리는 이런 물음과 도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들은 당연히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각도로 시도되어 왔고, (아예 神正論(신정론)이라는 별도의 분야가 있을 정도입니다.) 상당부분은 대답을 했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깔끔한 대답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저는 그런 대답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영역이니까요. 기독교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반대자들은 그것 또한 매저키즘적 속성이라고 공박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또 우리는 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의 정신을 두 개로 나눕니다. ‘논리의 정신은 이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역할을 하지요. 하지만 직관은 논리의 이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파스칼은 그것을 섬세의 정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은 섬세의 정신에 해당하지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다 이해되는 분은 아닙니다.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하나님을 지각하게 하고, 믿게 합니다. 이것을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은 먼저 운명을 설득하시고, 마지막에 이해를 설득하신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어떤 영혼의 레이더 같은 것이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고 표현한 작가도 있지요. 결국.. 믿음도 선물이며, 믿어지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저자가, 또한 해설자가 주장하거나 의심하는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또한 현실적으로 약간의 공박을 할 수는 있겠습니다. 먼저,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너무 낙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이 땅을 떠나면 오히려 잘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저는 반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증명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가 악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불만스럽긴 합니다만..

그리고 종교가 결국 사회의 고통을 합리화시켜서 불평등한 구조를 고착시킨다는 지적에도 반은 긍정하지만 반은 부정합니다.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한 것은 솔직히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반성하고 사과해야 할,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하나님을 이용한 무지와 죄악의 결과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불합리한 구조를 바꾼 사례도 많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역사를 모두 무시하는 것은 또 하나의 아집이 되겠지요.

 

이 책에서 제기하는 질문에 대해 아하스 페르츠의 아버지가 책 속에서 시도하고 있는 대답으로 이 긴 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질문자들에게는 불만족스럽겠지만, 심지어는 대답하는 우리들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얘야, 너는 인간의 앎과 슬기를 지나치게 믿는 것 같구나. 하지만 언제나 기억해라. 아무리 큰 앎과 슬기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산술처럼 풀어낼 수는 없다는 것, 그분을 믿는 것이 지혜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지혜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과도한 지식으로 종종 우리의 믿음과 경건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겸허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구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그분의 말씀을 읽고 실천함으로써 그분의 참뜻은 감지되는 것이며, 이윽고 너도 그분의 영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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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 딜레마 - 가룟 유다에 비추어 본 진짜 기독교
김기현 지음 / IVP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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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Superstar' 라는 뮤지컬을 보셨나요? 예수님의 최후의 7일에 대한 내용이고, 뮤지컬의 황제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작품이지요. 40여년 간 1억 5000만명이 보았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르는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이라는 곡이 매우 유명하구요. 저는 20여년 전에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 밤을 다시 한번'을 부른 조하문이었고 가룟유다는 '라구요'의 강산에였습니다. 정말 옛날이군요.. 얼마전에는 윤도현이 가룟유다를 맡아서 열연했습니다. 솔직히 내용이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췄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공연당시, 독실한 보수주의 크리스천들이 반대시위도 하고 그랬어요.

그 뮤지컬에서 가룟유다가 꽤 멋지게 그려집니다. 단순한 배신자가 아니라 이상과 현실에서 갈등하다가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배신하는, 고뇌하는 악역으로 그려지거든요. (우리는 그런 악역에게 끌리지 않습니까?^^)


몇년 전, '유다복음'라는 것이 대대적으로 선전된 적이 있습니다. 발굴자체는 70년대에 되었지만 복원하고 다듬어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방송을 했거든요. 그래서 뭐 숨겨진 복음서가 나타났다, 기독교의 비밀이 밝혀졌다.. 등등 시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금방 잠잠해졌구요.) 유다복음은 '예수가 유월절을 준수하기 사흘 전, 일주일 동안 가룟유다와 대화하며 말한 계시에 대한 비밀기록'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A4 7장 정도 분량의 짧은 글입니다. 저도 읽어봤는데요, 어휴 도대체 뭔소린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줄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나 계시에 대한 얘기로 가득차 있거든요. 생소한 용어들도 많구요.


이 책은 1차적으로는 유다복음을 들고 기독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 학자의 답변입니다. 동시에 가룟유다로 인해 제기되는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하는 기록이기도 하며, 유다복음을 짓고 초대교회를 괴롭혔던 영지주의에 대한 분석이기도 합니다.


사실 가룟유다 딜레마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고민하게 했습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가룟유다가 없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안 달리셨을테고, 그러면 십자가 구원은 없었을 것 아니냐? 그렇다면 가룟유다도 구원의 도구로 사용된 거 아니냐? 그것도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 아니냐? 그럼 가룟유다에게 책임이 있느냐?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하는것 아니냐?..' 이것이 가룟유다 딜레마입니다.

여러분도 한번쯤 고민해보셨던 이야기 아닌가요? 어떻게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정말 유다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가룟유다는 하나님께서 배신하도록 딱 지정해서 예정하셔서 사용하신 것일까요? 자유의지는 없었을까요?


유다복음에는 가룟유다가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했고, 예수님의 지령을 받고 배신을 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가장 무난하지요. (그런데, 너무 무난해서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 밖에도 유다복음을 읽어보면 기존의 복음서와는 너무 다른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환상과 계시 등으로 가득 차 있거든요.

이것은 그 당시 교회를 괴롭히던 영지주의 문서의 특징입니다.

영지주의는 무엇일까요? 굳이 한마디로 쉽게 말하면 초대교회 당시에 있었던 기독교이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그 영지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기독교와 얼마나 다른지 설명합니다.

영지주의는 너무 분파가 다양해서 그들의 주장을 정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이 있지요. 바로 이원론입니다.

그들은 물질/영혼, 몸/혼, 선/악 처럼 모든 것을 분리합니다. 따라서 물질은 악하며 영혼은 선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육체가 되어서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가장 근원적인 영적 존재가 있고,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그 영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신이라고까지 하지요. 물질은 악하니까요. 그래서 구원은 이 육체의 감옥에서 영혼이 탈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물질자체는 선합니다. 다만 죄로 인해 타락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영과 대비해서 육체적이라고 말할 때는 문자 그대로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본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몸을 긍정합니다. 로마서에서도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이원론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를 구분해서 교회 일은 영적인 일이고 직장 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원론이지요. 그것도 멀리 보면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하든 방향이 중요하지요. 우리도 이원론에서 벗어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 다시 가룟유다 딜레마로 돌아가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저도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떻게 설명하려고 해도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안타깝지만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믿어지는 것이 참 이상합니다. 그래서 믿음조차 은혜인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신학적으로는 답할 수 없지만, 실천적으로는 답할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되지 마시고 베드로나 바울이 되십시오.'라구요.

성경은 우리의 지성을 깔끔하게 만족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믿고 따르라고 주어진 책이지요.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미 알고 있는것 만으로도 믿고 따르기에는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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