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979년에 쓰여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이 소설은 제 생각에 모든 기독교인이 한번쯤 읽고 고민해야 하는 책입니다. 어떤 신학이론보다도 더 치열하게 하나님에 대해 고민하고 대들고 심지어는 대안까지 제시하는 소설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보다 더 치열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용 자료의 방대함, 주제의식의 무거움에 저자의 필력까지 더해져 명작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의 두 이야기가 맞물려 있는 액자소설입니다. 과거 부분에서는 아하스 페르츠라는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과 대결하고, 현실에서는 민요섭과 조동팔이 현실의 악과 고통의 문제로 하나님께 저항합니다. 특히 과거 부분이 더 치열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는 아하스 페르츠가 더 비중이 높지요. 사실 아하스 페르츠는 현실의 민요섭과 조동팔의 투영인 셈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 땅의 고통이라는 부조화 때문에 고민하던 아하스 페르츠가 그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결국 만난 영적인 존재로부터 듣게 된 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득한 옛날, ()은 원래 선()의 부분과 지혜의 부분이 공존하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천지를 만들었지요. 특히 인간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었기 때문에 선과 지혜, 정의와 자유가 공존하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선이 욕심을 내어 인간에게서 지혜와 자유의 부분을 빼내어 선악과에 가둬놓고 독선으로 지배하지요. 그래서 지혜는 뱀을 통해 인간에게 지혜와 자유를 돌려줍니다. 그에 따라 인간에 대한 지배를 잃게 된 선은 분노하고 저주하지요. 죄라고 불리는 것은 원래 지혜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 본성에 들어 있던 것입니다. 지혜를 잃은 독선이 그것을 죄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인간을 단죄하고 저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인간들에게는 불행의 나날들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지혜는 이제 선을 찾아가서 차라리 인간에게서 자유를 거둬들이고 다시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가서 살게 하라고 양보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부분을 포기하더라도 인간의 고통을 줄여주겠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선은 인간들이 자유를 지닌 채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사람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지혜의 제안에 답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제 지혜는 아하스 페르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다. 그 거짓된 사람의 아들을 찾아가 그가 빵과 기적과 권세를 가지고 왔는지 알아보아라. 만약 그가 그것들을 가지고 왔다면 나의 반쪽이 내 제안을 받아들여서 인간들에게서 자유를 거둬들이고 반쪽의 구원이나마 이루겠다는 것이나, 그것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내 권유를 거부했다는 것이고, 너희에게는 아직 더 많은 고통의 세월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 때는 그 거짓된 사람의 아들을 그가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이 땅은 너희가 책임지거라..”

 

진리를 알게 된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찾아가서 빵과 기적과 권세를 가지고 왔는지 물어봅니다. 그리고, 예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격렬하게 비난합니다. 독선의 말씀과 공허한 천국의 약속으로 인간을 정죄하고 기만하지 말고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명령으로 죄책감과 절망을 더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인간을 내버려두어도 인간들의 선과 지혜로 도덕과 윤리를 터득하게 해 줄 것이며 혼란과 어둠에 묻히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하스 페르츠는 몇 번 더 예수님을 찾아가 같은 논리로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하고, 아하스 페르츠의 논리에 감동을 받은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 눈치채셨겠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사탄입니다. 그리고 그와 예수님의 첫 번째 대화는 광야에서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시험이지요. 그가 만난 위대한 영 또한 사탄의 원조쯤 되는 존재이지요.

저자는 아하스 페르츠의 입을 통해 묵직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선한 하나님과 이 땅의 악의 공존.. 어느 것 하나 쉽게 대답할 수 없지요. 거기에 더해 소설 뒤에 해설을 맡은 이남호교수는 기독교의 교리들은 인간들의 매저키즘적 속성에 기반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가 없다는 주장,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교리 등이 모두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그런 논리들은 이 땅의 고통과 불평등을 합리화 시켜서 부당한 사회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끔 강요한다고 주장합니다. 참 신랄하지요.

 

우리는 이런 물음과 도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들은 당연히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각도로 시도되어 왔고, (아예 神正論(신정론)이라는 별도의 분야가 있을 정도입니다.) 상당부분은 대답을 했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깔끔한 대답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저는 그런 대답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영역이니까요. 기독교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반대자들은 그것 또한 매저키즘적 속성이라고 공박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또 우리는 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의 정신을 두 개로 나눕니다. ‘논리의 정신은 이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역할을 하지요. 하지만 직관은 논리의 이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파스칼은 그것을 섬세의 정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은 섬세의 정신에 해당하지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다 이해되는 분은 아닙니다.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하나님을 지각하게 하고, 믿게 합니다. 이것을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은 먼저 운명을 설득하시고, 마지막에 이해를 설득하신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어떤 영혼의 레이더 같은 것이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고 표현한 작가도 있지요. 결국.. 믿음도 선물이며, 믿어지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저자가, 또한 해설자가 주장하거나 의심하는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또한 현실적으로 약간의 공박을 할 수는 있겠습니다. 먼저,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너무 낙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이 땅을 떠나면 오히려 잘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저는 반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증명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가 악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불만스럽긴 합니다만..

그리고 종교가 결국 사회의 고통을 합리화시켜서 불평등한 구조를 고착시킨다는 지적에도 반은 긍정하지만 반은 부정합니다.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한 것은 솔직히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반성하고 사과해야 할,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하나님을 이용한 무지와 죄악의 결과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불합리한 구조를 바꾼 사례도 많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역사를 모두 무시하는 것은 또 하나의 아집이 되겠지요.

 

이 책에서 제기하는 질문에 대해 아하스 페르츠의 아버지가 책 속에서 시도하고 있는 대답으로 이 긴 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질문자들에게는 불만족스럽겠지만, 심지어는 대답하는 우리들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얘야, 너는 인간의 앎과 슬기를 지나치게 믿는 것 같구나. 하지만 언제나 기억해라. 아무리 큰 앎과 슬기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산술처럼 풀어낼 수는 없다는 것, 그분을 믿는 것이 지혜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지혜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과도한 지식으로 종종 우리의 믿음과 경건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겸허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구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그분의 말씀을 읽고 실천함으로써 그분의 참뜻은 감지되는 것이며, 이윽고 너도 그분의 영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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