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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옳은 말을 어떻게 저렇게 싸가지 없게 할까?'
2004년, 김영춘 의원이 유시민을 가리켜 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정말 폭탄급의 위력을 가지고 유시민을 날려 버렸지요. 유시민 스스로도 "이 '싸가지'라는 말이 두고두고 나를 옭아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예언은 적중되었구요.
그 뒤, 유시민은 말도 좀 자제하고 심지어는 좀 부드럽게 보이려고 안경까지 쓰고 다녔지만 별 효과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싸가지라는 단어가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잊혀지지가 않더라구요. 나중에 김영춘의원이 사과하기는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요. 결국 정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뭐, 꼭 그 말 때문에 떠나게 된 것은 아니지만요.
제가 유시민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입니다. 당시 선배들이 꼭 읽으라면서 건네준 책 중 하나가 바로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지요.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꺼내어 다른 시각(운동권 시각이지요)으로 보도록 한 책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은근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배운 것들 모두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다른 책에서 유시민이 운동권이 된 계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가, 자신이 미팅에 나가서 쓰는 돈을 벌기 위해 한달간 일을 해야 하는 같은 나이의 여공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후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존경했었습니다. 진보는 따뜻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무튼 그 유시민이 정계를 떠나고 스스로 지식소매상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고 낸 책이 '국가란 무엇인가'입니다. 제목이나 구성이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아류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본질, 진보의 방향에 대해서 성찰하고 많은 이론을 정리해서 버무린 솜씨는 마이클 샌델에 뒤지지 않습니다. 유시민의 내공에 감탄하게 되지요.
사실 이 책은 201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 책이 작년에 주목받은 이유는 세월호사건 때문이었지요. 아이들이 깊은 바닷물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마음 속에 '도대체 국가가 뭐지?'라는 질문이 떠올랐거든요. 그래서 이 책이 다시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가론을 정리하고, 국가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게 되었지요. 그러고보니 슬픔 가운데서 읽게 된 책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이런 질문을 이렇게 치열하게 다시 해야한다는 상황이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저자는 7개의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해 답을 하면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제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힙니다. 중간중간 실제 한국정치의 예를 들어서 좀더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큰 장점이지요. 그가 제기하는 질문과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무질서와 범죄, 외부 침략에서 국민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국가주의 국가론과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자유주의 국가론,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는 마르크스의 국가론, 그리고 선을 실현해야 한다는 목적론적 국가론을 비교 검토합니다. 유시민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국가주의, 새정치민주당은 자유주의, 소수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라고 봅니다. (지금 활동하는 진보정당은 모두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주의로 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동의합니다.) 이 네가지 국가론(앗 그러구보니 이것도 4가지이네요 ㅋㅋ)은 이후 책의 내용의 틀을 구성하게 됩니다.
2.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국가주의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을, 자유주의자는 잘 소통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박정희와 노무현이 딱 대비되는 느낌이네요.
3.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당연히 그렇다고 하면 피히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고 국가주의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톨스토이를 따르면 애국심은 사악한 감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애국심이 결국 국가간의 전쟁을 일으키거든요. (안중근 의사가 우리에게는 애국적 영웅이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 아닙니까?) 이 두 가지 극단적 의견 사이에 르낭의 정의가 위치합니다.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륭한 삶을 영위하려는 의지.' 이런 애국심이면 괜찮지요?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의를 좋아합니다.
4. 혁명주의와 개량주의 어느것이 옳은 길인가?
이제는 낡은 질문이지요. 인류가 경험한 사회혁명 - 프랑스 시민혁명,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등 - 은 국가를 근본적으로 고치기는 했지만 그 과정은 엄청난 폭력과 학살을 동반했고, 결과는 또 다른 억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이에크 같은 사람은 아예 사회운동 자체에 대해 거부했지요. 하지만 칼 포퍼가 주장한 '점진적 개혁'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 개혁마저도 억압한다면 오히려 사회혁명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요. 우리는 점진적 개혁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5. 진보정치란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는 것인가?
진보와 보수는 사실 명확한 구분이 어려운 개념입니다. 꼭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 이렇게 볼 수도 없구요.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변화를 원하는 쪽이 진보, 그렇지 않은 쪽을 보수로 보면 되지요. (이렇게 보면 일당독재 공산당은 진보가 아니라 꼴통보수가 되는 것입니다.) 유시민은 진보에 대한 여러 정의 중 이남곡의 정의를 제안합니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하는 과정' 오.. 멋진 정의인데요? 그 연장에서 진보정치의 목적은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진보정치의 개념이 넓어지고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 달라집니다. 복지국가가 가장 진보적이 되는 셈입니다!
6. 진보주의자가 국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하려는 선은 무엇인가?
정의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하는 것이지요. 매우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유시민은 자기를 진보자유주의자라고 밝힙니다. 한가지 가치를 절대화하지 않으며 전체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가치를 똑같이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역시 매우 이상적인 이야기이지요?
7. 정치인에게는 어떤 도덕법이 요구되는가?
책임윤리입니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칸트의 도덕법칙이 아니라 결과를 책임지는 윤리라는 것입니다. 이를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로 구분했습니다. 신념윤리는 동기를 중요시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고 결과는 신에게 맡깁니다.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심할 경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공산주의라는 이상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같은 자도 일종의 신념윤리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책임윤리가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하되 그 결과에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따라서 때로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시민은 여기에서 신념윤리가는 지식인으로 남아 있는게 좋으며,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책임윤리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자신을 변절자라고 비난하는 좌파에 대한 항의인것 같습니다.
휴.. 많은 것을 묻고 대답하면서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내용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지요. 중간중간에 좀 어려운 개념들이 소개되기도 합니다. 뭐, 그래도 그런 부분은 살짝 건너뛰면서 읽어도 됩니다.^^
그래서 유시민이 꿈꾸는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책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이다.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이다.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이다. 나는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다."
저도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