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 - 팀 보울러 저 / 놀(다산책방) 출판

모두, 그렇게 성장한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간만에 쓰는 책 리뷰. 여행을 다녀와서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좋은 일들은 빨리 습관화해야 편해지는데 가끔 이런 일탈 아닌 일탈을 겪고나면 피로를 빙자하고 너무 나태해지는 것 같아 큰일이다. 뭐, 푸념은 이쯤하고 다시 리뷰를 써볼까.

 

 

나는 아주 유명한 책이 아니라면 책의 제목이나 표지를 보고 대강의 이미지를 추측하거나 생각한다. 여기서 '대강의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해내는 이미지들이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추측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 떠오르는 어떤 것이나 '끌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라는 책도 처음 접하면서 어떤 상황들이 문득 떠올랐다.

 

첫 번째는 누군가에게 쫒기는 악몽을 꾸다가 다리에 쥐가나서 일어나는 상황. 보통 이런 날 아침이면 어머니가 아침 상을 차려주시며 "너 키 크려나보다" 라는 말씀을 해주시곤 했는데... 두 번째로 떠오르는 것들은 작가의 가장 유명한 전작인 [리버보이]와 최근 성공했던 성장소설 [완득이]. 이 두 가지 이미지와 상황들을 두고 보면 공통점이 있다. 청소년기의 성장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점.

 

거의 정답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책은 팀 보울러의 분명한 색깔에서 벗어나지 않는 '성장소설'에 속한다. 하지만 이 책을 '성장'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마무리하고 넘어가기에는 어쩌면 절반의 의미만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성장'이라는 단어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여러 의미로 병용하며 살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성장'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세포분열 등으로) 자라서 커지는 것이다. 즉, 육체(양)적 성장의 측면에 집중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동식물의 경우는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인간만큼은 완전한 성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육체(양)적 성장뿐만이 아니라 지적/정신적 성숙도 함께 이루어져야만 한다. 단순히 '성장'이라는 단어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절반의 의미밖에 담지 못한다고 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던 것을 새롭게 알게되어 익힐 때, 즉 새로운 지식이 생길 때 '성장'하지만, 때로는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을 어느 순간 새롭지 인지하고 어떠한 깨달음을 얻을 때 더욱 성장하는 것 같다. 아니, 정정하겠다. 그때야말로 성장이 완성되는 것 같다. 조금 더 쉽게 구분해보자면 전자의 성장이 '생장'이라는 육체적이고 양적인 확대를 의미한다면 후자의 '깨달음'과 '극복'을 통한 성장의 경우에는 내면의 '성숙'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서 진정한 성장이란 '생장'과 '성숙'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라는 소설은 성장의 의미 중 소년의 '성숙'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가장 성숙하게 될까? 그리고 우리를 가장 성숙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성숙의 시점에 관해서는 비교적 말하기가 쉬울 것 같다. 무지의 영역이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니까. 처음에는 그게 성숙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삶이 거듭될수록 배움을 통해 알게 되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의 시점과, 그것이 삶의 일부분으로 녹아드는 깨달음의 시점이 반드시 동일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점점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장의 시점을 어느 때로 생각해야할까? 배움을 통한 지식의 양적 증대? 아니면 깨달음의 순간? 지금의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성숙의 순간보다 더 어려운 질문은, 과연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결국 지식을 습득하고 깨닫게 되는 주체는 본인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본인을 성숙하게 하는 대상은 달라질 수 있다. 지식을 전한다는 측면에서 수많은 책들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을 받을테니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본인의 특정 사회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성숙의 매체는 바로 부모님이 아닐까 싶다.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서일까 '부모'라는 단어는 참 무겁다. 그만큼 우리는 부모와 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 모두는 부모로부터 태어났으며, 알게 모르게 역할교육을 받았으며, 보육을 받았고,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우리가 성숙하는 결정적인 순간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벗어날 때'가 된다. 그들의 품 안에서 너무나도 닮은 존재로 자라 독립성을 가지지 못했던 종속적 자아가, 물리적/경제적/내면적 독립을 함으로 해서 진정한 자아를 가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아들이기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가장 훌륭한 인물도, 가장 넘어서야할 큰 벽도 아버지다.

 

부모로부터의 독립도 몇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독립의 자발성 여부를 두고도 구분할 수 있고, 혹은 위에서 나눈 것처럼 어떤 계기를 통해서 물리적/경제적/내면적인 독립으로도 나눌 수 있다. 어느 것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독립의 성격이다. 독립은 곧 부모(혹은 부모의 역할)의 '부재'를 의미한다. 부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충분한 성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넘어서는 일종의 성장기. 이쯤되면 떠오르는 내용들이 있지 않은가? 알을 깨고 진정한 나의 세계로 거듭나는 [데미안].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보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더 가까울 것 같다. 팀보울러의 [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를 읽으면서 나는 시종일관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친구의 이름이 '스핑크'인 것을 보고는 웃음까지 나왔다. 이름의 뉘앙스 뿐만 아니라 난관을 제공하지만 그 시련을 극복함으로해서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애증의 인물이 된다는 점이, 알듯 모를듯한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불안정한 상황들과 가정이 만들어진 책임을 시종일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에게 부여하고 있는 경향이 강한데, (물론 어머니에게도 아주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그것 역시 주인공이 넘어서야할 대상으로 아버지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면에서 이 소설은 오이디푸스의 여정과 확실히 닮았다. 부모와 자식, 가정과 그 속에서의 성장의 문제는 인류의 존속과 동시에 계속해서 반복되어 제기되었던, 그리고 해결되었던 문제인만큼 지금의 시점에서도 누군가를 위한 훌륭한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아쉬웠던 면도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 상의 이야기겠지만, 나는 소설의 말미까지 의심하게 했던 봉투 속의 의문의 덩어리가 차라리 실체가 없는 일종의 상징적인 무언가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독자에 따라서 '자아'가 될 수도 있었을테고, '행복한 가정'이 될수도 있을 것이며,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많아졌을텐데. 다만, 그 속의 물건이 위폐라는 사실에서 1)(전 시대의 행동들을)단순히 반복하고 따라만 해서는 진정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 2)그리고 물질만능주의의 현실을 꼬집었다는 등의 의미를 억지로 찾아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끝으로 나의 경우에는 이 이야기를 어떤 '성장기'로 해석을 했지만, 소설의 내용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않아도 '스릴감'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즐기기에도 좋은 내용이므로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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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저 / 다산책방

KBS 교양프로그램 [TV 책을 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다시 읽기






잔잔한 호수에 돌맹이 하나가 던져지듯, 때론 시간이 지나면서 파장이 더 커지는 혹은 더 명확해지는 것들이 있다. 내겐 올 초부터 얼마 전까지 몇 번을 되돌려 읽게 했던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그러했다. 공교롭게도 책의 내용 역시 과거의 의도치 않은 행동들이 축척된 후 감당할 수 없는 결과로 다가왔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파장이 커지는 그런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반전'이 큰 매력인 책이다. 그러다보니 '두 번 되돌려 읽는 책'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그만큼 반전을 알게 된 후 놓친 부분을 확인하려는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에 종종 찾아보는 KBS 교양프로그램, 'TV 책을 보다'에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방영한다길래 재방송을 챙겨보았다. 마치 다시 한 번 책을 곱씹는다는 심정으로.

 

[TV 책을 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편을 통해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기존에 책을 읽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었던 것들이 맞는지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니까 '시간과 기억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예상치 못한 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하는가'라고 책의 주제를 파악했던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워낙 소설이 교묘하게 쓰여졌기도 했거니와 이런저런 장치들로 나 혼자서는 확신을 못하고 있었나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연애 전문 상담가 김지윤 소장이 베로니카와 토니, 에이드리언과 사라 혹은 베로니카 등의 연인으로서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의 주제는 프로그램의 도입부에 제시된 '기억과 역사의 허구성', 그리고 후반부에 나오는 '책임의 문제'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내가 판단하기에 나는 이 소설이 '역사의 허구성을 끌어와서 개인의 기억과 스토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은 '개인의 기억을 통해 역사의 허구성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비슷한 말 같기도 하지만 엄연히 방향이 다르다.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인가라는 하나의 판단이 더 개입된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전문가들의 의견이 옳았던 것 같다. 이것을 인정하고 다시 소설을 바라보니 보다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종종 예전 일들을 떠올리며 실소를 짓곤 한다. 떠올리는 기억들은 주로 어릴 적 어처구니 없었던 실수나 멍청한 행동들. 그런데 그 당시의 내가 그것을 실수라고 자각하진 못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니 그 때 나는 너무 어렸고, 멍청했으며, 실수투성이었고, 어리숙했다는 것이다. 예전엔 이해되지 않던 것이 지금에서야 이해될 때, 부정할 수 없는 흔적들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실소를 머금는 것 밖에 없었다. 이처럼 소설은 과거의 일들이 쌓여 바꿀 수 없는 어떤 흐름을 만들어 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뒤늦게 이해가 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 때 느끼는 공포와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b라는 극단적인 결과물로서 말이다. (b의 존재는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더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책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별도의 서평을 통해 하도록 하고, 이 포스팅에서는 내게 보다 확신을 주었던 부분이나 새롭게 알게 된 것들, 그리고 흥미로운 부분을 말해볼까 한다.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라면 역시, '축척이 있고, 책임이 있고, 거대한 혼란이 있다' 라는 문장. 그 부분을 통해 '의도가 없더라도 혼란에 의해 연관되어 진다면(그렇게 인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응당 책임을 져야할 부분이다'까지가 내 기존의 생각. 그런데 프로그램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비록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의도한 행위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의 막막함. 어떤 식으로 책임을 져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겨두고 있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이 외에 인물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토니는 왜 기억을 왜곡했던가?(나는 정말 토니의 의도적으로 기억을 왜곡했다고는 조금도 생각치 않았었다) 라는 물음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은 천재성이 빛나는 청년으로 극중 세계와 극중 인물 모두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럼으로 인해 그는 더욱 외로워졌다는 설명에는 많이 공감했다. 베로니카를 설명할 때는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표현하더라도 약간의 힌트만을 제공하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비극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 같기도 한 인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패널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신비감이 있는 매력적이 여자라는 것.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비공감이다. 나는 10년째 연애를 하고 있지만,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이 처자가 정말 단순하고 신비감없는 직설적 표현을 하는 처자이지만 이게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꼭 신비감있는 화법을 구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이라는 존재가 그리 쉽게 신비감이 사라지는 존재도 아닌 것 같다. 10년동안 알아도 여전히 모르겠는 것이 여자더라. 여성의 입장에서는 토니가 눈치없는 답답한 남자처럼 느껴질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베로니카 역시 답답한 여자인 것이다.

 

아, 그리고 책의 주제와도 같은 문장을 파크리트 라그랑주라는 인물의 말에서 인용하는데, 알고보니 이 라그랑주의 인물이 작가의 이름을 불어화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도 참 재미있었다. 결국 자기 말을 직접적으로 한 것인데, 이런 능글능글함을 노 작가의 연륜이라고 해야할 지 특유의 재치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끝으로 줄리언 반스의 인터뷰는 뭔가 멋져보이더라. 그의 서재와 타자기가 멋져보였다는 패널의 말에도 동의하지만, 그의 눈망울에서 뭔가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서글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면 과장일래나? 그렇지만 무던히, 끊임없이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농담처럼 건내는 그의 모습에서 그런 흐름 자체를 본인이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이 내겐 분명 보였다. 그 모습이 참 멋졌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심리스릴러'라는 장르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만큼 기억에 의존한 사건의 모습들을 퍼즐 맞추듯 재배열하는 과정이 뒤따라야만 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TV 책을 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편은 책의 내용을 재편성하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다만, 어디까지나 다시 '재'배열하기에 좋다는 말이다. 반전이 중요한 포인트인만큼 만약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면 프로그램 역시 독서 후로 미뤄두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책은 정말이지 강력 추천할만큼 재미지다. 그리고 재미 이후에 무거운 생각덩어리를 한아름 선물 받게 될 것이다.





001 … 시간과 기억, 그리고 책임의 관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진짜 리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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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미션에 따라 프로그램을 청취한 후 솔직한 후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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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저 / 다산책방

시간과 기억, 그리고 책임의 관계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도 괜히 어렵게 생각하는 약간 피곤한 유형의 사람이다. 그건 아마도 대부분의 어떤 상황과 결과물은 독립된 상황이 아닌 여러 작은 이유들의 누적된 결과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일에서도 현재의 순간이나 결과치보다도 진척되어 온 경과나 진행 방향을 중요시하는 편인 것 같고.

 

천성이 이렇게 생겨먹어서일까? 지금 당장의 일이나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유독 과거에 있었던 여러 상황들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게 된다. 아마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도 옛 이야기들을 많이 하니까 작은 것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쫌생이 쯤으로 느낄 수도 있겠다 싶다. 뭐, 정말로 그런 속마음에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억이 좋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력이 특별히 좋은 편도 사실 아니다. 칠칠 맞게도 문을 잠궜는지 기억을 못해서 외출하다가 도로 집으로 올라가서 확인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니까. 다만 특이하게 남는 대사나, 이미지, 순간의 느낌 같은 것은 약간의 사진이나 짧은 동영상의 느낌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렇게 각인된 장면은 그나마 오랜 시간 기억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족 모임에서 서너살 때 기억의 에피소드나 유년 시절의 이야기들을 하면 가족들도 깜짝깜짝 놀라곤 하니까. 문제라면, 그런 오랜 기억들이 대부분 별로 쓸모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 정도?



그런데 과연 그렇게 기억된 장면들은 과연 정확한가? 만약 누군가 이런 질문을 내게 건낸다면... 잘 모르겠다. 아마도 정확하다는 확언은 쉽사리 건내지 못할 듯 하다. 우선은 1) 우리 삶은 지나치게 규모가 크고 복잡해서, 사건 하나가 일어나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지 않는 이상 발생하는 일의 이면은 볼 수가 없을 것이므로, 기억하는 일이나 장면 역시 그러한 본질을 반영하지 못할 수밖에 없게 된다. 두번 째는 2) [EBS 다큐프라임 : 기억력의 비밀] 등의 여러 과학적 연구로도 밝혀졌듯, 기억은 하나의 사진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추가되는 정보로 인해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때로는 왜곡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에 따른 기억의 변형을 무시할 수 없다. 


이쯤에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기억'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일들은 현재의 나의 의식을 구성하며 자연스럽게 현재의 판단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 것은 또 다시 미래에 발생할 어떤 불확실한 사건의 새로운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의도와 관계없이 왜곡된 기억들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의 책임을 가져야할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바로 이러한 시간과 기억, 그리고 책임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저자인 줄리언 반스를 처음 접한 것은, 작년 이동진씨의 빨간책방이라는 도서리뷰 팟캐스트를 통해서 였다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는 첫 소개를 시작으로 약 두 시간의 시간, 그것도 2회 분량으로 길게 다루어지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특히, 작가인 줄리언 반스가 항상 책을 쓰기 전 넘쳐나는 정보와 상상력들 중에서 과연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흥미가 생겼었다. 빅데이터 시대, 파편화되는 인간 등 조금만 둘러보면 쉽게 보이는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라니. 그것도 소설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말한다니. 참 매력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데, 줄리언 반스가 가장 비슷한 국내작가로 김경욱씨와 김연수씨가 꼽힌다는 말에 반드시 이 책은 읽어야겠구나 결심했었더랬다. 

 

그렇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었다. 외국소설의 번역본은 조금 읽기가 어색한 감이 있어서 그닥 좋아하지않다보니 스토리를 놓치지 않는 것에 집중해서 글을 읽었던 것 같다. 느낌이라면, 평범하고 찌질한 토니 웹스터의 모습들을 보면서 왜 이렇게 인생을 피곤하게 살까를 생각했던 것 정도? 그러다가 뒷부분의 충격적 반전을 본 뒤 다시 내용들을 곱씹어 보게 되었고이 제목이 가진 위력을 비로소 실감했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짧은 책이지만 두 권이 쓰여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라 왜 자부했는지 알 수 있겠더라.

 

사실 팟캐스트에서는 이 책 제목이 상업적 의도에서 만들어진 그닥 적절하지 않은 제목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용 상의 반전과 더불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책임'의 영역에 대한 물음까지 포함하는 아주 훌륭한 제목이라 생각한다그래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는 이가 있다면 제목의 의미에 집중해서 찬찬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사실 줄거리 내용만으로 보면 답답할 정도로 항상 토니의 예상이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토니 주변의 가장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베로니카나 다른 인물들에 의해서 가장 많이 반복되고 있는 대사가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구나’ 라는 것부터, 주인공인 토니 웹스터의 예상이 얼마나 틀려왔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예상들이 항상 틀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소설의 제목에서는 마치 결과를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을까?

 

소설 속에서 토니는 마치 나처럼 상황 자체를 무척이나 복잡하게 보는 스타일의 찌질이다. 현실과 기억에 대한 수많은 왜곡 가능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힌트들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상황은 계속해서 토니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며, 마침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의 발생에 대해서도 결국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체념하고 합리화 해버리는 단계에 이른다.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체념, 합리화는 '내면적 수용'의 다른 말이니까.

 

작가는 아마도 우리의 인생은 불확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시간과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독자에게도 주어지는 힌트들도 수없이 많다이를테면 처음 1부에서 보여지는 토니와 에이드리언의 고교시절 모습, 그리고 그 속에서의 역사에 대한 담론을 들 수 있겠다.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각 증거물은 사건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기에는 불충분하며해석자에 의해 의미가 달라질 수 있고남아있는 자의 자의적 합리화도 가능하며심지어 역사를 겪은 당사자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본인 조차 그것의 의도를 제외한 파급되는 영향까지는 고려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기억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분명한 복선이다.

 

글이 후반부에 접어들고 충격적 결말에 가까워 질수록, 회고 형식의 이 소설은 보다 직접적으로 작가의 생각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앞 부분에서 분명하다고 말했었던 것들을 이제와서 사실은 불확실하다며 번복하는 경우도 있다. 이 쯤되다 보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마치 소설 속 화자가 노망이라도 걸렸나 한번 쯤 의심해볼만도 하다. 어쨌든 그런 흐름을 통해 작가는 자연스럽게 사건의 발생과 해석의 불확실성, 기억의 불확실성을 확실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소한 언급들이 누적되어 뇌리에 남아있다가 후반부의 충격적 결말을 접하게 되면, 독자들의 머릿 속은 혼란으로 폭발할 것이다. 화자가 겪었던 그 혼란, 그러니까 전반부에 언급되었던 그 많은 이야기들이 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혼란에 독자들은 허우적 된다어디까지가 정확한 상황이고 왜곡된 상황인지 곱씹을 수밖에 없다결국 기억은 정확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하나의 믿음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여기에서 머문다면이 책의 제목은 지금의 제목이 아닌 예감은 결코 맞지 않는다가 더 적합했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작가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불확실성에서 파생되는 결과의 책임범위에 대한 문제까지 독자에게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인생은 축적의 문제고책임이 있다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거대한 혼란이”. ‘요컨대 b, a1, a2, s, v라는 정수가 포함된 축적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의 문장들을 통해 우리는 과연 불확실한 상황들로 인해 인지하지 못한하지만 우리의 영향력이 얽혀있는 문제와 결과에 대해서 얼마만큼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고민할 것을 요구 받는다.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도 이 책임의 영역에 대한 결론은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하지만 책의 제목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라고 하더라도 발생하는 사건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뒤늦게 나마 인지하게 된다면, 궁극적으로는 그 인과관계에 대해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결국 불확실한 인생이라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살아가야만 하고그러므로 그 삶이 나의 것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해야만 할테니까. 

 

소설 속에서 토니는 기억조차 불확실한 자신의 행동에서 시작된 결과인 상징물 b에 대해서,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 채 당혹감과 미안함 속에서 단지 두 배의 팁을 내는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그것이 나름의 책임을 덜어내는 행동이 될까라는 스스로의 물음과 함께물론 그 행동은 선택이 아닌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다고 보여지지만.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수수께끼 투성이다불확실함에 대해 해석을 이끌어내는 수수께끼기억과 시간에 대한 수수께끼.그것에서 파생된 결과의 책임범위에 대한 도덕적 수수께끼그리고 개인적으로 여성특유의 아리송한 대화체까지도 수수께끼로 다가올 수 있다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공포를 느낀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러한 불확실성 가득한 삶은 하나의 공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면 갈수록 사는 것이 녹녹치않고 웬지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래도 어쩔 수 없다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두렵더라도, 알지 못하더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오히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기 때문에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을 듯하다그리고 그렇기에 지금 순간순간에 더 진심을 다해 살아야하지 않을까.

 

아, 그리고 영어 책도 괜찮으신 분들은 원본 그대로를 읽어보시길 권한다.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읽기 편하고, 단어 선택도 운율을 고려한 경우가 많아서 한국판보다 더 빠르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그리고 가끔,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반면에 개인의 삶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 (중략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상처를 인정할 것인가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중략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젊었을 때는 노년에 겪을지 모를 고통과 황폐를 미리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그러나 이는 결국 앞을 내다보는 행위일 뿐이다앞을 내다보고그러고 나서 그 미래로부터 과거를 돌아보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건 불가능하다.시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감정을 익히는 것예를 들면우리의 삶을 지켜봐 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줄 것도 줄어들고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꺠닫게 되는 것. (중략)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정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살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사람들이 그 여자는 예쁘게 생겼다고 할 땐 보통 그 여자는 소싯적에 예뻤다는 뜻일 경우가 많다그러나 내가 마거릿에 대해 말할 땐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마거릿은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한다그렇다는 걸 안다실제로도 그녀는 변했다그러나 나는 그 변화의 폭을 다른 사람만큼 느끼지 못한다마거릿은 사라져버린 것만 보고나는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만 본다고. (중략) 우리가 지금도 가장 중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눈이다안 그런가우리가 처음 만나사랑을 나누고결혼을 하고신혼여행을 가고공동담보를 잡히고쇼핑을 하고요리를 하고휴일을 함께 보내고서로를 사랑하며 함께 아이를 낳았을 때의 그 사람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그 눈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학문의 의미가 아닌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윤색하고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 없이 고착되고 만다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그리고 –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 우리의 비극까지도. 

 

 노화로 인해 하나둘씩 기억을 잃기 시작할 때반응하는 방식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중략그러나 그것 말고도 배우는 게 한 가지 더 있다바로 뇌는 고정 배역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만사는 감소의 문제요뺄셈과 나눗셈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뇌가기억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속 편하게 점진적인 쇠락에 기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꿈 깨시지인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니까그래서 뇌는 이따금씩 파편적인 기억을 던질테고심지어는 기억의 묵은 폐쇄회로를 터주기까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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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 않았던 과거의 행동이 감당할 수 없는 결과로 다가왔을 때,

그것에 무기력 할 수밖에 없다는 건 어쩌면 공포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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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 오기사가 다녀온 나르시시즘의 도시들
오영욱 글.그림 / 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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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휴가를 가장한 노동을 하러 고향 집에 방문했었다. 여행준비를 마치신 부모님께서 해외로 떠나시고 홀로 집을 지키는 신세가 되었을 무렵. 할 일마저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어버리자 마침내 외로움과 심심함이 3 대 7의 비율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무료함을 달래려 서재에 들어가서 책 구경을 했다. 아주아주 예전에 읽어서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 책들과 사 놓고는 읽지 않았던 책들이 서재 벽면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왠지 방치된 책들에 애잔한 마음이 들어 그 중에서 가벼워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오기사, 오영욱씨의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였다.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다가 물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된 나르키소스(Narcissos)라는 미소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프로이트(Freud)가 이 말을 정신분석학에서 자아의 중요성이 너무 과장되어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에 대해 자기 자신을 리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인격적 장애의 일종으로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르시시즘 [Narcissism] 

오영욱씨의 책 들이 대부분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은 비교적 컨셉이 분명한 편이다. 그 컨셉은 [오기사가 다녀온 나르시시즘의 도시들]이라는 책의 부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오영욱씨가 다녀온 곳은 모두 미국의 '라스베가스', 인도의 '찬디가르', 그리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책에서 오영욱씨는 이 도시들과 그것에 투영된 인간의 모습/생각들을 본인의 전문분야인 건축을 매개로 해서 바라보고 있다. 

 

그럼 왜 하필 이 도시들이었을까? 이 세 도시는 공통점이 있으니, 모두 비교적 가까운 시간 내에 계획에 의해 새롭게 건설된 신도시들(라스베가스는 자본에 의해, 찬디가르는 르 꼬르뷔지에의 설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름처럼 표트르 대제에 의해)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마치 자기애의 과잉을 보여주는 듯한 분위기를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어색하면서도 인위적인, 억지스럽기도 한 면도 가지고 있다부제에 적혀있는 '나르시시즘의 도시'라는 의미는, 세 도시의 건축에 담긴 인간의 의도를 일종의 '과시'로 보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유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특히나 그것들이 인위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도시 속 창작물인 건축물 하나하나마다 (현재와 비교적 가까운) 현대인들의 욕망이 담겨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쯤되면 이 이야기는 여행지의 건축물을 탐구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건축물을 잘 아는 사람의 시선에는, 과거 건설자들의 모습이나 의도도 더 잘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런지. 

 

하지만 더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이미지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도시들 앞에 따라붙는 '욕망의 도시', '일탈의 도시', '위안의 도시'라는 수식어처럼 각각의 도시들은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는, 단점이 분명한 도시라는 것을 저자는 계속해서 언급한다. 어쩌면 인간의 욕심/바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그럼에도 계획과는 다른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부족함이 존재하는 도시들을 바라보면서, 결국 인간의 바람과 욕망은 완전히 채워지기 힘들다는 것을 작가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들에 보내는 작가의 연민과 애정은 확고하다. 나는 이 역시 한편으로는 허허벌판 위에 터전을 일구어 낸 인간의 열망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찬디가르 편에서 르 꼬르뷔지에의 글을 인용한 것과 마지막 에필로그 부분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실 상 이 책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내용으로 마치 저자가 도시로 떠났던 이유를 말해주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위대한 시대가 막을 열었다새로운 정신이 존재한다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밀려가는 홍수처럼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산업은 새로운 정신에 의한 이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적응하기 위한 도구들을 제공한다불가피하게 경제적 법칙은 우리의 행동과 생각들을 지배한다주택의 문제는 그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오늘 날 사회의 균형은 바로 주택에 달려있다지금과 같은 변혁의 시대에 있어서 건축은 가치관을 수정하고 주택의 구성요소들을 변경해야 하는 그 첫 번째 책임을 진다대량생산은 분석과 실험에 기반을 둔다산업의 시각으로 대량생산에 입각하여 주택의 부재들에 대한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대량생산에 대해 정신적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가령대량생산형 주택을 짓는 정신대량생산형 주택 속에서 생활하는 정신대량생산형 주택을 인식하는 정신만약 우리가 주택에 관계된 모든 낡은 개념들을 버리고비판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으로 다시 바라본다면우리는 대량생산주택인 사는 기계에 도달할 것이다이 사는 기계는 생활 속의 연장도구들이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다예술가의 감성이 준엄하고 순수한 기능적 요소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을 때 또한 아름답다. - 르 꼬르뷔지에 

나는 이 글을 보고 저자는 분명 위의 세 도시를 [기계적 합리성에 충실한, 그래서 모든 것들을 산업과 연관된 미래지향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도록 만들어진 도시들]로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르 꼬르뷔지에는 대량생산이 하나의 시대의 흐름이고 시대의 정신이라고 외쳤지만, 시대정신에 무작정 편입된다는 것은 때론 자신의 특색과 존재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찬디가르에 붙은 부제처럼 일탈을 위해 떠났다는 그는, 오히려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만든 그 당시의 일탈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현재의 주류를 만들어버린, 그러나 결코 성공적으로 평가되지는 않는 과거의 일탈들을 보면서 그는 분명 묘한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짐작컨데 아마도 이 시대의 새로운 일탈을 꿈꾸지는 않았을런지. 

 

내게 모든 도시는 마치 여자 같았다귀여운 여자얼굴만 예쁜 여자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존경스러운 여자세심한 여자섹시한 여자터프한 여자여자를 좋아할 것 같은 여자남자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 등등그렇기 때문에 도시로의 여행은 짝사랑이 되기 일쑤였다머리가 큰 이방인 남자를 단번에 좋아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난 보다 오랫동안 그녀 주위에 머물러야 했다이십 대의 나였다면 분명 그녀들을 소유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하지만 삼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자 세상과 공존하는 법을 보다 잘 알게 되었다나는 음흉한 눈길의 아저씨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것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중략) 세상의 모든 도시들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었다지나간 시간의 흔적과 상처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그리고 나는 어느덧 사랑하게 된 사람의 오랜 습관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나름대로의 모습들이 좋았다. - 에필로그 中

나는 에세이는 과장이 없어야(적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적어가는 것이 에세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과장하는 것은 읽는 이에게 생각과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참 매력적인 에필로그다. 도시를 대하는 태도, 도시에 대한 애정, 도시 속에서 사는 방법, 자신의 삶의 방식까지 하고 싶은 말은 죄다 말하고 있으면서도 글 자체는 무척이나 무덤덤하다. 작가는 이정도의 뻔뻔함?! 같은 것도 있어야 할 것 같다. 결국 그 뻔뻔함이라는 것도 건축가의 시선이라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내용 외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오기사의 책들을 보면 항상 부러운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가지를 쓴 캐릭터'. 또 하나는 자기만의 관점이라 내세울 수 있는 '건축가의 눈'.

 

캐릭터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글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이야기에 더 몰입하게 한다는 것. 감정이입 할 대상을 만들어 둔 다는 것만으로도 의외로 사람들은 쉽게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기에 감히 캐릭터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 같지만, 상징물을 넣어 사진을 찍거나 하는 방식으로 나 또한 여행기나 글을 쓰는데 도입을 해볼만한 방식인 것 같다. 건축가의 시각은... 뭐 어쩔 수 없다. 나만의 전문성을 가져서 보이는대로 판단하는 수밖에.

 

가볍게 꺼낸 책이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가벼워져서 그런지 다가 올 여행을 더 기대하게 되는 것 같다. 반쯤은 떠있는 듯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외로움은 기대의 불균형에서 오는 것이다.

 

 환상은 대게 진부하지만 세상은 보다 진부하다그러니까 쿨하지 않게 보일까봐 걱정하면서 살 필요는 없다.

 

 노골적인 상징은 목적에 집착한다. (중략상징은 인간을 위한다는 근대 건축이 정작 잃고 있었던 인간성의 영역에 관한 이야기였다그것은 고귀함과는 거리가 먼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감성들이다.

 

 상징이 공간을 지배한다건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공간 간의 관계라는 것은 형태보다는 상징에 의하여 맺어지기 때문에풍경 속에서의 건축은 형태보다는 상징으로 장소를 규정한다. – 로버트 벤추리,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욕망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그냥 각자의 욕망이 다르기에 종종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누군가가 의지할 것은 결국 자신의 욕망밖에 없다.

 

 일탈은 자기애에서 비롯된다일상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거나 혹은 목표를 향해가는 길을 읽고 잠시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면 일탈의 감행을 고려해볼 만하다자기애가 결핍된 돌출행동은 단지 현재의 부정일 뿐이다.일탈은 나름대로 미래지향적 자의식 발현이다.

 

 궁극적인 새로움이란 다시 말하자면 일상을 바꾸는 문제다수없이 많은 건축적 시도와 실험들은 결과적으로는 일탈에 가까웠다일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 채 잠시 기존의 질서에 변주를 준 것이다물론 부정적인 일은 아니다.많은 시도들은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진다.

 

 삼십 대 중반은 그냥 정신이 없는 시기인 것 같다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지나간 그런 속성의 시간이었다.

 

 세상은 먼저 걱정해주는 사람들에 의해 나름대로 편하게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누가 더 느긋할 수 있는지가 인생의 피곤함을 결정한다.

 

 일탈은 복제되지 않아야 한다복제되고 재생산되는 순간 일탈만이 줄 수 있는 그 미묘한 긴장감은 사라져버린다. (중략)개발이 시작된 지 50년이 넘은 찬디가르에는 여전히 다른 인도의 도시들에서는 느낄 수 없을 미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나는 그것이 일탈이 줄 수 있는 건강한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찬디가르와 브라질리아두 도시는 모두 이성과 합리성이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규정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건설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그리고 대체로 썰렁하다는 유사점도 있다설계자들은 이상적인 도시를 도면 위의 선들로 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치열하게 실현해냈다이것이 바로 두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황량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비관적인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애정에 의해 능동적으로 진화한다그건 변절과는 다른 것이다.

 

 체념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동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

 

 크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수많은 조언자들이 위로를 하더라도 결국 그 크기가 사람들을 자신만만하게 하거나 위축되게 만들고는 한다마음이란 그리 쉽게 설득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위로란 정열적 사랑고백처럼 잠시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하지만 속는 줄 알면서도 가끔은 모른 척 넘어가야할 때도 있는 법이기에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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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지 않은 내용도 진지하게 생각하며 글을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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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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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 한 후 처음으로 외지에 나와 살게 되었다. 이른 바 서울 유학.

부모님의 우려와는 다르게 서울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심지어 눈을 감고 있어도 코를 베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하긴 다 사람사는 곳이니 뭐가 크게 다를게 있겠나. 내겐 제법 친해진 동기들도 있었고, 매일 밤 시간가는 지 모를 정도로 마셔댔으니 정신도 없었고, 해가 뜨는지 지는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반지층 방에서 함께 치킨을 뜯으며 비디오게임을 즐길 친구도 있었다. 스무살, 서울의 밤은 매일 그렇게 지나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친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이걸 왜 하고 있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된 작은 권태로움은, 순식간에 내 삶 전체를 무료하게 만들었다. 당시 연애했었던 친구에게는 참 미안한 이야기지만,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연애조차 무료함과 권태로움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그 전의 통제된 삶과는 다른, 어디하나 묶인 데 없는 자유를 가장한 방종에 취해 지나치게 가벼운 시간을 보냈던 결과였다. 여름이되고 바람이 불었고, 가벼웠던 내 생활은 쉽게 날아가버렸다. 그 즈음의 서울 밤 하늘, 흐리던 달은 참 얄미웠던 것 같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 자발적으로 떠난 것은.

그 전에도 사전적인 의미의 여행은 많이 다녀보았지만, 아니 따라다녔지만 내 인생의 진짜 여행은 그 때가 시작인 것 같다. 이유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유를 몰랐다. 다만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면 다리의 피로감만큼이나 가슴 속에 뭔가 차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얻은 것도 깨달은 것도 사실 쥐뿔도 없었지만, 나는 그게 그냥 '연료' 같은거라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는 평소에 찾으면 된다고 다짐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일상에 충실하기 위한 에너지였고, 여행은 그것을 제공했으며, 난 그걸로도 충분했으니까.

  

그 이후로 여행은 내 생활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삶을 점으로 표시한다면, 두 번의 국토순례와 여러차례의 국내여행, 나들이를 비롯해서 캄보디아로 떠났던 첫 배낭여행, 공모전으로 떠났었던 일본 등의 여행 경험은 모두 당시의 내 삶을 표현하는 굵은 점들이 되었다. 매일 밥만 먹던 내게 여행은 라면이었다. 그리고 때론 그 라면이 참 맛있게도 느껴졌고, 때론 정말 맛대가리 없어서 '아, 정말 맛있는 건 밥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어찌 되었건 내게 여행은 라면이었고, 그저 라면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자꾸 여행을 라면에 비유해서 미안한 일이지만 (글을 쓰는 지금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양해바란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하나를 하면 자꾸 더 좋은 걸 하고 싶어지더라. 라면도 슬슬 물리기 시작했는지 좀 더 특이한 라면을 먹고 싶어졌다. 여행을 뭔가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여행을 나만의 특별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결과, 방법을 찾았다. 바로 '흔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유치하게 어디서 낙서... 이런건 아니니까 걱정은 접어두시길)

   

쉬운 것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행 중 기념이 될만한 작은 것들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기차나 항공편의 티켓들, 영수증 같은 것. 그리고 좀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간단한 느낌을 담은 단어나 글도 함께 썼다. 나중에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부작용은 많았지만 그래도 그게 추억이었고, 그게 내 여행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않더라. 욕심쟁이심뽀 어디가겠나, 그렇게 나는 기왕이면 사진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사진을 여행의 부산물이라 생각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사진도, 기록도 모두 추억하는 여행을 아름답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가 순간순간에 집중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더라. 사진도, 기록도 지나고 난 여행을 아름답게 추억하게 하는 재주가 있지만, 동시에 지금 즐기는 여행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비로소 라면이 짜장라면이든, 짬뽕라면이든, 무튼 맛을 음미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찰나의 느낌을 담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비도 무거웠고, 현장에서 사진을 잘 찍었다고 해서 나중에 본 사진이 무조건 만족스러울거라는 보장도 할 수 없었다. 기본기 없던 실력이 하루 아침에 늘진 않을테고, 조금씩 노력은 하겠지만 그래도 이걸 보완해줄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달리했다. 현장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쪽보다, 내 감정이 느끼는 바에 더 집중하자고. 그게 바로 '스케치' 였다그래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여행이라면 스케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시도했던 건 뉴질랜드 여행. 처음은 역시나 초라하다. 몇몇 그림을 그려보긴 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노트도 변변찮았고, 연필도 구할 수 없어서 펜으로만 그렸다. 실력이 없으니 역시 장비 탓을 하게 되지만... 무튼 그랬다. 그렇게 여행을 돌아와서 한동안은 스케치를 잊고 있다가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림 여행을 권함]이라는 겸손한 제목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용은 크게 말할 것이 없을 것 같다. 저자의 여행이야기, 그리고 그림을 그렸던 것들, 몇몇 애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여행기를 기대하고 이 책을 구매한다면 어쩌면 실망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그림을 여행에 빗대어, 여행을 떠나기전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물과 방법들을 이야기 해주는 것도 좋았다. 예를 들면, '자기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라', '기분을 표현하는 것은 꼭 직접적일 필요가 없다', '묵었던 숙소의 평범함을 그리는 것도 좋다' 뭐 그런 것들. 이런 이야기들을 숙지한 후에 책을 보면 중간에 들어간 삽화가 더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다. 처음 도입부의 저자의 어머니께서 그렸다는 여행기도 참 귀엽고?! 운치 있었다는 것도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다음 달이면 몽골여행을 떠난다. 관련된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이제는 이웃이 된 리모님의 블로그(http://rimo.me/)를 찾게 되었다. 여행했던 순간들을 드로잉으로 남기시는 여러 포스팅을 보면서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물론 사진으로 봐도 멋진 곳들이겠지만, 직접 그린 스케치 자국과 파스텔 톤의 색체는 사진 이상의 감정과 느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멋진 그림들에 반해 조심스레 덧글을 남겼더니, "드로잉은 그 과정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은 것 같다"라는 답글을 달아주신다. 이 책 [그림 여행을 권함]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완전히 맞아 떨어져서 적잖이 놀랐다. 저자와 리모님, 두 분 모두 여행과 그림이 가지는 공통점, 과정과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받아들일 때 진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이번 여행 전 준비물 리스트에 급히 몇 가지를 추가해야겠다.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오늘의 작은 시도가 이번 여행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여행까지도 그 순간을 더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마법의 레시피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에 관해서라면 난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림은 누가 가르쳐준다기보다 스스로 즐기는 법을 터득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마치 여행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림을 못 그리도록 막는 장애물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아주 많다. 손을 쓰는 인류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특권을, 그 누구도 박탈당해선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치 여행의 권리처럼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특권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망각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보자. 그림이란 뭘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나는 이런 구조의 말들이 좋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뜻이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대개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이다. - 프롤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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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집중해서 바라본다는 것은, 곧 자기자신을 응시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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