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 - 팀 보울러 저 / 놀(다산책방) 출판

모두, 그렇게 성장한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간만에 쓰는 책 리뷰. 여행을 다녀와서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좋은 일들은 빨리 습관화해야 편해지는데 가끔 이런 일탈 아닌 일탈을 겪고나면 피로를 빙자하고 너무 나태해지는 것 같아 큰일이다. 뭐, 푸념은 이쯤하고 다시 리뷰를 써볼까.

 

 

나는 아주 유명한 책이 아니라면 책의 제목이나 표지를 보고 대강의 이미지를 추측하거나 생각한다. 여기서 '대강의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해내는 이미지들이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추측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 떠오르는 어떤 것이나 '끌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라는 책도 처음 접하면서 어떤 상황들이 문득 떠올랐다.

 

첫 번째는 누군가에게 쫒기는 악몽을 꾸다가 다리에 쥐가나서 일어나는 상황. 보통 이런 날 아침이면 어머니가 아침 상을 차려주시며 "너 키 크려나보다" 라는 말씀을 해주시곤 했는데... 두 번째로 떠오르는 것들은 작가의 가장 유명한 전작인 [리버보이]와 최근 성공했던 성장소설 [완득이]. 이 두 가지 이미지와 상황들을 두고 보면 공통점이 있다. 청소년기의 성장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점.

 

거의 정답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책은 팀 보울러의 분명한 색깔에서 벗어나지 않는 '성장소설'에 속한다. 하지만 이 책을 '성장'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마무리하고 넘어가기에는 어쩌면 절반의 의미만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성장'이라는 단어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여러 의미로 병용하며 살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성장'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세포분열 등으로) 자라서 커지는 것이다. 즉, 육체(양)적 성장의 측면에 집중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동식물의 경우는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인간만큼은 완전한 성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육체(양)적 성장뿐만이 아니라 지적/정신적 성숙도 함께 이루어져야만 한다. 단순히 '성장'이라는 단어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절반의 의미밖에 담지 못한다고 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던 것을 새롭게 알게되어 익힐 때, 즉 새로운 지식이 생길 때 '성장'하지만, 때로는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을 어느 순간 새롭지 인지하고 어떠한 깨달음을 얻을 때 더욱 성장하는 것 같다. 아니, 정정하겠다. 그때야말로 성장이 완성되는 것 같다. 조금 더 쉽게 구분해보자면 전자의 성장이 '생장'이라는 육체적이고 양적인 확대를 의미한다면 후자의 '깨달음'과 '극복'을 통한 성장의 경우에는 내면의 '성숙'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서 진정한 성장이란 '생장'과 '성숙'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라는 소설은 성장의 의미 중 소년의 '성숙'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가장 성숙하게 될까? 그리고 우리를 가장 성숙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성숙의 시점에 관해서는 비교적 말하기가 쉬울 것 같다. 무지의 영역이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니까. 처음에는 그게 성숙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삶이 거듭될수록 배움을 통해 알게 되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의 시점과, 그것이 삶의 일부분으로 녹아드는 깨달음의 시점이 반드시 동일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점점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장의 시점을 어느 때로 생각해야할까? 배움을 통한 지식의 양적 증대? 아니면 깨달음의 순간? 지금의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성숙의 순간보다 더 어려운 질문은, 과연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결국 지식을 습득하고 깨닫게 되는 주체는 본인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본인을 성숙하게 하는 대상은 달라질 수 있다. 지식을 전한다는 측면에서 수많은 책들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을 받을테니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본인의 특정 사회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성숙의 매체는 바로 부모님이 아닐까 싶다.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서일까 '부모'라는 단어는 참 무겁다. 그만큼 우리는 부모와 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 모두는 부모로부터 태어났으며, 알게 모르게 역할교육을 받았으며, 보육을 받았고,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우리가 성숙하는 결정적인 순간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벗어날 때'가 된다. 그들의 품 안에서 너무나도 닮은 존재로 자라 독립성을 가지지 못했던 종속적 자아가, 물리적/경제적/내면적 독립을 함으로 해서 진정한 자아를 가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아들이기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가장 훌륭한 인물도, 가장 넘어서야할 큰 벽도 아버지다.

 

부모로부터의 독립도 몇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독립의 자발성 여부를 두고도 구분할 수 있고, 혹은 위에서 나눈 것처럼 어떤 계기를 통해서 물리적/경제적/내면적인 독립으로도 나눌 수 있다. 어느 것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독립의 성격이다. 독립은 곧 부모(혹은 부모의 역할)의 '부재'를 의미한다. 부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충분한 성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넘어서는 일종의 성장기. 이쯤되면 떠오르는 내용들이 있지 않은가? 알을 깨고 진정한 나의 세계로 거듭나는 [데미안].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보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더 가까울 것 같다. 팀보울러의 [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를 읽으면서 나는 시종일관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친구의 이름이 '스핑크'인 것을 보고는 웃음까지 나왔다. 이름의 뉘앙스 뿐만 아니라 난관을 제공하지만 그 시련을 극복함으로해서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애증의 인물이 된다는 점이, 알듯 모를듯한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불안정한 상황들과 가정이 만들어진 책임을 시종일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에게 부여하고 있는 경향이 강한데, (물론 어머니에게도 아주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그것 역시 주인공이 넘어서야할 대상으로 아버지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면에서 이 소설은 오이디푸스의 여정과 확실히 닮았다. 부모와 자식, 가정과 그 속에서의 성장의 문제는 인류의 존속과 동시에 계속해서 반복되어 제기되었던, 그리고 해결되었던 문제인만큼 지금의 시점에서도 누군가를 위한 훌륭한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아쉬웠던 면도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 상의 이야기겠지만, 나는 소설의 말미까지 의심하게 했던 봉투 속의 의문의 덩어리가 차라리 실체가 없는 일종의 상징적인 무언가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독자에 따라서 '자아'가 될 수도 있었을테고, '행복한 가정'이 될수도 있을 것이며,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많아졌을텐데. 다만, 그 속의 물건이 위폐라는 사실에서 1)(전 시대의 행동들을)단순히 반복하고 따라만 해서는 진정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 2)그리고 물질만능주의의 현실을 꼬집었다는 등의 의미를 억지로 찾아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끝으로 나의 경우에는 이 이야기를 어떤 '성장기'로 해석을 했지만, 소설의 내용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않아도 '스릴감'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즐기기에도 좋은 내용이므로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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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포터즈 미션을 통해 도서지원을 받아 작아된 서평입니다.

서평 내용은 오직 솔직하게 생각한 것만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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