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편지 바벨의 도서관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김상훈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에드가 앨런 포가 지은 '도둑맞은 편지', '병 속에서 나온 수기', '밸더머 사례의 진상', '군중 속의 사람', '함정과 진자' 다섯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도둑맞은 편지'는 이전에 읽어본 적이 있고, 나머지 네 편은 처음 읽는 것이다. '도둑맞은 편지'와 '밸더머 사례의 진상'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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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둑맞은 편지

 

  모르그 가의 살인,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와 함께 포가 쓴 단편추리소설. 탐정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한다. 추리소설의 창시자라는 명칭이 포에게 뒤따라다니므로, 그 중 한 편을 선정해 여기 실은 듯 하다.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단편이라, 편지가 어디서 발견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포가 사용한 표현들에 대해서는 꽤 놀랐는데, 뒤팽의 입을 빌어 나온 장광설이나 비유가 퍽 정신을 혼란하게 한다. 뒤팽의 비뚤어진 성격은 그의 뒤를 잇는 많은 탐정들의 괴벽을 떠올리게 만든다.

 

 p.40.

 솔직히 지금까지 만난 수학자들 중에서, 둥근 계산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맡길 수 있는 인물이나 x2+px는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q라는 식의 신앙을 갖지 않은 위인은 아직 못 만났네. 시험삼아 이런 친구들 중 하나를 골라서 x2+px가 반드시 q가 아닐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한다고 말해보게나. 상대방이 자네 말을 이해했다는 확신이 생기는 즉시, 최대한 빨리 그 친구 곁을 떠나야 해. 왜냐하면 그 죽시 자네를 때려눕히려고 할 게 뻔하거든.

 

  이런 식의 표현이 좋았다.

 

  세상에는 막힘없이 한번에 써내려간 것 같은 글이 있고 수없이 다듬고 파헤친 것 같은 글이 있는데, 포는 확실히 전자인 것 같다. 긴 문장도 무리없이 쓱쓱 읽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재미있었다. 이 소설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등잔 밑이 어둡다' 혹은 '업은 아이 삼년 찾는다'인 것 같다.

 

 

* 병 속에서 나온 수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폭풍에 휘말려 스웨덴인과 둘이 난파선에 남은 화자가,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괴상한 배를 만나 요행히 탑승한 후 벌어지는 관찰일기.

 

  p.61.

 

  머리 바로 위의 까마득하게 높은 곳, 물의 절벽 가장자리에 약 4톤쯤 되어보이는 거대한 배가 떠 있었다.

 

  이 배는 기묘하기 짝이 없다. 선원들은 모두 어처구니 없을 만큼 늙었고, 화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배는 거친 풍랑과 함께하는데, 그 이유를 화자는 어렴풋이 '조류를 타고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읽으면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선장> 전설이 좀 생각났다.

 

  관찰일기라고는 하지만 화자는 짤막하게 자신의 감상을 덧붙여놓을 뿐이다. 따라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어렴풋한 두려움과 궁금증만이 글에서 전해져 온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떨어진다!"이다. 이 문장을 보고 한참을 갸웃거렷는데, 달려있는 주석을 보니 극지방에 도착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표현한 듯 하다.

 

  잘 알 수 없는 단편이다.

 

 

* 밸더머 사례의 진상

 

  p.76.

  지난 3년 동안 나는 최면술에 흥미를 갖고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9개월 쪽 전에 퍼뜩 깨달았다. 지금까지 시행된 일련의 최면술 실험에는 극히 중대하고 변명하기 심든 결락이 있다. '임종의 순간 articulo mortis'에 최면술이 시행된 전례가 없지 않은가.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화자는 어니스트 밸더머 씨의 동의를 받아, 그의 임종의 순간에 최면을 걸기로 한다. 이 시도는 성공했고, 밸더머 씨는 죽어갈 때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거의 7개월에 걸쳐서 최면 상태에 걸려 있었다.

 

  최면에 걸린 채 죽어있는 상태로 말을 하는 밸더머 씨의 모습은 추가적인 설명이나 사건이 없어도 충격적이고 기괴한 느낌을 주며, 그래서 공포스럽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거기 있는 것 만으로 공포를 주는' 존재가 있는 법이고, 죽은 채로 살아있는 밸더머 씨가 그런 존재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안락사 문제가 생각났다. 안락사에 관해 떠도는 몇 가지 이야기가 밸더머 씨의 사례와 겹치면서, 과연 어떤 게 옳은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p.88.

 적어도 지금까지 죽음(또는 통상적으로 죽음이라고 불리는 것)이 최면작용에 의해 중단되었음은 명백했다. 따라서 밸더머 씨를 각성시킨다면 그를 곧바로, 아니면 적어도 급속하게 사멸로 몰아넣으리라는 점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p.89.

  "밸더머 씨, 당신이 지금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마자 예의 소모열 홍조가 두 뺨에 돌아왔다. 혀가 떨리는, 아니, 입 안에서 몸부림치듯이 우믹이는 것이 보였고(턱과 입술은 예전처럼 경직된 상태였지만) 마침내 앞에서 이미 묘사했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제발 부탁이야! ......빨리! ......빨리! ......나를 다시 잠재워 줘...... 아니면, 빨리! ...... 나를 깨워 줘! ......빨리! ...... 이봐, 나는 죽었어!"

 

 

* 군중 속의 사람

 

  D호텔 카페테라스에 앉아 군중을 관찰하던 화자가, 일반 사람과 다른 표정을 가진 65-70세 가량의 노인을 미행하는 이야기. 노인은 군중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다.

 

  이 소설의 대부분을 묘사가 차지하고 있는데, 묘사가 생생해서 마치 그 거리에 내가 있는 것처럼 상상해 볼 수 있다. 사람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인은 불안해 보이고, 아무 생각 없어보이기도 하고, 뭔가를 하기 위해서인 것 깉기도 한데,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다. 그래서 왜 그런지 궁금하다. 노인이 군중을 찾는 이유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데, 그래서 이 글은 꽤 기묘한 느낌을 풍긴다.

 

p.108.

 

"저 노인은,"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심원한 죄악의 전형이자 보닐이었어. 혼자 있기를 거부해. 그는 군중 속의 인간이니까 말이야. 더 이상 쫓아가봐도 소용없어. 그래보았자 그나 그의 행동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마음은 <영혼의 동산> 이상으로 속악한 책이고, 이것을 '읽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마 신의 가장 큰 은총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포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도시 풍경이 그다지 크게 바뀌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실제로 비교하면 꽤 바뀌었겠지만 도시 특유의 분위기랄까, 사람들이랄까, 그런 것들은 비슷한 것 같다. 그 때문인지, 군중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인도 내가 사는 도시에서 한둘 쯤 발견할 수 있을 것 깉기도 하다.

 

 

* 함정과 진자

 

p.111

  죄 없는 사람의 피에 굶주린 불경한 고문자들이

  여기서 끊임업는 증오와 분노를 조장했지만

  이 죽음의 굴이 파괴된 지금 조국은 안전해졌고

  잔혹한 죽음이 있던 곳에는 생명과 구원이 있노라.

 

-파리의 자코뱅 클럽 회관이 있던 자리에 건립될 시장의 문을 위해 쓰인 사행시- 

 

  처음부터 이게 현실인지 환각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된다. 화자의 말에 의해 그가 재판을 받았고 뭔가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는데, 이는 스쳐지나가듯 나올 뿐이다. 선명하게 묘사되는 것은 그가 받는 형벌이다. 그 형벌은 꽤 기묘하다(랄까, 좀 납득할 수 없는 방법이다). 한번에 죽이는 게 아니라 말려 죽인다는 표현이 걸맞은 방법들이 등장한다.

 

  처음에 화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감옥에서 그 안을 가늠해보려다가 함정에 빠질 뻔 한다. 그 함정은 아래로 뻥 뚫린 구멍이다. 그 함정을 피한 뒤 깨어나자, 사방에 불이 밝혀져 있고 몸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위에는 진자를 그리며 내려오는 반원형 칼이 있다. 간신히 그 칼에서 벗어나자 방이 마름모꼴로 납작해지면서 불타는 벽이 점점 그를 향해 다가온다.

 

  이 형벌들은 높은 공포를 선사하는데, 치명적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형벌이라기보다는 그의 힘과 지혜를 시험해보는 모양새인데, 희망이 없어보이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결말이 희망적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또한 갑작스러워서 과연 그가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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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1인칭 화자. 모두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글에 적어놓은 형태. 화자의 말을 듣는다기보다는 화자가 적어놓은 글을 나중에 발견해 읽는다는 느낌이다. 포의 묘사력을 볼 수 있는 단편이 많아 신선했다.

 

 

201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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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형사 피터 다이아몬드 시리즈 1
피터 러브시 지음, 하현길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피터 다이아몬드 시리즈 1편.

 

  추 밸리 호수에서 알몸의 여자 시체가 발견된다. 피터 다이아몬드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사에 나선다.

 

  알몸의 여자, 신원을 알 수 없고 호수에 투기된지 2주일은 되었기 때문에 일단 신원을 밝히는 것 부터 시작된다. 대대적으로 여자의 몽타주를 내보내고, 실종된 사람 명단을 뒤지는 일이 이어진다. 시작부터 스펙터클하게 굴러가지는 않는 셈이다.

 

  하기야 이 소설은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p.213.

  셜록 홈스의 계승자들이라면 이 주소록에서 많은 것들을 추리해 살인자를 찾아내고, 언제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그들처럼 천재성이 번뜩이는 사람이 아니라서 제리의 주소록에 적힌 친구들의 명단을 다시 작성하면서 잭맨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 말마따나, 피터 다이아몬드는 천재적인 사람은 아니다. 9명의 사람이 피해자가 TV 드라마 속 캐릭터라며 신고했는데, 피터 다이아몬드는 그 제보를 무시한다(하기야 나라도 무시할 거 같긴 하다). 하지만 실은 살해당한 여인이 그 캐릭터를 맡았던 여배우였다. 다이아몬드는 자주 실수한다. 그는 의심으로 똘똘 뭉쳐 있고, 모든 것을 의심하는게 형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학 수사를 싫어한다! CIS와 같은 수사물에 익숙한 사람으로서는 어리둥절한 일이다.

 

  p.441.

  간부들은 온갖 기계 장비들을 지원해주고는 초인적인 성과를 기대한단 말이야. 그런데 경찰 일이라는 게 결국은 사람들을 조사하는 거거든. 교활한 사람들, 위험한 사람들, 겁에 질린 사람들을. 그리고 악당들은 20년 전보다 훨씬 더 단수가 높아졌단 말이야. 놈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진실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난 그걸 하려고 수사반에 들어갔어.

 

  책 속에서 수사는 빨리 진행되지 않고 상당히 더디게, 그리고 착실하게 진행된다. 피터 다이아몬드의 활약이 나오는 것은 1/4 정도 남은 지점부터다. 재미있는 건 이미 이 시점에서 '과학 수사'는 사건의 용의자를 한 명으로 좁혀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형사"와 "과학수사"의 대결이 된다.

 

  사실 과학 수사가 없더라도, 과학수사가 지목한 범인이 바로 진짜 범인인 듯 하다. 하지만 몇 가지의 사실들이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1. 과연 제럴딘 잭맨은 교수를 살해하려 했는가?

2. 제인 오스틴의 편지는 어디로 갔는가?

3. 앤디는 누구인가?

4. 사라진 운행일지는 어디로 갔는가? 

 

  다이아몬드는 멋지게 이 모든 의문점을 밝혀낸다. 물론, 그의 활약은 모두가 알고 그를 인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형사답게 진실을 밝혔음에 만족했음이 분명하고, 그런 면이 다이아몬드의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아하게 만드는 점이다.

 

  <마지막 형사>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섞여 있는데, 하나는 위에 언급한 대로 여자를 살해하고 호수에 유기한 범인을 찾는 것이고, 둘은 피터 다이아몬드와 경찰조직과의 갈등이다. 이 갈등은 다이아몬드가 과학수사 대신 전통적인 형사의 방식을 선호하면서 일어난다. 결국 제럴딘 잭맨 살인사건의 범인을 다이아몬드가 밝혀냄으로써 다이아몬드의 방식이 승리하는 듯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다이아몬드는 사표를 냈고, 결국 과학수사가 기존의 방식을 밀어내고 경찰의 핵심에 자리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부터 차분하게 수사하면서 뿌려놓은 떡밥을 끝에 가서 회수하는 솜씨가 굉장하다. 왜 플롯의 제왕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다. 캐릭터도 좋다. 다이아몬드는 셜록 홈즈 과도 아니고 CSI과도 아니고, 뭔가 독특한 맛이 있다. 후덕한 외모와 달리 성격 나쁘다는 것도 재미있고...... 시작부터 사람을 잡아끄는 방식이 아니라 책장이 넘어갈수록 푹 빠지게 되는 소설, 개인적으로 part 2의 잭맨 교수의 진술부터 책장이 쉽게 넘어갔다.

 

  시리즈 2탄 <다이아몬드 원맨쇼>와 비교해보자면, <마지막 형사> 쪽이 플롯도 더 짜임새가 있고 무리한 설정도 없으며, 보다 정적이다(<다이아몬드 원맨쇼>가 워낙 나라를 건너가며 뛰어다녀서 그런 느낌이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라는 캐릭터는 <다이아몬드 원맨쇼> 쪽에서 조금 더 두드러지는데, 다이아몬드가 손재주가 정말 없는 사람이란 설정은 이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듯 하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표지와 제목이 정말 취향이 아니라 넘겼었다. 책이 재미있다는 걸 알고있는 지금도 표지를 보면 썩 손이 가지 않는다. 뭔가 읽는 의욕을 떨어뜨리는 표지다. 어쨌든 간에 책의 뒷날개를 보니 3편 4편의 설명이 적혀 있는 걸 보니 뒷편이 나올 모양이다. 나오면 또 읽어야겠다. 피터 러브시의 또 다른 시리즈물도 소개되었음 좋겠다.

 

 

201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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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피라미드 바벨의 도서관 21
아서 매켄 지음, 이한음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검은 인장 이야기(라이스터 스퀘어의 젊은 숙녀)>, <하얀 가루>, <불타는 피라미드>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 편 다 추리소설과 공포소설이 섞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구체적으로 공포의 진원지를 밝히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넘어간 건 좀 아쉬웠다.

 

 

* 검은 인장 이야기

 

  랠리 양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어떤 젊은 숙녀가 자신이 겪은 일(그레그 교수 실종사건의 진실)을 필립스 씨에게 말해주는 이야기.

 

  랠리 양은 그레그 교수 아이들의 가정교사이자, 그의 비서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그레그 교수는 민속학의 권위자였는데, 자신이 심중에 품고 있는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듯한 몇 가지 사소한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그 교수는 어느 날 휴가라면서 어느 산골마을로 간다. 랠리 양이 우연히 교수가 가진 검은 인장(육십석)에 대해 적힌 책을 발견하면서 그레그 교수는 묘하게 변화하고 랠리 양은 두려움을 느낀다. 교수는 갑자기 집안일 도울 소년이라며 쉭쉭거리는 소리만 내는 저능아를 데려오고, 도저히 꺼낼 수 없는 곳에 있던 흉상이 책상으로 내려와 있는 등 이상한 징후가 보이는데.......

 

p. 71.

그리고 이런 전승들 속의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요소는 진화의 장엄한 행군에서 탈락한 종족이 우리에게 기적으로 보일 어떤 힘을 생존력으로 지녔을 수도 있다는 가설로 설명이 되리라 생각했다.

 

  전반적인 흐름으로 보아 랠리 양이 사실을 알아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실은 그레그 교수가 실종되고 그의 유언장이 발견되면서 알려진다. 다만 그레그 교수가 왜 산책에서 사라져야 했는지, 육십석은 무엇이었는지, '작은 인간들'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아 추측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 추측을 할 단서도 그리 충분하지는 않다. 그저 뭔가 무서운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로 끝날 뿐이다.

 

  '작은 인간들'에 대한 그레그 교수의 가설은 재미있고, 뭔지 모를 일들에 랠리 양이 두려움을 느끼는 과정은 좋았다. 수상쩍은 현상을 말해 호기심을 높이고, 사건의 목격자가 진술하게 함으로써 신뢰를 느끼게 하는 건 성공했는데 마무리가 좀 약했다는 느낌이다.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많으니 무섭기보다 되려 김이 빠지는 느낌이랄까. 

 

 

* 하얀 가루

 

  헬렌 레스터라는 아가씨가 자신의 동생에게 일어난 일을 서술한다.

 

  헬렌에게는 프랜시스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대법관이 되기 위해 밤낮없이 공부한다. 헬렌은 동생을 염려해 해버든 의사를 데려오고, 의사를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라며 처방전을 써 준다. 동생은 그 처방전을 가지고 근처에 있는 구식 약국의 늙은 약제사에게 가서 약을 지어온다. 하얀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면서 동생은 유쾌해지고 헬렌은 처음에 동생의 변화를 반기지만, 점점 동생이 낯설어지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낀다.

 

  제일 재미있었던 단편. 프랜시스의 변화와 그에 따른 헬렌의 반응이 강렬하다. 변화에 대한 반가움이 두려움으로 바뀌면서 고조되어가던 긴장이, 마지막에 프랜시스의 방에서 헬렌의 방으로 검은 물이 떨어지고 프랜시스의 방에서 '악취를 내뿜는 검은 덩어리'를 발견하며 절정에 이른다.

 

  프랜시스의 변화를 보면 하얀 가루의 정체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하얀 가루의 정체는 경악할 것이지만 그 과정은 좀 두루뭉실하게 적혀 있다. 오랫동안 방치한 약이 다양한 온도 변화를 겪으며 어느 순간 악마의 연회에 쓰이는 포도주, 비눔 사바티 Vimum Sabbati의 제조에 쓰이는 가루로 변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약물의 오남용이 얼마나 나쁜지 경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검은 인장>보다 짧았지만 훨씬 오싹했다.

 

 

* 불타는 피라미드

 

  세 편의 단편 중에서 제일 추리물 같은 느낌을 풍겼다. 그렇지만 끝은 역시 공포물.

 

  시골에 사는 본이 런던에 사는 다이슨을 찾아와서 자신이 겪은 이상한 일을 말한다. 첫째, 한 달 전 애니 트래버라는 소녀가 숙모를 만나러 집을 나섰다가 실종되었다. 둘째, 본의 집 앞에 돌로 그린 수상한 신호가 매일 바뀐다(12개의 부싯돌로 이루어진 직선 > 사발 > 피라미드 > 반달). 본은 값나가는 그릇을 도둑질하려는 도둑이 남긴 신호가 아닐까 걱정한다.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하려던 다이슨은 부싯돌이 독특한 종류의 화살촉임을 알아내고 흥미를 느껴 본의 집으로 간다. 부싯돌 신호는 더이상 없었지만, 본의 집 벽에는 어른의 눈높이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아몬드 모양의 눈이 그려져 있고, 아몬드 눈은 하루에 하나씩 늘어난다.

 

  결국 다이슨은 암호를 풀어내는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불타는 피라미드,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이 수많은 기괴한 형상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 그리고 근처에 놓여 있는 애니 트레버의 브로치를 발견했을 뿐이다.

 

  읽으면서 공포보다는 호기심이 더 들었다. 사실 마지막에 초현실적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냥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클라이막스를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넘어간 것이 오히려 더 기괴한 느낌을 준 것 같다.

 

 

  세 편의 단편 모두 전체적으로 모난 곳 없이 안정된 느낌이다. 스토리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대충 짐작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 다만 공포의 극한까지 몰아가지 않고 진실을 끝까지 알려주지 않은 채 중간 정도에서 멈춰버리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 특징이라면 민간전승에 나오는 존재들을 공포로 둔갑시킨다는 점이랄까.

 

  원체 이런 류를 좋아해서 그런지, 지금까지 읽은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중 제일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하는 힘은 조금 부족한 것 같다.

 

 

 

201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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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악마 바벨의 도서관 26
자크 카조트 지음, 김계영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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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이 시리즈 꽤 재미있는 것 같다. 느낌이 독특하다.

 

  <사랑에 빠진 악마>는 나폴리 왕실 근위대 대위로 재직중인 25세 알바로가 포르티치 폐허에서 악마를 불러내면서 시작한다. 알바로가 악마를 불러낸 직후 나타난 여인 비온데타와 연애하는 과정이 줄거리인데, 줄거리 자체는 별다를 바 없고 등장인물로 꽤 단면적이나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꽤 흥미롭게 읽었다.

 

  이 글은 알바로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그 때문에 알바로가 겪은 일이 현실인지 환상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알바로가 비온데타에게 끌리면서도 의심하고 경계하는 과정이 꽤 재미있다. 만약에 비온데타가 악마라면 알바로의 의심은 정당한 것이지만, 알바로가 겪은 일이 그의 환상이라고 하면 비온데타는 부당한 처사를 받는 것이 틀림없다(그리고 비온데타는 자신의 억울함을 종종 알바로에게 호소한다).

 

  비온데타의 행동 또한 꽤 수상쩍으면서도, 전혀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비온데타는 알바로에게 마음이 있지만, 사귀기 전까지는 노골적으로 유혹적이지는 않다. 비온데타가 알바로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호소하고 애원하고 울고 새침하고 애처롭게 구는 몇 가지 술책을 쓰는 것은 둘이 연인이 된 이후이다. 비온데타의 이러한 태도는 알바로가 겪은 것이 과연 현실인가 하는 의심을 심어놓는다(만약 비온데타가 악마라서 알바로를 유혹해야 했다면, 사귀기 전에 더욱 더 유혹적이고 새침하게 굴지 않았을까?).

 

  또한 중요한 것은, 보통의 소설들과는 다르게, 알바로와 악마 사이에는 어떤 명시적인 계약이 없다는 점이다. 악마는 "케 부오이(무엇을 원하느냐)?"하고 묻기는 했지만, 알바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으며(그는 악마를 종으로 취급하고, 악마는 이유를 모르지만 그에 순종했다), 악마 또한 알바로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대가로 자신이 받을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따라서 둘 사이에는 '이건 하면 안 된다'는 게임의 룰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한층 모호하다. 그들의 거래는 불명확하고, 알바로의 강박적인 행동이나 비온데타의 과민한 반응을 보고 추론을 할 수 밖에 없다. 알바로는 비온데타와 사귄 뒤에도 그녀를 경계하고, 비온데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알바로를 자신의 뜻에 따르게 하려고 하지만, 그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소설의 흐름을 매우 빠른데, 다른 가지는 다 쳐내고 몸통만 남겨놓았다는 느낌이다. 그 성급한 느낌과 알바로의 성격, 그리고 '과연 그 일이 현실에 일어났는지'의 불명확함 때문에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다채로워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TV프로그램 <사랑과 전쟁>이 생각났다. 알바로와 비온데타는 과연 사랑한 걸까? 둘이 끌린 것은 사실이지만, 알바로도 비온데타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비온데타 또한 비슷하다. 둘이 날을 세우는 것을 보면, "정말 둘은 일종의 게임을 하는 게 아닐까, 알바로가 진다면 영혼을 뺏긴다거나, 알바로가 이긴다면 악마에게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의심이 든다. 하지만 결말에서 비온데타는 자신의 정체가 베엘제부트라 밝히고,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떠나간다. 보통의 소설과 달리.

 

  작가는 마지막에 비온데타의 정체를 밝혀내지만, 그 과정 자체도 꽤나 환상적이므로 '과연 그게 현실인가?'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결과적으로 비온데타와 알바로는 헤어지고, 알바로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고, 아마도 어머니가 정해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를 보면 비온데타가 알바로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매우 경계한 이유도 왠지 납득이 간다(만약 비온데타가 진짜 인간이었어도, 과연 알바로의 어머니가 둘의 결혼을 축복해주었을까? 서술을 보면 알바로는 마마보이 기질이 다분하다.)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아리송하고, 아리송한 만큼 식상할 수 있었던 얘기가 재미있는 소설이다. 둘 사이에 과연 어떤 일이 있는 것인지, 명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 이면을 추론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201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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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레 매그레 시리즈 19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조르주 심농이 쓴 매그레 반장 시리즈 마지막권. (이후에 다시 매그레 시리즈가 나왔다고 한다.)

 

  은퇴해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는 매그레에게 아내의 동생의 아들(글에서는 조카라고 표현) 필리프가 찾아온다. 필리프는 플로리아라는 카페에서 페피토라는 용의자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 밤 누군가 페피토를 살해했고 당황한 필리프는 플로리아를 빠져나오다 어떤 남자에게 목격당한다. 필리프가 페피토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가 될 상황에, 매그레는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이제 수사반장이 아니고, 수사는 어려움에 봉착하는데.......

 

  이 글의 재미는 매그레가 더 이상 수사반장이 아니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잔뜩 꼬인 상황도 한 몫 한다. 필리프는 그 밤에 벌인 여러가지 바보짓 때문에(바보짓이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어디 빠져나갈 구석도 없는 용의자가 된 상황. 더구나 경찰들은 유력한 용의자인 필리프를 검거하는 선에서 수사를 끝내려 한다. 매그레는 필리프를 구하기 위해 진범을 잡아야 하는데, 글은 당연하다는 듯이 사건의 범인으로 '공증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카조를 지목한다. 그러나 카조가 눈 앞에 있지만 증거가 없어 아무런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런데 매그레는 수사반장이 아니고, 그래서 그가 통상적으로 쓰던 방법들을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매그레는 여러가지 변칙적인 방법을 구사하는데, 결과가 썩 신통치가 못하다. 스파이로 심어놓은 매춘부 페르낭드는 적과 사랑에 빠지고, 하마터면 자신의 패거리에게 살해당할 뻔한 목격자 오디아는 경찰서에서 시치미를 뗀다. 카조와 외젠, 마르세유 젊은이, 오디아, 루이는 유유자적하게 매그레가 쳐 놓은 그물을 빠져나간다.

 

  범인이 눈에 보이는데 잡아넣을 수 없는 상황은 묘한 긴장감을 준다. 과연 매그레가 카조를 잡아넣을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글이 끝날 때까지 호기심이 끊이지 않는다.

 

  매그레 시리즈 답게 마지막에는 약간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 이 반전 덕에 소설이 끝났음에도 어딘지 찜찜하다. '악이 처벌당했다. 그런데 더 큰 악이 남아있다.'는 느낌이다. 그런 모호함이 매그레 시리즈의 매력이기지만, 권선징악을 사랑하는 나 같은 독자는 좀 슬프다.

 

 

201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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