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편지 바벨의 도서관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김상훈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에드가 앨런 포가 지은 '도둑맞은 편지', '병 속에서 나온 수기', '밸더머 사례의 진상', '군중 속의 사람', '함정과 진자' 다섯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도둑맞은 편지'는 이전에 읽어본 적이 있고, 나머지 네 편은 처음 읽는 것이다. '도둑맞은 편지'와 '밸더머 사례의 진상'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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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둑맞은 편지

 

  모르그 가의 살인,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와 함께 포가 쓴 단편추리소설. 탐정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한다. 추리소설의 창시자라는 명칭이 포에게 뒤따라다니므로, 그 중 한 편을 선정해 여기 실은 듯 하다.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단편이라, 편지가 어디서 발견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포가 사용한 표현들에 대해서는 꽤 놀랐는데, 뒤팽의 입을 빌어 나온 장광설이나 비유가 퍽 정신을 혼란하게 한다. 뒤팽의 비뚤어진 성격은 그의 뒤를 잇는 많은 탐정들의 괴벽을 떠올리게 만든다.

 

 p.40.

 솔직히 지금까지 만난 수학자들 중에서, 둥근 계산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맡길 수 있는 인물이나 x2+px는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q라는 식의 신앙을 갖지 않은 위인은 아직 못 만났네. 시험삼아 이런 친구들 중 하나를 골라서 x2+px가 반드시 q가 아닐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한다고 말해보게나. 상대방이 자네 말을 이해했다는 확신이 생기는 즉시, 최대한 빨리 그 친구 곁을 떠나야 해. 왜냐하면 그 죽시 자네를 때려눕히려고 할 게 뻔하거든.

 

  이런 식의 표현이 좋았다.

 

  세상에는 막힘없이 한번에 써내려간 것 같은 글이 있고 수없이 다듬고 파헤친 것 같은 글이 있는데, 포는 확실히 전자인 것 같다. 긴 문장도 무리없이 쓱쓱 읽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재미있었다. 이 소설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등잔 밑이 어둡다' 혹은 '업은 아이 삼년 찾는다'인 것 같다.

 

 

* 병 속에서 나온 수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폭풍에 휘말려 스웨덴인과 둘이 난파선에 남은 화자가,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괴상한 배를 만나 요행히 탑승한 후 벌어지는 관찰일기.

 

  p.61.

 

  머리 바로 위의 까마득하게 높은 곳, 물의 절벽 가장자리에 약 4톤쯤 되어보이는 거대한 배가 떠 있었다.

 

  이 배는 기묘하기 짝이 없다. 선원들은 모두 어처구니 없을 만큼 늙었고, 화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배는 거친 풍랑과 함께하는데, 그 이유를 화자는 어렴풋이 '조류를 타고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읽으면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선장> 전설이 좀 생각났다.

 

  관찰일기라고는 하지만 화자는 짤막하게 자신의 감상을 덧붙여놓을 뿐이다. 따라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어렴풋한 두려움과 궁금증만이 글에서 전해져 온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떨어진다!"이다. 이 문장을 보고 한참을 갸웃거렷는데, 달려있는 주석을 보니 극지방에 도착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표현한 듯 하다.

 

  잘 알 수 없는 단편이다.

 

 

* 밸더머 사례의 진상

 

  p.76.

  지난 3년 동안 나는 최면술에 흥미를 갖고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9개월 쪽 전에 퍼뜩 깨달았다. 지금까지 시행된 일련의 최면술 실험에는 극히 중대하고 변명하기 심든 결락이 있다. '임종의 순간 articulo mortis'에 최면술이 시행된 전례가 없지 않은가.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화자는 어니스트 밸더머 씨의 동의를 받아, 그의 임종의 순간에 최면을 걸기로 한다. 이 시도는 성공했고, 밸더머 씨는 죽어갈 때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거의 7개월에 걸쳐서 최면 상태에 걸려 있었다.

 

  최면에 걸린 채 죽어있는 상태로 말을 하는 밸더머 씨의 모습은 추가적인 설명이나 사건이 없어도 충격적이고 기괴한 느낌을 주며, 그래서 공포스럽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거기 있는 것 만으로 공포를 주는' 존재가 있는 법이고, 죽은 채로 살아있는 밸더머 씨가 그런 존재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안락사 문제가 생각났다. 안락사에 관해 떠도는 몇 가지 이야기가 밸더머 씨의 사례와 겹치면서, 과연 어떤 게 옳은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p.88.

 적어도 지금까지 죽음(또는 통상적으로 죽음이라고 불리는 것)이 최면작용에 의해 중단되었음은 명백했다. 따라서 밸더머 씨를 각성시킨다면 그를 곧바로, 아니면 적어도 급속하게 사멸로 몰아넣으리라는 점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p.89.

  "밸더머 씨, 당신이 지금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마자 예의 소모열 홍조가 두 뺨에 돌아왔다. 혀가 떨리는, 아니, 입 안에서 몸부림치듯이 우믹이는 것이 보였고(턱과 입술은 예전처럼 경직된 상태였지만) 마침내 앞에서 이미 묘사했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제발 부탁이야! ......빨리! ......빨리! ......나를 다시 잠재워 줘...... 아니면, 빨리! ...... 나를 깨워 줘! ......빨리! ...... 이봐, 나는 죽었어!"

 

 

* 군중 속의 사람

 

  D호텔 카페테라스에 앉아 군중을 관찰하던 화자가, 일반 사람과 다른 표정을 가진 65-70세 가량의 노인을 미행하는 이야기. 노인은 군중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다.

 

  이 소설의 대부분을 묘사가 차지하고 있는데, 묘사가 생생해서 마치 그 거리에 내가 있는 것처럼 상상해 볼 수 있다. 사람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인은 불안해 보이고, 아무 생각 없어보이기도 하고, 뭔가를 하기 위해서인 것 깉기도 한데,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다. 그래서 왜 그런지 궁금하다. 노인이 군중을 찾는 이유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데, 그래서 이 글은 꽤 기묘한 느낌을 풍긴다.

 

p.108.

 

"저 노인은,"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심원한 죄악의 전형이자 보닐이었어. 혼자 있기를 거부해. 그는 군중 속의 인간이니까 말이야. 더 이상 쫓아가봐도 소용없어. 그래보았자 그나 그의 행동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마음은 <영혼의 동산> 이상으로 속악한 책이고, 이것을 '읽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마 신의 가장 큰 은총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포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도시 풍경이 그다지 크게 바뀌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실제로 비교하면 꽤 바뀌었겠지만 도시 특유의 분위기랄까, 사람들이랄까, 그런 것들은 비슷한 것 같다. 그 때문인지, 군중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인도 내가 사는 도시에서 한둘 쯤 발견할 수 있을 것 깉기도 하다.

 

 

* 함정과 진자

 

p.111

  죄 없는 사람의 피에 굶주린 불경한 고문자들이

  여기서 끊임업는 증오와 분노를 조장했지만

  이 죽음의 굴이 파괴된 지금 조국은 안전해졌고

  잔혹한 죽음이 있던 곳에는 생명과 구원이 있노라.

 

-파리의 자코뱅 클럽 회관이 있던 자리에 건립될 시장의 문을 위해 쓰인 사행시- 

 

  처음부터 이게 현실인지 환각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된다. 화자의 말에 의해 그가 재판을 받았고 뭔가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는데, 이는 스쳐지나가듯 나올 뿐이다. 선명하게 묘사되는 것은 그가 받는 형벌이다. 그 형벌은 꽤 기묘하다(랄까, 좀 납득할 수 없는 방법이다). 한번에 죽이는 게 아니라 말려 죽인다는 표현이 걸맞은 방법들이 등장한다.

 

  처음에 화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감옥에서 그 안을 가늠해보려다가 함정에 빠질 뻔 한다. 그 함정은 아래로 뻥 뚫린 구멍이다. 그 함정을 피한 뒤 깨어나자, 사방에 불이 밝혀져 있고 몸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위에는 진자를 그리며 내려오는 반원형 칼이 있다. 간신히 그 칼에서 벗어나자 방이 마름모꼴로 납작해지면서 불타는 벽이 점점 그를 향해 다가온다.

 

  이 형벌들은 높은 공포를 선사하는데, 치명적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형벌이라기보다는 그의 힘과 지혜를 시험해보는 모양새인데, 희망이 없어보이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결말이 희망적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또한 갑작스러워서 과연 그가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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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1인칭 화자. 모두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글에 적어놓은 형태. 화자의 말을 듣는다기보다는 화자가 적어놓은 글을 나중에 발견해 읽는다는 느낌이다. 포의 묘사력을 볼 수 있는 단편이 많아 신선했다.

 

 

201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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