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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책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정신이고 하나는 물질이다. 물질의 개념으로 보면 책은 잉크로 글자가 적힌 한 뭉치의 종이에 불과하다. 정신의 개념으로 보면, 책은 사람이 표지를 여는 순간 글자를 통해 무한히 영역을 확장하여 세계의 일부를 보여주는 특별한 과정이다.
책의 신비로운 점은,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똑같은 책을 동시에 읽는다 해도 결코 진정한 ‘같은 책’을 읽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을 통해 재탄생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물질이라기보다는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굉장히 형이상학적인 대답들이 돌아온다. ‘잉크로 글자를 적어놓은 종이뭉치’라는 대답을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책에 대해서 적을 것이다. 내가 읽은 책들과 읽지 않은 책들과 숨어있는 책들과 사라진 책들과 존재하지 않는 책들과 소문의 책들과 잊어버린 책들과 드러난 책들과 미래에 나타날 책들과 미움받은 책들과 사랑받은 책들과 쫓기는 책들과 죽은 책들과 버려진 책들과 파괴된 책들과 망가진 책들과 부서진 책들과 불탄 책들과 젖은 책들과 파먹힌 책들과 도둑맞은 책들과 팔린 책들에 대해서 적을 것이다. (p.13)
실제로는 책이 시작하고 약 10p 정도 지난 뒤에 나온 구절이지만, 나는 이 부분이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사람이 나오지만, 그들은 모두 책에 의해서 휘둘린다. 모든 사건은 책에 의해 일어나고, 책에 의해 진행되며, 책에 의해 마무리 된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의 독특한 점은, 이 과정에서 책의 신성함을 부정하고 철저히 물질적인 단계로 끌어내렸다는 점이다.
이 책은 재미있게도, 책이 죽은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차 도서파동이 지나간 후, 책들은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은 분서축제를 계획한다. 모든 출판물은 검열당하고 책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세계, 그 세계에서 의미 있는 것은 고서들과 희귀본들이고, 그것들은 거액에 거래된다. 책은 읽는 책이 아니라 소유하는 책이다. 물질이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책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관심이 있는 것은 그 책을 소유할 수 있는가 혹은 아닌가이다. 또는, 그 책이 ‘무언가를 얻는 데’ 필요한가, 혹은 아닌가이다. 그들은 책의 저자, 판본, 내용, 역사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그 책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 아니고 돈벌이의 수단이다.
‘소유하는 책’. 이 말에는 일견 거부감이 느껴진다.
일단 나는, 사람이 읽어야만 책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책은 나를 떠나면 다른 누군가에게 읽힐 기회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내 생각대로라면, 내가 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내가 읽은 책을 남에게 모두 건네주는 것이다. 그 책은 내 손을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로 여행을 갈 테고, 아주 많은 의미를 가진 뒤에 어딘가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책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해도 그 책이 내 손에 있기를 바란다. 그러니 나는 책을 어느 정도 ‘소유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책을 끌어안고 있으면 책에 발이 묶이게 돼. 책은 읽으면 버려야 되는 거야. (p.168)
반디의 친구인 제롬은 반디에게, 자신이 찾아다니고 결국 소유한 책들을 언젠가 다 처분할 거라고 말한다. 한 권도 남김없이. 그리고 그 뒤에 다시 모을 거라고 덧붙인다.
반디는 책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이 책의 끝에서 반디는 자신의 모든 책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반디는 마지막에 누군지 모를 사람이 보낸, 타다 만 책(그동안 반디가 줄곧 찾아다녔던 <또다른 찰리 이야기>)을 손에 넣고, 자신이 언젠가 책 사냥꾼이 다시 된다면 두 권의 책(자신이 직접 쓴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와 방금 손에 넣은 <또다른 찰리 이야기>)을 시작으로 하겠다고 생각한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얼핏 보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어지럽게 널린 책들에 의해서 어지럽게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흐름을 짚어보면, 이 책은 ‘찾고-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찾는’ 도식을 가지고 있다.
찾고,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찾는다. 이 반복을 보고 있자면 마치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 든다. 찰리도, 반디도, 제롬도, 윤선생도, 윤노인도 모두 미로 속을 헤매고 있다. 밤하늘의 별들보다 많은 책들 사이에서.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책의 미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찾으려고 미로를 헤매는 걸까? 세계의 책?
저자는 이 책을 미로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거짓들을 만들어낸다. 반디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모습 이면에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언급되는 책들은 실존하는 책과 환상 속의 책들이 뒤얽혀 있다. 배경이 한국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풍기는 느낌은 오히려 환상적인 책의 세상에 가깝다. 책의 미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찾고,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찾는 책들에 대해서 기록한 ‘안내서’를 남기는 것뿐이다.
나도 한 때 책 사냥꾼이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찾는 책은 두 권이었는데, 절판된지 시간이 꽤 지나서 찾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 서점, 오프라인 서점, 출판사에서도 재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중고책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온라인 중고책 시장은 매물이 거의 없었다. 헌책방에 가 보았지만 켜켜이 쌓여있는 책들의 산을 뒤질 용기가 나지 않아 물러났다. 다행히 찾던 책 중 한 권은 찾기 시작한 지 일 년이 채 안 되어 재판이 되어 내 품에 안겼다. 다른 한 권은 아직도 구하지 못했지만.
여기까지 생각하니, 나는 정말로 책을 물질로 보고 있지 않은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책을 물질로 보는 데에는 거부감이 든다. 그러나 책이 정신이라면, 절판된 책을 굳이 찾아다니지는 않았을 거다. 그 책은 이미 내가 한 번 읽은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비록 희귀한 책을 찾아다니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책 사냥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소유한 책 목록을 보니 그 생각이 한층 강해진다. 나에게는 읽어보고 싶은 책, 그리고 내 책장에 꽂아 넣고 싶은 책의 목록도 있다. 나는 책 사냥꾼인가? 다시 질문해보았다. 그렇다. 한때 그런 게 아니라 지금도 나는 책 사냥꾼이다. 나도 찾고-소유하고-잃어버리고-찾는, 책의 미로 속에 있다. 그렇다면 나도 세계의 책을 찾아야 이 미로에서 나갈 수 있는 걸까.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단호하게 말한다.
네가 찾는 그런 책은 이제 세상에 없어. (p.206)
내가 생각해도 세계의 책은 있음직하지 않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의 내용을 담고 있다니, 그것은 세계 자체이거나 혹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일 것이다. 세계도 신도, 한낱 인간이 소유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다. 게다가 실체도 없다. 다시 말하면 정신이다. 그런 것을 어떻게 물질로 치환하여 소유할 수 있을까? 죽을 때까지 혹은 자신이 가진 모든 책을 포기할 결심이 설 때까지 책의 미로에서 헤매 다닐 수밖에.
그러나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에서 책 사냥꾼들은 마지막 순간 ‘안내서’를 남긴다. 세계의 책을 포기하지 않고 말이다. ‘안내서’는 자신이 찾아다닌, 소유한, 잃어버린, 찾는 책들의 목록이다. 그것은 책 사냥꾼의 책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기도 하다. 책 사냥꾼의 안내서는 책의 미로를 헤매 다닌 결과물인 동시에 책의 미로로 다시 안내하는 안내서이다.
책의 역사.
이 단어를 곱씹다 나는 내 독서기록장을 떠올렸다.
2008년부터 나는 내가 읽는 책들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읽게 됐는지, 어떤 점이 좋았는지, 어떤 점이 별로였는지, 뭐가 특이한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줬는지, 그리고 또 어떤 책을 읽고 싶은지. 그 기록들은 두서가 없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어떤 책으로 시작해서 어떤 책으로 나아가는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다시 말해 독서기록장은 내가 책의 미로에서 헤맨 기록이고, 또한 내가 책의 미로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안내서이기도 하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으면서, 이 혼란스럽고 다소 장황한 이야기를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읽고 있을까, 왜 이 책 속의 세계가 이렇게 나를 끌어당길까 생각했다. 그건 이 책이 책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책 사냥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 사냥꾼이고, 책을 미로를 헤매고 있고, 안내서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내 책 사냥꾼으로써의 여정이 모든 책을 잃어버리면서 끝나지 않기를, 내가 나만의 세계의 책을 완성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 ‘안내서’를 쓰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될 수 있다면, 반디가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책 사냥꾼이 되기를, 그래서 책의 미로를 헤매는 동료가 줄어들지 않기를 꿈꾼다. 그게 비록 책이 더이상 의미없고, 책 읽는 사람들이 희귀해진 세상 속이라 하더라도.
2011.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