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할 필요는 없어. 하나도 안 사랑해도 돼." 수미한테 그렇게 말한 건 민웅이었다. 마치 "그 가수 앨범의 모든 트랙을 들을 필요는 없어, 좋아하는 노래만 들어" 정도의 말을 하듯 가볍게 말했다. 민웅이가 아니면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다.

내가 왜 바로 섬유 어쩌고 안하고 스튜어디스 했는 줄 알아?"
"몰라. 다리가 예뻐서?"
그러자 송이가 예의 쫑긋거리는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 그다음에 한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여기가 싫어서."

"그래도 책은 그런 괴물들과 싸우기 위한 무기인데, 그런 채으만드는 회사들이 더 나쁘면 안돼. 그 간극은 참을 수 없어. 이런 식 으로 좋은 사람들이 다 떠나고 싸우던 사람들이 다 지치고 나면,

사람들은 ‘나 언젠가 이순간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 하고 일찍 예감한 것 같은 표정들을 지었다. 현재를 살면서 아직 오지 않은 그리움을 먼저 아는 종자들 이 특이하게 느껴졌지만, 내 주변엔 그런 이들이 많았다.

"내 생각에, 인간은 잘못 설계된 것 같아."
주연이가 말했을 때 아무도 ‘왜 또?‘ 하고 반문하지 않았다.
"소중한 걸 끊임없이 잃을 수밖에 없는데, 사랑했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걸 이겨내도록 설계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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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기는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58. 앙리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나나, 그거이 인생이야, 앙리는 뒤이어 말했다. 암세포는 아직 발견조키되지 않았던 40대 중반의 젊은 앙리는 이내 아주 엷은 미소를지어 보였는데, 그날 나는 끝내 그를 따라 웃지 못했다.

🖍28. 나는 그들의 걱정과 친절이 해외 입양인들을 향한 한국인 특유의 불편한 연민 같아서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런 연민이라면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온 생애가 소모되는 기분이었다.

🖍256. 입양인이 아닌 사람이 입양에 대한 소설을 써도 괜찮은가?‘라고 제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why not?‘이라고 되물었죠. 이 지면을 통해 제게는 그 웃음이 큰 용기가 되었음을 전합니다.

🖍258. 제게 조금이나마 자격이 있다면, 『단순한 진심은 이 세상모든 생명에 바치는 저의 헌사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저의 진심을 전합니다.
2019년 여름
조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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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밤새도록 끙끙 앓다가 문득 깨어 등이 땀으로 젖어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안도감이 들면서 친구들의 죽음을 겪었던 날 자신에게 왔던 거대하고 차가운 그것, 슬픔에 안심하던 경애가 있었다. 그리고 때론 그 모든 것을 느끼는 마음 따위는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애가 있었다.

🖍143. 그런데 그렇다면 이런 마음은 어떻게 폐기되는 건가요? 싹 다 폐기하라고 쓰셨는데구체적인 방법은 언급이 없어서요.

🖍151. 안녕, 오늘도 무사한 아침이야.
무사하다는 것은 무한과 무수 사이에서 간신히 건져올려진 낱말같아.
막막한 바다를 떠다니는 작은 보트처럼.

🖍176. 언니, 폐기 안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리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209. 그 무렵 인천에 가보면 해고된 자동차공장의 사람들이긴 행렬을 이루고 집회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느날 상수는 해고는 불가피한 일 아니야? 라고 말했다. 그즈음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며 하는 대부분의 논평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은총은 "너는 소중한 걸 잃는다는 게 뭔지 모르는구나"

🖍258. 상수가 경애를 전혀 모르던 시절에도 있던 경애스러움이라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상수가 결국 경애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라도 경애가 경애인 것은 계속되겠지. 생활을 위해 밥을 챙겨먹고 필요하면 달리고 어쩔 때는 화도 내고 울고 차갑게 뒤돌아서기도 하며 살겠지 생각하니 뭉클해졌다.

🖍268. 사람이 어떤 시기를 통과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했다. 그때도 나아간다‘라는 느낌이 가능했던가. ‘견뎌낸다‘라는 느낌만 있지 않았나.

🖍291.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한번 써본 마음은 남죠. 안 써본 마음이 어렵습니다. 힘들겠지만 거기에 맞는 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307. 생각해보면 경애가 파업 이후 회사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버틴 건, 버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멸 속으로.

🖍310. 산주가 힘을 내라는 명료한 위로를 전한 순간만은 견딜 수 없이 불행해진 기분이었다.

🖍333. 그리고 "최선을 다 해요!"라고 외쳤다. 그건 흔한 구호라서 별다른감동은 없었지만 조던이 "이미 최선을 다 했지만" 하고 유 디드 유어 베스트,라고 덧붙였을 때는 상수도 울 듯 말 듯한 얼굴로 돌아서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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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엄마는 내게 아몬드를 많이 먹였다. 나는 아몬드라면 미국산부터 시작해서 호주산, 중국산, 러시아산까지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종류는 다 먹어 봤다. [...] 그중에서도 캘리포니아산이 최고다. 이제 태양 빛을 잔뜩머금어 은은한 갈색빛이 도는 캘리포니아산 아몬드를 먹는 나만의 방법을 알려 주겠다.

🖍52. 해가 공기를 붉게 물들이면 할멈이 소주를 들이켜며 캬, 소리를 냈고 엄마는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목소리로 좋다, 하고 장단을 맞췄다. 캬, 좋다! 엄만 그 말의 뜻이 행복이라고 했다.

🖍52.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아아라아아앙, 사랑. 사랑사. 랑사. 랑사.
영원, 영원, 영원. 영.원. 여어엉, 워어어언.
자, 이제 의미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백지였던 내 머릿속처럼.

🖍94. 책의 제목은 ‘데미안‘ 이었다.
- 어쨌든 백만 원이에요.
그건 엄마의 책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엄마의 책장에 꽂혀 있던 책.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한 책. 팔지 않을 책이었다. 하필 그걸 고르다니 용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132. 할멈의 표현대로라면, 책방은 수천수만 명의 작가가 산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이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진 죽어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 낸다. 조곤조곤,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139. 그래서, 누가 그러자고 정한 것도 아닌데 학교에서 곤이와 나는 서로 모른 척했다. 말을 섞지도 눈을 마주치지도않았다. 우리는 칠판지우개나 분필처럼 그저 학교를 구성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거기서는 누구도 진짜가 아니었다.

🖍252. - 자란다는 건, 변한다는 뜻인가요.
- 아마도 그렇겠지. 나쁜 방향으로든 좋은 방향으로든.

🖍189. 책방에 이렇게 많은 책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칸칸이 꽂혀 있던 이 많은 생각들, 이야기들, 연구들, 한 번도 보지 못한 숱한 저자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들이 나와는 너무도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해 보는생각이었다. 그 전까진 그들과 가깝다고 생각했다. 비누나수건처럼,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곳에,

🖍179. - 근데 엄마, 그거 무슨 뜻인지 알고나 쓰는 거야?
할멈이 도끼눈을 떴다.
그럼!
그러더니 낮게 읊조렸다.
-사랑.
-그게 뭔데?
엄마가 짓궂게 물었다.
- 예쁨의 발견.

🖍171. 나는 운명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 거라고 말해 주려다가 그만뒀다. 그거야말로 책에서 읽은 구절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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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매일 경이를 느끼는 사람, 바깥에 대해 늘 궁금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건 즐거웠다. 경민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재생시켜야 한다고 다짐한다. 어딘가 한아 안에 4K 화질로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95.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159. 하지만 전 우주가 자본주의가 불완전하다는 생각에는동의하니까. 새로운 노력들과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이 가혹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172. 한아가 말했고 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민은 한아만큼한아의 신념을 사랑했다. 한아의 안에도 빛나는 암석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183. "가끔 지구인이라는 게 쪽팔려. 아직도 이렇게나 서로 죽이고 망치고 있다는 게."

🖍211. 다음번에는 속하게 된 곳을 더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함께 떠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224. 아마 다시는 이렇게 다디단 이야기를 쓸 수 없겠지만, 이 한 권이 있으니 더 먼 곳으로 가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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