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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시절 이야기 비룡소 클래식 62
헤르만 헤세 지음, 정여울 옮김 / 비룡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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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페이지에서 시작해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정

나는 책을 종종 뒷부분부터 펼쳐 읽는 버릇이 있다. 에필로그일 수도 있고, 역자 후기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소설의 결말일 때도 있다. 마지막을 먼저 마주한 뒤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돌아가, 그 끝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상상하며 읽어 나가는 과정을 즐기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로, 이미 아는 내용이라 책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펼친 곳은 마지막 부분이었다. 그곳에는 정여울 작가의 작품 해설이 담겨 있었는데 오랜 시간 헤르만 헤세를 사랑해 온 그의 시선으로 풀어낸 해설을 읽고 나니,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라졌다. 누군가에게 이 작품이 그토록 큰 울림과 위로, 그리고 영감을 주는 존재라면, 나에게도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작지만 분명한 빛을 건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런 마음으로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니, 읽는 시간 자체가 한층 더 밀도 있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번역의 자연스러움이었다. 이전에 접했던 판본에서는 어딘가 문장이 걸리거나, 표현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헤세를 오랜 시간 깊이 읽어 온 번역가의 언어는 확실히 달랐다. 원문의 철학적 무게를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듬어진 문장들은 부드럽게 이어졌고, 의미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읽는 내내 번역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매끄러웠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나에게 데미안을 읽고 싶다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정여울 작가의 번역을 권하게 될 것 같다.

청소년 시절 한 차례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 보니, 좋은 작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예전의 나에게 ‘카인의 후예’라는 말은 어딘가 남들과 다른 나를 특별하게 포장해 주는 매혹적인 문장에 가까웠다. 사춘기 시절의 막연한 소외감이나 정돈되지 않은 내면의 방황을 '선택받은 자의 고독'이라는 근사한 틀로 정리해 주는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카인은 나를 지켜주는 일종의 위안이자 훈장이었다.

그러나 삶의 여러 굴곡을 지나온 지금 다시 마주한 ‘카인’의 표식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카인의 후예는 단순히 기존의 질서와 통념이라는 밝은 세계를 거부하는 반항아에 머물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은 인간 안에 공존하는 빛과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처절한 '자기 신뢰'의 증표였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그 말이 더 이상 낭만적인 선택받음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새는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투쟁한다"는 구절처럼, 나를 가두고 있던 안락한 세계를 스스로 깨뜨리고 나아가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성장의 기록으로 읽힌다. 과거에는 '남과 다른 나'를 확인받고 싶어 이 문장을 읽었다면, 이제는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더라도 나의 본질을 지켜내겠다'는 단단한 나침반 하나를 품게 된다. 누구와 같아지기 위해 애쓰는 대신, 나를 믿고 걸어가는 일 자체가 곧 카인의 길임을 이제야 비로소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다시 만난 『데미안』은 더 이상 내 바깥에 존재하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내면을 비추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 되어 돌아왔다. 청소년기에는 보이지 않았던 문장 사이의 여백들이, 이제는 삶의 무게를 견디며 나아가는 나에게 힘찬 응원을 건네는 듯하다.

결국 좋은 고전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나를 마주함과 동시에 지금의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방향을 잃은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멈춰 있다면, 혹은 이미 이 책을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펼쳐보기를 권하고 싶다. 세월의 두께만큼 깊어진 시선으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정여울 작가의 유려한 번역이 안내하는 길 끝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건네오는 분명한 빛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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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헤세 #정여울 #비룡소 #서평단

📚 출판사로부터 선물 받고 읽은 후, 자유롭게 작성한 저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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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품위 -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삶의 태도
최서영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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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입니다.

최서영의 『어른의 품위』를 읽다 보면, 우리가 막연히 동경해 온 ‘멋진 어른’의 모습이 결코 화려한 수식어나 높은 직함에 있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흔히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오히려 ‘나는 나이만큼 성숙해졌는지,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주변을 지치게 하거나 관계의 선을 넘는 무례함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특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자신만의 중심을 세우는 법, 그리고 불편한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우아하게 거리를 두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들은, 관계 속에서 쉽게 소모되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현실적인 위로와 함께 실천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 책이 말하는 품위의 핵심은 결국 ‘자기 객관화’와 ‘절제’에 있다. 자신의 편견을 인정하고,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며, 일상의 사소한 습관들을 단정히 가꾸어 나가는 과정이 쌓여 한 사람의 분위기를 만든다. 그것은 단순한 인상이 아니라,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그 사람만의 품위로 남는다. 타인에게는 부드럽되 자신에게는 엄격할 줄 아는 태도, 이 책은 그 균형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어른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른이라는 이름이 때로는 버겁고 무겁게 느껴질 때, 이 책은 설교하듯 말하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는다. 남을 흉내 내는 삶이 아니라, 나만의 향기를 지닌 단단한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은 이들이라면, 이 책의 문장들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곱씹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읽는 내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드문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 돌아봄의 끝에서, 과거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든 흔들렸던 시간까지도 모두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입니다’라는 문장처럼, 나는 그 모든 나를 끌어안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른의 품위'란 결국, 그렇게 다시 걸어갈 수 있는 태도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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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
웨인 케스텐바움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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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을 이렇게까지 파고든다고?

웨인 케스텐바움의 『굴욕』을 읽는 일은, 우리가 나름 지키고 있다고 믿어온 ‘품위’라는 틀에 스스로 균열을 내는 경험과도 같다. 그러나 이 책은 굴욕을 무겁고 심각한 감정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그 민망하고 당혹스러운 장면을 비틀어, 예상치 못한 유머와 기발함으로 풀어낸다. 자아가 타인의 시선 앞에서 무너지는 찰나를 그는 지나치게 엄숙하게 붙잡기보다 슬쩍 비틀고, 때로는 장난스럽게 과장하며 독자에게 건넨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걸 이렇게까지 파고든다고?’ 싶은 당혹감과 함께 묘한 재미가 따라붙는다.

참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웃음 뒤에는 ‘맞아, 나도 저랬지’ 하는 공감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어쩌면 이 굴욕이라는 감정에 끌리는 이유도,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타인의 민망한 장면을 보며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결국 그 감정이 낯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굴욕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해부하듯 풀어내는 저자의 방식은, 다소 과장되고 엉뚱해 보이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결국 이러한 시선은 굴욕이라는 감정 자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굴욕은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릴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 감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애써 외면하면서도, 동시에 슬쩍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마치 몸에 남은 흉터처럼, 통증은 사라졌어도 그 자리를 만지작거리게 되는 심리와 비슷하다. 굴욕의 순간은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지만, 역설적으로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연약한 존재인지를 비로소 대면하게 된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그 찰나야말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가식의 벽이 허물어지고 날것의 인간미가 툭 터져 나오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굴욕이라 부르는 감정 역시 완벽하지 못한 존재로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흔적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지워야 할 결함이라기보다, 끝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본성의 일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친절하게 설명하기보다, 때로는 민망할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며 독자를 그 장면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이 책 날개에 실린 추천사를 보면 거대하고 묵직한 담론을 예상하게 되는데, 막상 읽고 나니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의외였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진지한 사유로 읽혔을지라도, 나에게 이 책은 분명 즐겁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결국 책이라는 것은 읽는 사람의 몫이니까. ^^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감추려 애썼던 굴욕의 순간들이, 사실은 꽤 쓸 만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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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치함의 심리학 - 무가치하다는 감정과 싸우는 이들을 위한 심리 처방전
네모토 기쓰오 지음, 최주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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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스스로를 하찮게 여길까?

분명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이유 없이 스스로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남과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어느새 기준은 타인에게 가 있고, 그 기준에 못 미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마음은 점점 움츠러든다. 대체 이 뿌리 깊은 열등감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집어든 『무가치함의 심리학』은 익숙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웠던 감정을 ‘무가치함’이라는 이름으로 짚어낸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양육 환경에서의 경험이나 타고난 기질과 같은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이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못하면,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 죄책감이나 자기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책 속에서는 무가치함의 근원을 짚어가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는데, 마치 내 삶을 비추는 거울 같아 마음 한구석이 자꾸 불편해졌다. 어린 시절 해결되지 못했던 감정들이 지금의 나를 여전히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돌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동시에 내가 왜 스스로를 낮게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이 반복해서 외면당했던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그중 몇 가지는 단순한 조언을 넘어, 삶을 실제로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삶의 기술로 다가온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제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뿐이다. 자기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217쪽) 이 부분은 특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타인의 마음이나 이미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는 지금의 내가 분명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던 나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삶 역시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다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또한 부정적인 사고는 그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그 영향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다(255쪽). 기분이 가라앉거나 마음이 흔들릴 때, 잠시 멈춰 서서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그 짧은 순간이 이후의 생각은 물론, 나아가 행동까지 바꿀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렇게 잠시 멈추는 시간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데, 그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멈춤은 부정적인 사고를 가라앉히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변화의 시작점이 되어줄 것이다.

네모토 기쓰오의 『무가치함의 심리학』을 읽으며 묻어두었던 감정과 다시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 감정의 실체를 따라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더 이상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이미 충분히 애써왔고, 나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삶을 스스로 살아내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고통이 시작되는 곳을 알게 되니, 행복이 오는 곳 또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이유 없이 마음이 무겁고 자신을 자꾸 낮추게 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그 감정을 이해하는 동시에 존재의 가치를 다시 되찾게 해주는 따뜻한 처방전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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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 뇌전증 진단 이후, 천천히 일상을 다시 걷다
보보 지음 / 미다스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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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걸음으로 발견한 단단한 삶의 여정

우리는 대개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던 일상의 풍경이 어느 날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이면을 마주하게 된다. 보보 작가님의 첫 번째 기록인 이 책은 바로 그렇게 일상이 낯설어진 순간에서 시작된다. 멈춰 선 듯 흐르던 시간 속에서, 예상치 못한 질병 앞에 놓인 삶은 속도를 잃는다. 하지만 그 시간을 원망하기보다, 그 느려진 틈 사이로 스며든 다정함과 긍정 속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서서히 달라진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뇌전증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떠올리던 극단적인 발작의 이미지와는 달리, 뇌전증 역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그 안에서 겪는 고통 또한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단편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었는지도 함께 돌아보게 된다.

저자는 치료와 재발을 반복하는 고통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끝을 알 수 없는 불안은 누구에게나 절망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지만, 그 시간을 버티며 오히려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보통 상황이 변하고 몸이 아프면 마음 또한 흔들리기 쉬운데, 오히려 타인에 대한 연민과 다정함으로 마음을 채워가는 모습이 너무나 뭉클했다. 몸은 이전보다 조금 약해졌을지라도, 그 과정을 견디며 쌓아온 내면은 한층 깊어졌을 거라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바라보고,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글귀인데, 이 문장을 만난 순간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늘 같은 풍경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볼 여유를 잃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고백처럼, 평범했던 하루가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 삶은 다른 빛을 띠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거창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걸을 때 익숙한 일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특별한 변화를 요구하기보다 지금의 순간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첫 기록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만큼 밀도 있게 다가오는 이 책은, 누구에게나 불현듯 찾아오는 약해진 순간에 조용히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는 이야기이다. 삶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 기록은, 읽고 나면, 평범했던 하루가 어느새 조금 다른 빛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저자의 다음 이야기들이, 이 느린 걸음처럼 조용히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 출판사로부터 선물 받고 읽은 후, 자유롭게 작성한 저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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