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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
웨인 케스텐바움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3월
평점 :
-굴욕을 이렇게까지 파고든다고?
웨인 케스텐바움의 『굴욕』을 읽는 일은, 우리가 나름 지키고 있다고 믿어온 ‘품위’라는 틀에 스스로 균열을 내는 경험과도 같다. 그러나 이 책은 굴욕을 무겁고 심각한 감정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그 민망하고 당혹스러운 장면을 비틀어, 예상치 못한 유머와 기발함으로 풀어낸다. 자아가 타인의 시선 앞에서 무너지는 찰나를 그는 지나치게 엄숙하게 붙잡기보다 슬쩍 비틀고, 때로는 장난스럽게 과장하며 독자에게 건넨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걸 이렇게까지 파고든다고?’ 싶은 당혹감과 함께 묘한 재미가 따라붙는다.
참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웃음 뒤에는 ‘맞아, 나도 저랬지’ 하는 공감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어쩌면 이 굴욕이라는 감정에 끌리는 이유도,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타인의 민망한 장면을 보며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결국 그 감정이 낯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굴욕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해부하듯 풀어내는 저자의 방식은, 다소 과장되고 엉뚱해 보이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결국 이러한 시선은 굴욕이라는 감정 자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굴욕은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릴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 감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애써 외면하면서도, 동시에 슬쩍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마치 몸에 남은 흉터처럼, 통증은 사라졌어도 그 자리를 만지작거리게 되는 심리와 비슷하다. 굴욕의 순간은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지만, 역설적으로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연약한 존재인지를 비로소 대면하게 된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그 찰나야말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가식의 벽이 허물어지고 날것의 인간미가 툭 터져 나오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굴욕이라 부르는 감정 역시 완벽하지 못한 존재로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흔적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지워야 할 결함이라기보다, 끝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본성의 일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친절하게 설명하기보다, 때로는 민망할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며 독자를 그 장면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이 책 날개에 실린 추천사를 보면 거대하고 묵직한 담론을 예상하게 되는데, 막상 읽고 나니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의외였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진지한 사유로 읽혔을지라도, 나에게 이 책은 분명 즐겁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결국 책이라는 것은 읽는 사람의 몫이니까. ^^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감추려 애썼던 굴욕의 순간들이, 사실은 꽤 쓸 만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