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時의 사랑
박경범 지음 / 은범상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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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66년 대한민국이 그 정체성을 잃고 중국에 합병되려하는 이야기를 그린 미래가상소설 〈사라진 민족〉이 있다. 그리고 청년과 중년여성의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그린 〈허시의 사랑〉이 표제작이다.

수록작품은 총12편으로서 사라진 민족, 虛時의 사랑, 외계인X, 神의 소리, 짧은 사랑 긴 이별 영원한 合一(의사 장기려의 순애보), 사랑과 容恕, 세상과 나, 적자생존, 사랑의 正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겨울 手記, 인생의 벽 等이 있다.

작자의 초기 작풍(作風)인 ‘환상과학’ 등 다양한 소재가 있다가 후반에 들어 일반적인 ‘자술(自述)’풍의 단편소설들로 마무리 되고 있다.

특히 80년대 이후 명맥이 끊어졌던 세로쓰기 조판을 채택한 것이 이채롭다. “그렇게 내면 누가 읽겠느냐”는 주변의 우려에 작자는 “어차피 고급독자만이 소화할 내용들인데 우리 문화의 위기에 관하여 할 수 있는 한 깊은 메시지를 내어, 위축되어가는 이 땅의 지성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싶은 것이 작품활동의 목적”이라고 답한다.

허시의사랑 읽기

虛時의 사랑 山莊의 아침해도 中天으로 떠오르고 있다. 거실 깊이 들어오던 햇살도 이제 창문께 조금밖에는 비치지 않는다. 소설가 車惠靜은 오늘도, 가족과 떨어져 이 곳 먼 교외에 자리 잡은 자신의 집필실을 겸한 산장에서 아침을 맞았다. 조금은 늦은 기상시간 이후의 여유를 갖기 위해 그녀는 거실 한가운데의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찻잔과 받침접시가 있고 그 모습은 그대로 상하 대칭으로 매끄러운 탁자 면에 반사되어 보였다. 그녀는 가만히 찻잔을 들었다. 방금 타놓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탁자 위에 놓고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유리면에 반사된 빛이 그녀의 안면을 올려 비추니 좁고 고른 懸垂線과 같은 아래턱의 윤곽과 그 위에 도톰히 두드러진 입술의 윗그림자가 코끝을 정점으로 강조되어 보였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이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에 너울거리며 한 올 한 올 순간순간 희뿌연 광택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의 양 눈썹은 흡사 碧空을 나는 바닷새의 두 날개처럼 아래쪽을 머금는 모양으로 살짝 휘어 좌우로 펴져 있었고, 바로 그 아래는 역시 선대칭 유선형의 배치로 양 눈이 자리 잡아 있었다. 그 가운데로 내리 뻗은 콧날은 정확하게 양 눈과 눈썹의 중심선을 통과하며 곧게 솟아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미인이라 해도 좋을 듯싶었다. 요즘은 사람의 얼굴 모습도 영상처리를 해서 뜻하는 대로 바꾸어 볼 수 있다는데, 웬만한 사람의 모습을 놓고 본다면 여긴 이렇게 저긴 저렇게 하면 더 나은 모습이 될 것이라고 금방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첨단기술을 이용한다 해도 더 나은 그림을 만들 뾰족한 數法이 떠오를 여지가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녀를 미인이라 인정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떤 다른 기준으로 본다면 그녀의 畵像도 조금 고칠 곳이 있다. 눈가와 입가의 잔주름을 지우고 양 볼을 보다 팽팽하게 당기면 각각의 텔레비 방송에서 비싼 값을 주고 내보내는 여느 간판 얼굴들에 비해 빠질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잃는 것이 있다. 그녀 앞에 마주 앉아 자기의 지나온 이야기를 조금은 感傷的으로 털어놓고, 그 중에 어떤 것은 인간으로서 공통의 관심사이기에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진지하게 묻고 싶은 충동⁝ 그러한 마음을 불러 끌어당기는 힘은 변형된 화상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아침잠을 깨우기 위해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상태였다. 얇은 紫色 블라우스와 흰 홑치마만을 걸치고 초여름의 서늘한 아침 산바람을 아직도 젖은 기가 있는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서울 건너편 저 쪽에 따로 살고 있다. 주말마다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 외에는 줄곧 이곳에만 머물렀다. 가족에게는 글을 쓰기 위해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몸가짐으로 자기의 삶을 지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제 아이들도 굳이 어머니가 옆에서 봐주어야 할 때가 지났고 남편도 사회에서 쌓아올린 지위로 말미암은 공사다망한 일과로 인하여 될 수 있으면 가정이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이 나은 형편이다. 분업화된 사회에서는 부분적인 역할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따로 두는 것이 효율적이다. 이제 주부로서의 역할 중 아직 남은 일부는 돈을 받고 집에 들르는 사람이 대신하면 된다. 부가가치가 떨어지는 일로 굳이 집에 상주할 필요는 없다. 주부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최소한의 역할은 주말마다 가족을 만나러 감으로써 보충하면 된다. 다시 그녀는 고개를 안쪽으로 돌려 나머지의 커피를 마셨다. 반쯤 마시고는 다시 탁자 위에 찻잔을 놓으려 할 때쯤이었다. 거실 한 구석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자리를 일어나 전화기 옆에 다가갔다. 무선 수화기를 빼들고 다시 그대로 먼저 앉았던 자리로 돌아왔다. 가만히 앉아서 차분하게 자기의 목소리를 보내려 하는 것은 그녀의 자연스런 습관이었다. 수화기에서는 한 청년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차혜정씨 댁입니까?』 『예, 전데요. 어디십니까?』 어떤 전화인가 이 순간 짐작되고 기대되는 것이 있다. 모 문예지인데 선생님의 작품을 게재하고자하니 석 달간의 기한을 두어 중단편 소설 하나를 청탁한다고 한다면 기본일 테고, 모 출판사인데 선생님이 지금 장편소설을 집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연락을 하니 미리 계약을 맺고 싶은데 선인세 이천만원 정도면 만족하겠냐는 것이라면 한 건을 건진 것이라 하겠다. 『저, 그냥 선생님의 독자인데요.』 조금 맥빠지는 것이었다. 이제 막 일어나 작업을 시작하려 하는데 앞으로 전화에서 나올 얘기는 그다지 자기에게 보탬되는 것은 아닐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물론 독자는 고객이고 독자 없는 작가는 있을 수 없겠으나, 전화까지 하는 열성 독자 하나보다는 그냥 책 한 권 사 훑어보고 집안의 책꽂이에 꽂아 넣는 독자 열 명이 나은 것이다. 『그런데요.』 「그런데 용건이 무어냐」는 뜻이 억양에 배어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녀 특유의 차분한 어조는 잃지 않도록 배려한 소리였다. 잠시 동안 전화 안에서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어서 말하고 끝내라 하고 싶었으나 답답함을 참고 그대로 있었다. 다시 전화 속의 청년은 말을 이었다. 『방금 전까지도 憧憬의 대상이었던 분을 직접 목소리를 듣게 되니 꿈만 같습니다.』 그리고는 이윽고 자기의 소개를 했다. 『저는 이번에 새로 책을 낸 작가인데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야 좋지요. 감사해요.』 『어디 나가시는 곳은 없습니까?』 전화 속의 청년은 그녀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 나가는 곳도 없을뿐더러 생면부지의 그를 위해 시간을 내어 만날 이유도 없다. 『그냥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곧 봐드리지는 못할 거예요.』 『괜찮습니다. 받아 보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통화는 곧 끝이 났다. 그녀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고 다시 탁자 앞에 앉아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 한 동안 더그 자리에 앉아 거실 유리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수풀이 아담하게 우거져 있고 그 너머 아래로는 멀리 도심의 시가지가 보이는 것이 꽤 좋은 전망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저 앞의 산장 진입로 부근에 공사장이 생겨 경관을 망치고 있다. 지금 시뻘겋게 땅 파헤치고 우중충한 가건물 올려놓은 모양도 그렇지만 공사가 끝나 어떤 건물이 들어선들 먼저의 수풀보다는 못할 것이 뻔했다. 꼭 그런 건물을 자꾸 지어가야만 우리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갈수록 더 잘 살게 된다고들 하는데 자꾸 저런 원하지 않는 건물이 늘어나야만 하는 것이 어떻게 잘 산다고 할 수가 있을까. 그러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순전히 자기의 관점에서 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세든 이 아파트도 밖에서 보면 역시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나아 보일 것이 아닌가. 이 날은 더 이상 그녀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전화는 오지 않았다. 이틀 후 차혜정은 한 소포를 받았다. 안에는 붉은 색 표지의 책 한 권과메모쪽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책을 집어 서재의 책꽂이 안쪽에 있는 책 무더기에 쌓아놓으려고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바닥에 앉아 책을 펴 보았다. 책의 앞에는 줄거리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것은 초월적인 생명력으로 사랑을 실현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였다. 그 여인은 일생 동안에 수많은 남자를 거치면서도 전혀 쇠락하지 않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동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아름다움이 서서히 사위어가는 듯한 느낌에 하루하루를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보내고 있는 그녀로서는 현실을 넘은 理想의 이야기에 한 번쯤 빠져들어 보고 싶었다. 그녀는 오후의 나른한 시간을 이용해서 이 책을 이틀에 걸쳐 다 읽었다. 그 다음 날 다시 그 목소리의 주인공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먼저 번의 소포는 잘 받으셨습니까?』 『받았어요. 재미있더군요.』 『감사합니다. 저는 당신의 아름다움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글을 보냈습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전화로 듣는 목소리도 참으로 맑고 고우십니다. 그러한 한 존재가 언제까지나 있어주지 못한다는 현실이 원망스럽습니다.』 한 번의 인사치레로 끝날 듯한 전화 속의 목소리는 점차 깊이 있는 소리를 내려는 것 같았다. 『새삼스레 그런 생각은 왜 하세요? 사람이란 다 그런 거 아녜요? 언젠가는 누구나 자기의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요?』 『글쎄요? 사람은 언젠가는 물러간다⁝ 어떤 식상한 권력자의 생물학적 소멸 같은 것은 기다려지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경우에는 「이윽고 소멸」이라는 것은 정말 애통합니다. 최근 당신의 책을 보았습니다. 이제까지 많이도 책의 서문을 써오곤 하며 살아왔으니 아마 앞으로는 얼마 더 기회가 없으리라는 말씀. 그 말을 읽고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당신의 갖추고 지닌 그 모든 것도 그리 멀지 않은 날에 해체되어야 한다니⁝ 너무도 매정한 것이 이 자연의 현실입니다.』 목소리의 거침없는 진행에 그녀는 당혹하면서도, 문득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아요. 사람은 살아가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인격이 성숙하게 돼요. 그 도가 다다라서 더 이상 이승에 머물 의미가 없을 때 육체를 떠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저도 영혼불멸을 믿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겠지요. 그러나 이번의 당신과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현재 빚어져 있는 그릇에 담긴 그대로의 당신의 영혼을 원합니다.』 『그렇게도 내게 친분을 가지고 있나요? 그런 염려와 아쉬움까지 해줄 정도로 나와 친하다고 생각되세요?』 차혜정은 대화의 급진전이 일견 불안하여 제동을 걸고 말았다. 청년은 더 이상 말을 늘이지는 않았다. (이하 계속) (1996.7.作 〈계간 서울문학 2019년 겨울호〉)


허시의사랑 일러스트 챗지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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