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관건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 뛰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찬찬히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것.
피곤하게 살기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속지 않고 즐겁게 사는 일만이, 우리의 관건이다.
어차피, 지구도 멸망한다.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그렇다 할 거 없는 내 인생도 평범하기 그지없어,
프로의 세상에서 보면 당연히 퇴출감이다.
하지만 나도 내 나름의 내 우주를 가지고 있는 이상
나란 인간의 존재가치는 충분할진대
이 놈의 경쟁세상은 느긋한 나를 핫바지 취급하려 든다.

그 옛날 내가 걸음마를 하고 돌아다닐 때쯤 나타났다가
내가 한글을 뗄 무렵 홀연히 사라진 한 야구단이 있었다지.
<슈퍼스타 감사용>이란 영화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된 그러그러한 야구단은
사실은 그저 1할 2푼 5리의 꼴찌구단에 불과했을지언정
프로가 되기를 종용하는 세상에 조롱섞인 펀치를 날리고
위용당당하게 프로야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전설의 슈퍼맨들로
작가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났다.
무릇 작가의 힘이란, 인간의 상상력이란
그런 것이다.

스포츠와 인생,
프로 대 아마추어와 부유층 대 중산층,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쟁은 어느 곳에나 있고
어느 곳에서든 낙오자는 발생한다.
한발짝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예를 들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클립턴 행성에서 바라본다면
이 지구에서 바글바글 서로 치고박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존재란 얼마나 하찮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얼마나 짱구를 굴리는 하찮은 도토리들에 불과한지
아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문제인데
도대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스스로를 학대하고 다그치며
숨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살아가야 하느냔 말이다.

소설의 내용 중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말은
우리는 저마다 지닌 '소질'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속할 '소속'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다.
... 아... 우울해 진다.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의 여부가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과 환경이라는 사실.
물론 소폭의 조정의 여지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선천적인 특혜는 암만 뒤꽁지가 타들어가도록 뛰고 달려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회는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고
그러한 현상은 바로 '미국의 프랜차이즈화 사업의 일환'이라고
이 소설은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이런. 또...
문제는 미국이란 말인가.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나면 세상은 그만큼 내게 여유롭고 넉넉한 곳이 된다.
미국의 속셈을 알게 되었다면
그들의 음모에서 벗어날 순 없어도 적어도
초연해 질 순 있다.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저.. '나의 우주'를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방주에 꼭 내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넣으며
그렇게 칠팔십년 쯤 항해하다 어느 날 우주로 승천하면
그 뿐인 것이다.

진정 아름다운 소설이다.
누군가를 짓밟지 않아도, 누가 나를 추월해 달려나가더라도
나는 언제든 웃으면서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흐뭇함과 용기를 주다니.
박민규의 소설은 항상 지극히 참담한 현실을 그리다가도
항상 비현실적인 믿음과 자기암시로부터 구원을 받는 걸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어차피 현실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마인드 컨트롤은 얼마든지 나 하기 나름이니
내가 하기에 따라서 나는 얼마든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테니.

프로야구 시즌의 우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이 창단의 목표였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소박한 -모든 것을 초월한- 정신은
후세에 길이 보존되어 찬양받아 마땅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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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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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8일 

 

한비야...
오지만 골라서 여행을 다닌다는 '바람의 딸'로 유명한 분.
당최 게으른 나로서는 그런 치기를 (그렇다. 적어도 얼마전까진 '치기'로 보였다.) 이해할 수 없었고
요즘들어 부쩍 서점에 차고 넘치는 그렇고 그런 여행기를 적은 책들을 굳이 돈주고 사서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
길이 있었기에 걸었고 오고가는 모든 사람들이 내 이웃이었으며
하늘이 나의 이불이고 땅이 요가 되었다는 .. 그런 내용이 아니라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달려간 급박한 재난구호 현장이었다.
전쟁, 천재지변, 기아, 정치&종교 분쟁 등으로 얼룩진
세계의 구석구석,
그리고 거기에서 희생되는 어린 아이들.
그것으로 인해 인류의 장래가 어두워 지지나 않을까 라는
정말로 당연한.. 세계인 중의 한명으로서의 고민과 눈물,
그리고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기는 기쁨과 긍지.
모든 것들이 그녀의 피를 끓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책으로 나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저 그렇게 살다 가는 70평생이 수두룩한 반면
그렇게 남들이 평생 생각해 보기도 힘든 뜻깊은 일을 하며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
얼마나 비겁한 청춘인가.
내가 그토록 염원하는(아무도 모르겠지만 정말 염원하고 있다.) 세계평화과 빈민구제.
그것을 위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아무것도 . 정말로 단 한 가지도 없다.
하다못해 나도 몸이 부서져라 일할테니 제발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쓴다 해도
그들에게 필요한 건 무모한 호기심이 아니라
체계적,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 전문가다.
전.문.가.
내 직업도 좋게 말하면 전문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만
세상에 어느 긴급구호현장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네팔에서, 이라크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총알이 날아다니고 에이즈가 창궐하고 시체가 도처에서 썩어가는 현장에서
그 누가...
영화 온라인 마케터의 손길을 필요로 하겠느냔 말이다.
(흑.. 이것이 나의 고뇌의 근원.)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서 살아왔는지
나 스스로를 튼튼한 울타리에 가두기 위해 애쓰며 아둥바둥 살아왔는지
다시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거칠고 넓은데
정말 티 안나게 살살 살다 죽기엔 너무 부끄러운 일이 아니냔 말이다.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게 만들었다.
원래 후회같은 거 잘 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내 20대가 모래바람처럼 허무하게 느껴졌다.

다시 한번 스무살처럼 꿈꾸자.
아직 늦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가슴이 뛰는 일을 ..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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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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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때 4년 정도 살았던 곳은 미군부대 정문과 바로 마주한 작은 '가겟집'이었다.
종종 군복을 입은 흑인,백인들이 우리 가게에 찾아와 '시거'를 찾곤 했었다.
가끔 엄마 대신 가게를 보던 내가 그들을 상대로 유일하게 하는 건
그들이 '하우 머치?'하고 물을 때 물건 값을 계산기에 찍어 그들에게 들이미는 것이었다.
그 때 내가 이상하게 여겼던 건 크리스마스 때면 술에 취해 동네 시끄럽게 캐롤을 부르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는 거다.
어느 집 아무개 아저씨가 미군과 싸움이 붙어 맞았다더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어느 날 밤사이 옆집 이불가게 창이 깨졌는데 그게 어느 깜둥이 소행이더라..고도 했다.
그래서 내겐 해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의 밤하늘에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가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우리 집 근처에 '다이아나'라는 이름의 흑인혼혈 소녀가 살고 있었다.
내 또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그 아이의 엄마 덕분에
아주 가끔 그 애를 따라 미군부대 안에 들어가 헬스장이나 피엑스 구경을 하기도 했었다.
그 아이는 나와 내 동생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나는 '빨간머리 앤'에서 앤의 친구인 검은머리의 예쁜 소녀 '다이아나'의 이름과
그 아이의 이름이 같다는 게 왠지 마음에 안 들었더랬다.
그리고 나는 나보다 알파벳을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유창하게 영어를 하지 못하는 그 아이가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땐 왜 그랬을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역시 아직 자신은 없다.
지금이라면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그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거대한 뿌리'에는 2002년 허름한 M동에서 저소득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운영하는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녀는 교육열은 커녕 부모의 무지와 폭력에 시달렸던 한 여자아이를 유난히 보살폈는데
삶에 지쳤어도 꿈을 가진 숙녀로 성장한 그 아이가 어느 날 덜컥 이주노동자인 네팔 청년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은 여주인공은 문득 차를 몰아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동두천 미군기지가 있는 동네 보산리를 찾아간다.
우리는 그녀의 뒤를 좇아 1970년대 기지촌 풍경 속 아이들의 세계를 함께 여행하게 된다.
미국에 입양되어 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노래 잘하는 경숙이,
베트남전쟁에서 팔을 잃은 아버지와 포주인 어머니, 그리고 양각시 언니들과 한 집에서 살았던 해자,
미국으로 간 아버지를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도 주위 시선에 힘들어하는 혼혈 소년 재민이,
학교를 그만두고 미군부대에 다니며 오빠들을 대학공부시켰지만 결국 흑인의 아기를 낳게 되는 윤희언니,
그들은 모두 힘들었던 시기를 견뎌낸 우리 공통의 조상의 모습임과 동시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멸과 냉대까지도 함께 견뎌 내야 하는 아픔까지 이중의 고통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은 쉽게 피어날 수 없었고 그들은 그렇게 좌절해야 했다.
우리 땅에서 우리 음식을 먹고 우리 말을 쓰고 우리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는 쉽게 그들을 '우리'와 같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왜 그렇게 너그럽지 못했고 그들을 '우리와 같다'고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 했던 걸까.



김중미 작가가 보여주는 1970년대 기지촌의 풍경은 내게 전혀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덜하긴 했지만 내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기에
'거대한 뿌리'속 인물들은 나 같기도, '다이아나'같기도 혹은 그녀의 어머니 같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UN이 꼬집었던 우리가 뼛속 깊이 가지고 있는 '단일민족' 우월주의,
그것으로부터 과연 나는 자유롭다 할 수 있을까.



마음 한 켠이 무거우면서도
'거대한 뿌리'를 보고 반성하게 된다.
그래도 이제라도
자신의 이름과 국적보다 '혼혈아' 혹은 '이주노동자'라는 허울로 먼저 다가오는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용을 배우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뿌리는 여러 갈래지만 결국 하나의 굵은 가지를 피워낸다는 걸
살면서..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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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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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니란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란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 <도도한 생활>
 
   



김애란의 소설집 '침이 고인다'는 제목을 들으면 침이 고이고
다 읽고 나면 배가 부르다.
그녀의 세심하고 디테일해서 남루하기까지 한 심리묘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광활한 상상력의 폭발은
침 한 방울이 거대한 장마비로 돌변해 반지하방을 침수시키고
나의 좁디좁은 단칸방이 우주 안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녀의 소설은 첨단을 달린다.
SF적 소재가 등장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성공지향적이고 고집이 세며 자존심이 강하고 부끄러운 짓을 부끄러워 할 줄 알고
약한 자를 가여워하고 가끔 타인으로부터 무시받더라도 금세 아무렇지 않아지는 약간의 뻔뻔함도 지니고 있으며
내가 초라한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초라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은 조금 견디기 힘들어 하는
지극히도 현실적인-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책을 그다지 많이 읽는 편이 아닌 축에 속하는 내가 보기에도
김애란의 소설은 지금까지의 소설들과 많이 달랐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소설'이란 것들의 실체는
거대한 서사가 존재하거나 큰 정신적 격변기를 겪어 성장하게 되는 사람들의 내면이 그려지거나
사회적이거나 엽기적이거나 위선적이거나 궁상맞은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애란의 그녀들은 내 주위에 널려있는 수많은 여자들의 모습들과, 혹은 내 모습과도 수없이 겹쳐진다.
그녀들은 재수하면서 첫사랑을 만나거나 가겟집에 딸린 쪽방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가진 것 없이 다 내주시는 부모님에게 더이상 손벌릴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전전긍긍하거나
누군가의 집에 얹혀 살아야 하거나
때마다 '역병'처럼 돌아오는 명절날 세상에서 잠시 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지거나
난데없이 우뚝 솟은 63빌딩을 스치는 전철 안에서 잠깐 멍해지거나
비가 새는 방 안에서 바지를 걷어올리고 책이나 가재도구를 높은 곳으로 옮기거나
아주 작은 허영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게 욕심일까봐 걱정을 하거나
무릎나온 추리닝바지를 입고 밖에 나가는 일을 쪽팔려 하더라도
배우지 못한 부모님을 부끄러워 하지는 않는... 수많은 그녀들과 나.



우리의 삶 속에 숨겨진 수많은 드라마.
누추하지만 버릴 수 없는 내 안의 이야기들을 가진 그녀들이
서로의 짐을 나눠지며 '수고했어'라고 등을 두드릴 때
비로소 내 먹먹한 가슴 한 구석까지 위로를 받고 있음을 느꼈다.
이 세상 모두가 그런 건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 별에 살고 있는 한 사람 쯤은
나와 같이 쑥스러운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이다.
놀랄 만큼 예리한 기억력과 관찰력,
내 폐부를 들킨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더 겸손해 지는 것 같다.
'난 역시 특별하지 않은 사람, 그래서 마음 한번쯤 다치더라도 유난스레 상처는 받지 않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 하며.


우울함 속에서도 반드시 '킥'하는 웃음을 찾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p.s. 소설가들에게는 수많은 인생을 펜 끝으로 살아보는 능력이 허락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인생들이 결국은 작가 본인의 분열된 분신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며 박민규의 소설이 많이 떠올랐다.
특히 박민규의 단편소설집 <카스테라> 중 '갑을고시원'과
김애란의 <자오선을 지나갈 때>는 노량진의 고시원 묘사에 있어 쌍벽을 이루고 있는 듯 하다.
허나 왠지 슬프다.
빛나야 할 청춘을 척박한 21세기의 그늘에 묻어버려야 할
이시대 젊은이들의 마음과 미래가
노량진이나 신림동의 고시원처럼 좁고 어둑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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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사냥꾼 - 이적의 몽상적 이야기
이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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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정원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난 그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내 품에 안겨 가슴을 두드려주길 원했던 것뿐인데, 그녀는 이미 책 속에 빠져 있고, 책은 우리를 봉인해버렸다. 서투른 장난은 때를 놓쳤고, 억지로 몸을 움직이면 그녀가 유리처럼 깨져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언제까지 여기 서 있어야 하는걸까. 그녀는 언제쯤 책 읽기를 그치고 뒤돌아 나를 찾게 될까. 한낮의 태양은 잔혹하게 내리쬐고, 그녀의 독서는 영원히 계속된다.

<지문사냥꾼> '독서삼매' 중..
 
   


소설가 김영하는 이적의 머릿속에 그의 글을 대신 써주는 피터팬이 살고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다.
그는 네버랜드에서 초록색 옷을 입고 날아다니다가 어쩌다 대한민국에 흘러들어
30대 남자 싱어송라이터의 거죽을 입고 살아가다
얼마 전 무용을 전공하는 여성의 몸을 빌린 팅커벨을 만나 결혼을 위장하여 같은 집에서 살며
함께 네버랜드로 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다.
나는 이적의 안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의 상상력이 대부분 어린시절 보았던 '소년중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보았다.

중학교 3학년 때 패닉 3집을 귀에 꽂고
뙤약볕 아래 점심시간, 교문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멍하니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와 '뿔'을 들으며
나는 삐에로 복장을 입고 부지런히 두 발로 공을 굴리고 있는 이적을 상상하거나
미간에 잘 생긴 뿔이 돋아난 이적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내 기억 속의 이적은
욕조 속에 들어 앉아서 달팽이와 대화를 나누거나
UFO를 타고 외계인을 만나러 잠시 지구를 떠나있곤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적 같은, 이적과 '같되', 이적일 필요는 없는(당연히 이적일 수 없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단한 육체는 현실에 두되
뇌의 한 토막 쯤은
헨젤과 그레텔을 끓여 먹기 위해 마녀가 가열하고 있던 항아리의 수프 속에 넣어 둔 것 같은,
그런 사람,
그런 사랑,
그런 삶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그럼 정말이지 두 눈 마주보고 '훗' 웃어버리고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이에서 자맥질하며 행복해 질 수 있을텐데.

희한하게 이상한 추억들이 자꾸 생각나네.
이건 필시 '이구소제사'로 변장한 이적이 내 귓속으로 침입해
나의 뇌 생태계를 마구마구 휘젓고 다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의 냉소적이며 잔혹한, 창백하며 여린, 외로우며 음란한
핏빛 상상력이 젖어든 이 책, 매력적이다.
모든 단편이 그렇지만 특히
'자백'과 '제불찰 씨 이야기', 그리고 '지문사냥꾼'을 특별히 추천하는 바임.
이것으로...
이적과의 간접 접속
완료.



* P.S. : 이 글과 더불어 책의 표지에 그려져 있는 고양이 그림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함께 올리려다가 컴퓨터가 두 번이나 다운되는 바람에
같은 글을 세 번씩이나 썼다.
이건.. 책에 나온 그 고양이의 저주인가!!
제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 by d_evilk(네이버 그림그리기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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