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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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원 고료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세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던 정유정의 장편소설이다. 우리를 옥죄는 운명에 맞서 새로운 인생을 향해 끝없이 탈출을 꿈꾸고 시도하는 두 젊은이의 치열한 분투기를 그린 작품이다.

'나'는 6년에 걸쳐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해온 정신분열증 분야의 베테랑. 공황장애와 적응장애로 퇴원 일주일 만에 다시 세상에서 쫓겨난 참이다. 승민은 망막세포변성증으로 비행을 금지당한 패러글라이딩 조종사. 급속도로 시력을 잃어가는 와중에 가족 간의 유산싸움에 휘말리며 그들이 보낸 '전문가'에게 납치된 신세다.

정신병원에 갇힌 두 남자의 탈출기를 그린 작품으로, 소설은 거듭 탈출을 꿈꾸고 또 시도하지만 늘 그 자리에 머무는 일상에 대한 은유처럼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작가가 직접 정신병원에서 환자들과 생활하는 등의 취재를 바탕으로 치밀한 얼개, 한호흡에 읽히는 문장, 간간이 배치된 블랙 유머 등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김화영, 황석영, 박범신, 구효서, 하응백, 김형경, 은희경, 서영채, 김미현 등이 심사위원으로 나선 세계문학상 심사에서 '뜨거운 감동과 생에 대한 각성이 꿈틀대며, 희망에 대한 끈을 다시 움켜잡게 만드는 마력이 깃든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사회와 자신과 마주하는 일에서 뒷걸음질치기만 하던 우울한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 책을 잡았을 때 이 소설의 결말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회에서 패배자로 치부되었던 한심한 청춘이 이러저러한 우여곡절 끝에 한 뼘 성장하게 되는, 뭐 흔하고 그저 그런 이야기들.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결말은 희극과 비극, 아니면 맹탕 셋 중의 하나이지만 그 사연 하나하나를 들여다 보면 어느 하나 눈물겹고 드라마틱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다. 소설은 결말이 아니라 그 과정에 얼마큼 독자를 동참시키느냐가 관건인 장르였다. 나는 확실히 빠져들었다. 주인공 이수명이 뜨거운 계절을 보냈던 수리정신병원의 환자들과 함께, 소설을 읽는 내내 그곳에 있었다.

벗어나고 싶은 어딘가로부터 멋지게 탈출에 성공하는 스토리는 짜릿하다. 벗어나고 싶은 건 미칠만큼 보기 싫은 한심한 나 자신일 수도, 기댈 곳 하나 없는 이 답답한 사회일수도, 내 삶을 옥죄는 부모님과 같은 존재들, 나를 떠나지 않는 어린 날의 악몽일수도 있다. 내 모든 걸 바쳐서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면, 코딱지만한 희망이라도 내 앞에 있다면 그걸 붙잡아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마는 인생역전의 주인공들일수록 그들의 과거는 더욱 처참하다. 이 소설 속 주인공 이수명과 류승민의 '탈출기'는 온몸을 던져 처절하게 껍질을 부수는 과정이다. 심통난 어린 아이를 묘사하는 것처럼 가볍게 시작하는 이 소설은 클라이막스에 이를 때까지 도대체 주인공들이 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었으며, 어떤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계속해서 몰아간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도중에도 간간이 폭소가 터지는가 하면 그들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에선 소름이 돋기도 한다. 또한 어느새 너무나도 두터워진 그들의 삶의 이유와 그들 사이의 우정은 눈물을 끌어내기도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정신병원의 구조와 환자들의 캐릭터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처음에 이수명과 류승민이 서로 투닥거리며 주위 환자들과 빚어내는 에피소드는 코미디요, 류승민의 노래와 트위스트가 작렬하는 순간에 영화는 뮤지컬 장르로 바뀐다. 약물치료와 ECT치료를 번갈아 받고 병의 근원을 밝혀 나가는 장면은 메디컬 스릴러의 한 장면이고 극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결말 부분에 이르면 로드 무비 혹은 버디 영화의 옷을 입는다. 모든 장면이 눈 앞에 명확하게 떠오르고 자세히 그려지고 1인칭 시점의 서술은 어느 새 내 마음을 정신병원의 한 가운데에 끌어다 놓는다. 이 소설, 정말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멋질까!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지만 자세한 정신병동의 일상에 대한 묘사는 그의 전직업이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것과 사실적인 서술을 위해 동원된 엄청난 자료를 위해 그가 얼마나 관찰에 관찰을 거듭했을지를 예측하게 한다. 정신병자... 정신이 병이 든다는 증상이 참으로 우스우면서도 얼마나 참혹한 현상인지, 소설 속 표현처럼 정신병원에는 미쳐서 갇힌 사람이 있고 갇혔기 때문에 미쳐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지금 요상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상황에도 꼭 들어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해 보게 된다.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진부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용기를 북돋워 주는 책.

어느 순간 내가 너무나 밉고 한심하게 느껴질 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 앞에서 자꾸만 움츠러들 때 한 번씩 꺼내보고 싶은 책.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옛날, 내가 한때 그쪽에 살았을 때 일인데...

책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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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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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한 미학자 진중권이 '상상력 혁명'이라는 코드로 놀이와 예술의 세계를 들여다본 책. 예술 작품에 등장한 20가지 놀이를 소개하고, 이것이 어떻게 상상력으로 뻗어갈 수 있는지 살핀다.

근대가 이성의 이름으로 상상력을 배제하고 억압한 시기였다면, 상상이 기술의 도움을 받아 현실이 되는 테크놀로지 시대에는 "상상력이 곧 생산력"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상상력이 잘 발현된 예술 작품 속의 놀이들을 통해 상상력의 원천을 보여준다.

본문은 20개의 놀이를 '우연과 필연', '숨바꼭질', '수수께끼' 등 7개 주제 아래에 나누어 싣고 이들 놀이의 미학적 의미를 살피는 식으로 전개된다. 가로로 읽어도 뜻이 통하고 세로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아크로스티콘, 알파벳 철자의 순서를 바꿔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애너그램, 왜곡의 진리를 선물하는 아나몰포시스, 주사위, 체스, 카드 등의 게임 등이 다뤄진다.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책 자체가 하나의 놀이라는 것. 수록된 300여 컷의 그림을 읽고 곳곳에 감추어져 있는 크로스워드 퍼즐 같은 텍스트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경험할 수 있다. 지은이가 상상력 혁명으로 도래한 사유의 특징으로 꼽은 비선형성, 파편성, 중의성 등의 일곱 개의 키워드가 책의 형식과 내용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언제부터 책꽂이에 꽂혀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조금 풍족했던 시절 그저 제목이 마음에 들어 읽어보려고 덥썩 사다 놓고는 몇 년 묵혀 놓은 듯 하다. 갑자기 이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한 건 조금 '놀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냥 허송세월하면서 노는 거 말고 조금은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놀이, 뭔가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구석에 꽂혀 있던 책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던 것 같다.

진중권 교수님이 촛불을 든 진보 논객으로 이름을 높이게 되었지만 실은 미학자, 나의 고정관념에 따르자면 왠지 정치와는 거리가 먼, 고매한 아티스트일 것만 같은 직업을 가진 분이다. 하지만 취미로 경비행기 조종을 즐기고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려다 만 독특한 이력과 취향을 가지신 분이라는 점에서 '왠지' 인간미가 느껴지기도 하는 분이기도 하다. 그가 제시하는 놀이와 예술이란 무엇이며 또 그 둘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일까. 또한 그 둘은 각각 노동과 어떤 관계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의 측면은 책장에 빨주노초파남보 일곱가지 컬러가 칠해져 있다. 그 안에 주사위, 마술, 만화경, 미로, 종이접기, 체스, 그림자놀이 등등과 관련된 인문학적(?) 고찰들이 서로 그룹지어져 자리하고 있지만 사실 어떤 컬러부터 선택해서 읽는가는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나같이 고지식하고 취향이 없는 인간의 경우에는 그저 곧이곧대로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갔지만 목차를 보고 땡기는 그 어떤 부분부터 읽더라도 이 책은 흥미롭다. 그리고 어느 부분부터 읽든지간에 어느 순간 애너그램에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 책을 수직으로 세워서 눈을 가늘게 뜬다든지, 옆으로 돌려보면서 전혀 다른 그림이 돌출하는 걸 보고 신기해 하거나 고전적 미로를 그리는 방법을 열심히 따라그리는 과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책을 가지고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쇼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할 듯.



미술관 접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최소연, 2003년 (책 328쪽)


책의 요점은 창의력을 지닌 인간이 되는 기쁨을 알려주려는 듯 하다. 기계와 인간이 비슷해지고 있다는 가설은 기술 발달에 의해 기계가 점점 인간을 닮아가는 현상을 말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꼭 짜여진 일상 속에서 아무 생각없이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인간들이 점점 기계화되어 가는 것 역시 경고하고 있다. 인간이 기계와 구별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은 바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내게 꼭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살짝 더 나아가는 잉여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놀이이고 장난감이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예술작품이 되는 것일 게다. 지금 나의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며 계속 나아가다 보면 마지막에서는 허탈하게도 내가 유년시절에 가지고 놀았던 놀잇감들에 대한 기억들이 딸려 나온다. 지금 내게 필요한 호기심과 삶의 여유가 그 땐 넘치게 많았던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고 일상을 살짝 비틀어 본다면 우린 지금보다 훨씬 신나고 흥미진진한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유년기로 돌아가는 일곱 가지 길을 독자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는 '노동'을 재치 있게 '놀이'로 바꿔놓은 톰 소여를 생각해보라. '노동'과 '놀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을 정돈하는 '노동'도 이렇게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 하긴,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게 바로 카를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사회가 아니었던가. 그 사회로 가기 위해 꼭 혁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노동이 유희가 되는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다.
 
                                                                                                        -   책 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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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정경옥 옮김 / 살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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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작가 빌 브라이슨이 이번에도 놀라운 책을 가지고 나왔다. 특유의 재치와 입담으로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로서 인정받아 온 그가 이번에는 영어를 둘러싼 미국의 역사를 종횡무진 누빈다. 미국인조차 잘못 알고 있는 역사 상식,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영어 표현의 유래,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보석 같은 이야기들은 읽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새삼 실감나게 한다.

이 책은 미국 영어에 대한 진지한 탐험이자 미국에서 만들어진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영국과 결별한 미국이 어떻게 초강대국의 기틀을 만들었는지, 최초의 발명과 아이디어가 인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새로운 문화와 조우한 지구의 충격이 어떠했는지가 근 1,000년이 넘는 미국의 역사와 함께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사실 지은이의 이름은 꽤 오래 전부터 낯에 익어 있었다. 글 깨좀 읽거나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추천하는 책들 '빌 브라이슨' 시리즈의 저자. 게다가 익살스러운 표정의 그의 캐리커처가 크게 박혀 있는 책의 표지를 보고서 나도 모르게 뭐에 홀린 듯 리뷰를 신청하고 말았다. 그리고 책을 받고 솔직히 다소 난감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무려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책임을 알고 당황했던 거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곧 빠져들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학다식+달변+유머러스한 글쓴이 특유의 문체 때문에 책장은 상상 이상으로 술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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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빌 브라이슨

[더 타임스]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라는 평을 듣는 그는 1951년 아이오와 디모인에서 태어났다. 1973년 떠난 영국 여행에서 아내를 만나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그 이후 영국에 거주하면서 수년간 [더 타임스]와 [인디펜던트]를 비롯한 수많은 신문에 글을 기고하며 기자 겸 여행작가로 활동한다. 1995년 가족들과 함께 다시 미국의 뉴햄프셔 하노버로 이주한 이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뉴욕타임스]에서 3년 연속 베스트셀러에 오른 [나를 부르는 숲]을 비롯해 방대한 양의 과학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교양 과학서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유럽의 여행담을 유쾌하게 쓴 [발칙한 유럽 산책], 흔히 잘못 쓰이는 단어와 문법의 용례를 기록한 [브라이슨의 성가신 단어 사전(Bryson’s Dictionary of Troublesome Words)] 등이 있다. 여러 책에서 다방면에 걸친 지식과 특유의 유머러스한 입담을 자랑하는 그는 출간하는 책마다 무수한 화제를 뿌리며 많은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에는 특별한 스토리가 없다. 오늘날의 미국이 만들어지는 데 크든 작든 공헌을 한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선택과목으로 세계사를 공부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마 처음 들어보는 것일게다.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만한 다소 구린 미국 역사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메이플라워호가 미국 땅에 닿던 그 순간부터 발생한 역사의 기록상의 오류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콜럼버스가 미국을 처음 발견한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독자 대부분이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 곳곳에 둥지를 틀었던 전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어떠한 사연을 안고 미국 땅을 밟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새로 유입된 낱말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또는 소멸되었는지, 그 유래와 어원을 샅샅이 뒤져 밝혀내는 그의 자료 수집과 분석 능력을 접하다 보면 혀가 내둘러질 것이다. 그의 책은 크게 보면 영어를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 영어를 만드는 데 일조한 전세계 소수민족 1인까지 등장시켜 그 기원을 기록하고 있다. 중간중간에 정리되어 나오는 일종의 단어장(물론 외울 필요는 전혀 없는 종류의 단어장이다)을 보다 보면 우리가 흔히 쓰거나 별 생각없이 외웠던 단어, 관용어구에 벼라별 사연이 다 녹아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빌 브라이슨이 주워 모은 영어의 모든 것은 곧 오늘날의 세계 최강국 미국을 세운 사람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영어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도 더불어 생겨나는 걸 발견할 수 있었.

물론 이 책의 내용들이 전부 검증된 것인지 나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수많은 인용과 참고문헌 자료를 보고 감탄할 뿐. 시간이 나는대로 그의 다른 저작들을 모두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해부하여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지도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멋진 항해사를 만난 기분으로.



 

손 안 대고 코 푼 아메리고 베스푸치

언어의 불멸성을 따져볼 때 이름뿐인 이탈리아 태생의 사업가 아메리고 베스푸치만큼 손도 안 대고 실컷 코를 푼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우연과 실수가 개입되었다지만 어떻게 두 개의 대륙에 그의 이름이 붙을 수 있었을까? 1504∼1505년에 무명작가가 쓴 편지가 『신세계』라는 제목으로 엮여 피렌체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항해선의 선장일 뿐만 아니라 신세계를 발견했다고 적혀 있다. 실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의 개정판 작업을 하던 프랑스 동부 작은 대학의 마르틴 발트제뮬러 교수는 조사 과정에서 우연히 피렌체 지역에 퍼진 편지를 발견하고 베스푸치의 탐험에 관한 그럴싸한 내용에 감명을 받아 신대륙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메이플라워호의 도착과 그 이전 역사 / p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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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소장본 - 전2권 - 칼의 노래 + 칼의 노래 자료집 : 김훈을 읽다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2003. 5. 6
 

武力(무력)으로 슬픈 세상.

세종로 한 가운데에서 위용있는 모습으로 서있는 충무공 이순신.
세상을 호령할 듯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은 동상을 세운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고 잘 알려져 있다. 또 예전부터 어린이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으레 '이순신 장군요'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듯 이순신은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들 앞에 초라한 숫자의 배를 몰고 나가 세계 해전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승을 낚아올린 명장이며, 한 국가의 운명을 단신의 몸으로 보전한 당대의 영웅이자, 사심없는 충의(忠義)로 이루어진 교훈적인 생의 화신, 정치 모략에 희생된 비극적인 인생, 영광의 정점에서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완결되는 영웅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이순신은 '칼의 노래' 안에서 김훈의 펜 끝에서 다시 탄생하였다. 무모하리만큼 한 가지 목표, 의로운 죽음을 향해 나아간 한 장수의 생이 이 소설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소임을 후임자 원균에게 넘겨주고 의금부로 압송되었던 이순신이 정유년(1597) 4월 초하룻날 풀려나 백의종군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시작된다.
이순신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소설은 그의 전기에서 흔히 보아 온 어떤 영웅에 대한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충효애민의 초월적 심성, 드라마틱한 무훈담의 주인공인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두려움을 참아 내며 울음을 삼키는 한 영혼의 나약한 실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 앞에 스스로를 소멸시켜 가는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지닌 그저 한 인간으로서 존재했던 이순신을 만날 수 있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청동의 모습으로만 보아왔던 그는 소설에서 수없이 울었다.
사직에서 절하며 우는 임금을 걱정하며, 젖비린내 선한 아들의 죽음이 서러워, 적들에게 쫓기어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이 안타까워, 그리고 그들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칼찬 자신이 부끄러워 울고 또 울었다.
그에게 조국은 무엇이며 전쟁은 무엇이었을까. 역사책은 그저 이순신이라는 실존 인물이 그 시대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힘은 당시의 왕조 사상, 봉건적인 충성심, 사직에 대한 맹목적 충성 이러한 중세적인 가치에 의했던 것이라고만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궁금해진다. 온 천지간에 가득 찬 적들하고 홀몸으로 싸워 나가는 한 사내의 모습. 일인대 만인의 처절한 싸움. 말하자면 어떤 사람 한 명과 이 세계 전체와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인데 과연 그 사람에게 이런 싸움을 싸워 나갈 수 있는 힘, 그 원동력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발현하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힘에 의해서 이런 일인대 만인의 싸움을 인간은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역사책은 이 부분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한 인간이 어떻게 그런 체제가 요구하는 가치에 의해서 그런 엄청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보았을 때 김훈의 이 소설은 그 사람의 희망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역사를 나름대로 보완해 주고 있다. 절망적이었지만 또 다른 절망으로 그것을 돌파할 수 밖에 없었던 처절했던 한 인간의 싸움, 거기에 설득력있는 정당성을 부여한 것. 그게 김훈이 이 소설에서 이루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김훈이 제시한 이순신에게 있어서의 충도 아니고 효도 아니고 그런 정체적인 가치를 벗어나는 가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김훈은 우선 이 소설의 시점을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나')은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이순신이 아니라 이순신을 둘러 싸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나로서의 이순신이다. 주인공은 '이순신'이 아니라 '나'로 규정지어짐으로써 객관적 역사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주관적인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기술되어 있는 객관적 역사가 개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져왔는지, 거시역사 안에서 일일이 읊지 못한, 후세가 기억하지 못할 죽음과 서러움들을 낱낱이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김훈이 선택한 방식은 수려하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문체의 사용이다. 김훈의 문체는 일단 냉정하고 절망적이다. 소설에서 이순신의 생은 자비와 정의로 포장되지 않고 날로 보여진다. 김훈은 영웅된 자의 비극과 남해 바다의 풍경의 밤과 낮을 집중과 분산된 문체로 엮어 내려간다. 수려한 풍경을 묘사하는 문체에 비해 그의 심리와 내면을 대변하는 문장을 매서우리만치 짧고 날카롭다. 상상을 뛰어넘는 잔혹함 조차 덤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문체 자체로서 그 잔혹함은 잔인하다거나 자애롭다거나 하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게 된다. 단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냉정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적이 아군의 귀를 잘라가니 할 수 없이 이순신도 코를 잘라오라고 명령한 것은 이순신이 잔혹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당시를 살았던 장수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나약한 조정의 수군 장수로서 적들이 그렇게 하듯이 적의 머리통을 베어 소금에 절였다.

다음은 이순신의 일상에 대한 묘사이다.
그는 기록한다. 이순신의 글은 영웅다운 호탕함이나 과장이 없고 무협의 장쾌함이 없다. 그는 꼼꼼하게도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소이탈, 정보 유출, 투항 미수, 부녀자 강간, 영내 절도, 군수물자 횡령, 작전명령 불복종, 공문서 변조, 유언비어 유포, 허위 보고와 민간인의 개를 잡아먹은 부하 등 군율을 어긴 부하들을 목베고 가두고 때렸다. 또한 그는 전투에서 달아나 고향에 숨어 있는 자들은 그 은신처까지 형리를 보내서 기어코 목베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이순신은 냉정하게 기술한다. 그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의 아픔을 비로소 그려 볼 수가 있었다. 왜 백성은, 또 이순신은 그런 삶을 살아야 했나 우리는 미약하게나마 그 시대를 감지해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가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죽음 앞에서 엄숙했다. 그에게는 바다에서 적의 칼을 받아 죽는 것이 가장 의롭고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 이순신은 살기 위해 임금에게 아첨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의연하게 나아갔다. 그토록 자연사를 바랐던 그에게 죽음은 절벽처럼 확실했다.
그런 그에게 죽음을 종용하는 적은 비단 왜뿐만이 아니었다.
왜군이라는 주적 뿐만 아니라 혈육과 백성, 여자와 부하들을 향한 가여워 하는 마음과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사직이라는 헛것의 무내용 모두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 내부의 적, 아니 짐이었다.  그들에 맞서 홀로 감당해야 했던 이순신은 언제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명의 가엾음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운명에 대한 전율에 식은땀을 흘리며 죽음을 향해 돌진해 나간다.
헛것과 적들에 둘러싸인 세상에서 정치란, 사내란, 운명이란 무엇인가.  그는 당대 현실 속에서 숨을 수 있는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바다에서 이순신은 늘 머물 곳이 없었고, 쉼 없이 영(營)과 진(陣)과 전(戰 )의 길을 찾았다.
그의 관념 속에는 오직 적뿐이었으며 그가 고려해야 할 현실 원칙은 오직 바다뿐이었다. 그리고 물길과 바람, 그리고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만이 그를 평화롭고 의로운 죽음으로 인도해줄 동무였다.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아들 면의 젖비린내와 여진의 가랑이에서 풍기던 젓국냄새를 기억하는 고통, 그러나 통제된 슬픔, 그러한 내면의 억눌림이 그의 외로운 전쟁을 버티어준 마음의 힘이었다.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는 것만이 아들과 여진과 백성과 장졸들을 잃은 그가 죽기 전에 이루어야 할 소명이자 목표였다.

이렇듯 이 소설에서는 이순신의 개인사에 치중하는 반면 충과 효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충효가 부정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차이는 충효라는 중세적 가치에 한 인간의 인간성과 존엄한 권리가 매몰되느냐 아니냐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충효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순신이 전쟁을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 그를 지탱해 간 의지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자기가 의롭게 죽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었다. 그렇다면 또다시 그 목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은 자신의 자연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임금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를 존경하거나 종묘사직을 지켜야겠다는 정의감에 불타오르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의 아들 면을 죽인 자를 직접 처단하는 한 아버지일 뿐이고 그가 바다에서 적을 기다리는 이유는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가 남해를 수호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주인공인 '나'에게 있어 궁극의 목표는 무엇인가.
내게 있어 적이 적이고, 적에게 있어 내가 또 하나의 적이라면, 반드시 내가 이겨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적은 적이라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인 죽음과 울음으로서 '나'에게 다가온다. 그들도 역시 그들 하나 하나가 왜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하는지 모른채 바다에서 죽어가고 있으리라. 거기서 해답을 얻지 못하는 이순신 역시 전쟁에 대한 회의를 품고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전쟁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그는 결코 적보다 우월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연사를 위해 그는 전쟁이 멈추어지길 바랐고 그러려면 자신이 적의 피로 바다를 물들여야 했다. 그 외의 의미는 없었다. 내가 적을 쳐야 하는 이유는 내가 적보다 옳고 우월해서가 아니다. 전쟁은 나와 적, 같이 힘을 합쳐 멈춰야 하는 것이고 나는 하나의 정의가 아니라 단지 적에게 있어서 다른 또 하나의 적일 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허무주의를 엿볼 수가 있다.

이순신에게 폭력의 정당성을 허용했던 당대의 가치. 그것은 유형만 조금 바뀌었다 뿐이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가 자명하다 생각하는 이 시대의 가치. 그것은 칼이 아닌 또다른 형태의 폭력에게 정당성을 허용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갖가지 형태의 필요악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거기에 이순신의 칼-정당성을 부여받은-로서 비로소 맞설 힘을 갖게 된다. 이순신에게 칼은 그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그를 자연사로 인도할 구원품이었고,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다잡게 하는 용기였다. 장수의 칼은 목숨을 베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적과 내부단결을 해치는 아를 가릴것 없이 칼은 인간 목을 겨눈다. 상대 칼 또한 내 목을 벤다. 장수는 칼끝에 목숨을 부지하고 칼날로 생을 연명한다.
 칼은 우리를 절대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수단으로서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칼은 결코 노래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이순신의 칼은 단 한 번도 노래하지 않는다. 명의 군사들이 취한 노래를 부르고 그들을 위로하는 관기들의 노랫소리가 높아도 칼은 그저 징징징 울 뿐이다.

칼은 슬프다.
무엇이 그리 슬픈가. 그것 칼 역시 또 하나의 武力(무력)이기 때문이다.
무력(武力)이 지배하는 세상은 그 때에나 지금이나 가엾고 슬프다. 아무리 정당하고 의롭다 해도 아무 위로가 되지 못하는 힘을 휘두르기 때문에 이순신은 슬펐고 괴로웠으리라.
그러나 작가 김훈이 소설에서 이순신의 손에 쥐어준 칼은 약자에게 절실한 힘이었다. 우리는 약자였기 때문에 우리의 임금은 그리도 많은 날 동안 무릎을 꿇고 울었고, 그래서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적군의 머리통 50개를 가져다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입장에 놓여져 있는 우리에게 폭력적인 악이 지배하는 세계를 돌파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주어진 최소한의 무력. 그게 바로 칼이었다.

김훈은 역사 속 장수를 불러내어 희망 없는 세상을 보여 주었다. 정의는 없고 생존만이 존재하는 역사적 공간(이순신의 내면)속에 독자를 끌어들이고 나서 삶을 연장시키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고 묻는다. 충절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다. 단지 무내용과 무의미함으로 가득 찬 세상만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김훈은 흔히 충절의 표상으로 알려진 이순신 장군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이순신을 둘러싼 모든 역사적 가치를 전복시켰다.
『칼의 노래』는 나라를 구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다는 생명의 운명’이 마주 부딪치며 울음을 우는 소설이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충무공은 오늘도 덤덤하게 서 있다.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사계절이 순환하는 서울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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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636년 겨울, 인조의 어가행렬은 청의 진격을 피해 남한산성에 들었다. 그후 47일.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참담했던 날들의 기록을 담은 김훈의 신작 장편.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렇게 다시 조국의 가장 치욕적인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갇힌 성 안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을 담고 있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수성守城이 곧 출성出城’이라는 헌걸찬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김훈은 370년 전 조선 왕이 ‘오랑캐’의 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을 찧으며 절을 올리게 만든 역사적 치욕을 정교한 프레임으로 복원하였다. 갇힌 성 안의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치명적인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무섭도록 끈질긴 질감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에 공통적으로 공명해 오는 것들,
전장의 북소리('칼의 노래'), 현의 미세한 떨림('현의 노래')에 이어
이번 소설에서는 길고 모질었던 겨울,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가늘게 진동한다.
자연의 변화, 그 속의 인간, 역사 속에서 언제나 나의 의지가 아닌 나라의 운명을 걱정해야 했던 사람들이
그의 소설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이마에 피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청의 칸에게 절해야 했던 인조의 굴욕 사건을 돌이키면서
그 현장의 앞뒤에 놓인 시간들,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을 통해 역사적으로 끊이지 않았던'약소국의 비극'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난주 아시아판 타임지에 소개된 중국 올림픽 개막식에 관련된 기사 안에
작게 중국 지도가 삽입되어 있었다.
중국을 둘러싼 몽골, 러시아, 인도, 일본은 나라 이름이 명확하게 표기되었으나
그 사이에 중국의 뾰루지처럼 돌출해 있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의 이름은 표기되지 않았다.
독도며 이어도며 요즘 들어 '약소국'이라는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처하며 그들 안에서 살아남아야 할까, 에 대한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대두하고 있는 듯 하다.
쓸데없이 자존심을 돋우고 성을 내는 것보다
'(잘) 살기 위해서' 어떻게 나를 낮추면서도 온건하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게 아닐까.

불가항력이라는 게 있지만
본질을 명확히 알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감정적이기보단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할 일들이 늘어난다.
'비굴함'이 '생존'의 한 방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생존을 위해야 함'도 '비굴함'을 구사하는 방법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김훈의 인물들은 약하디 약하지만 언제나 '살고자' 고민했으므로 용감했고
그들의 눈물과 고뇌 덕에 우리는 우리의 땅을 이어받았으므로 그들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슬프지만 비장한 결단과 몸부림의 역사,
소설이어서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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