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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1억원 고료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세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던 정유정의 장편소설이다. 우리를 옥죄는 운명에 맞서 새로운 인생을 향해 끝없이 탈출을 꿈꾸고 시도하는 두 젊은이의 치열한 분투기를 그린 작품이다.
'나'는 6년에 걸쳐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해온 정신분열증 분야의 베테랑. 공황장애와 적응장애로 퇴원 일주일 만에 다시 세상에서 쫓겨난 참이다. 승민은 망막세포변성증으로 비행을 금지당한 패러글라이딩 조종사. 급속도로 시력을 잃어가는 와중에 가족 간의 유산싸움에 휘말리며 그들이 보낸 '전문가'에게 납치된 신세다.
정신병원에 갇힌 두 남자의 탈출기를 그린 작품으로, 소설은 거듭 탈출을 꿈꾸고 또 시도하지만 늘 그 자리에 머무는 일상에 대한 은유처럼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작가가 직접 정신병원에서 환자들과 생활하는 등의 취재를 바탕으로 치밀한 얼개, 한호흡에 읽히는 문장, 간간이 배치된 블랙 유머 등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김화영, 황석영, 박범신, 구효서, 하응백, 김형경, 은희경, 서영채, 김미현 등이 심사위원으로 나선 세계문학상 심사에서 '뜨거운 감동과 생에 대한 각성이 꿈틀대며, 희망에 대한 끈을 다시 움켜잡게 만드는 마력이 깃든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사회와 자신과 마주하는 일에서 뒷걸음질치기만 하던 우울한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 책을 잡았을 때 이 소설의 결말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회에서 패배자로 치부되었던 한심한 청춘이 이러저러한 우여곡절 끝에 한 뼘 성장하게 되는, 뭐 흔하고 그저 그런 이야기들.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결말은 희극과 비극, 아니면 맹탕 셋 중의 하나이지만 그 사연 하나하나를 들여다 보면 어느 하나 눈물겹고 드라마틱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다. 소설은 결말이 아니라 그 과정에 얼마큼 독자를 동참시키느냐가 관건인 장르였다. 나는 확실히 빠져들었다. 주인공 이수명이 뜨거운 계절을 보냈던 수리정신병원의 환자들과 함께, 소설을 읽는 내내 그곳에 있었다.
벗어나고 싶은 어딘가로부터 멋지게 탈출에 성공하는 스토리는 짜릿하다. 벗어나고 싶은 건 미칠만큼 보기 싫은 한심한 나 자신일 수도, 기댈 곳 하나 없는 이 답답한 사회일수도, 내 삶을 옥죄는 부모님과 같은 존재들, 나를 떠나지 않는 어린 날의 악몽일수도 있다. 내 모든 걸 바쳐서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면, 코딱지만한 희망이라도 내 앞에 있다면 그걸 붙잡아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마는 인생역전의 주인공들일수록 그들의 과거는 더욱 처참하다. 이 소설 속 주인공 이수명과 류승민의 '탈출기'는 온몸을 던져 처절하게 껍질을 부수는 과정이다. 심통난 어린 아이를 묘사하는 것처럼 가볍게 시작하는 이 소설은 클라이막스에 이를 때까지 도대체 주인공들이 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었으며, 어떤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계속해서 몰아간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도중에도 간간이 폭소가 터지는가 하면 그들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에선 소름이 돋기도 한다. 또한 어느새 너무나도 두터워진 그들의 삶의 이유와 그들 사이의 우정은 눈물을 끌어내기도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정신병원의 구조와 환자들의 캐릭터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처음에 이수명과 류승민이 서로 투닥거리며 주위 환자들과 빚어내는 에피소드는 코미디요, 류승민의 노래와 트위스트가 작렬하는 순간에 영화는 뮤지컬 장르로 바뀐다. 약물치료와 ECT치료를 번갈아 받고 병의 근원을 밝혀 나가는 장면은 메디컬 스릴러의 한 장면이고 극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결말 부분에 이르면 로드 무비 혹은 버디 영화의 옷을 입는다. 모든 장면이 눈 앞에 명확하게 떠오르고 자세히 그려지고 1인칭 시점의 서술은 어느 새 내 마음을 정신병원의 한 가운데에 끌어다 놓는다. 이 소설, 정말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멋질까!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지만 자세한 정신병동의 일상에 대한 묘사는 그의 전직업이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것과 사실적인 서술을 위해 동원된 엄청난 자료를 위해 그가 얼마나 관찰에 관찰을 거듭했을지를 예측하게 한다. 정신병자... 정신이 병이 든다는 증상이 참으로 우스우면서도 얼마나 참혹한 현상인지, 소설 속 표현처럼 정신병원에는 미쳐서 갇힌 사람이 있고 갇혔기 때문에 미쳐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지금 요상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상황에도 꼭 들어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해 보게 된다.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진부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용기를 북돋워 주는 책.
어느 순간 내가 너무나 밉고 한심하게 느껴질 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 앞에서 자꾸만 움츠러들 때 한 번씩 꺼내보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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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옛날, 내가 한때 그쪽에 살았을 때 일인데...
책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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