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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평점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이 '상상력 혁명'이라는 코드로 놀이와 예술의 세계를 들여다본 책. 예술 작품에 등장한 20가지 놀이를 소개하고, 이것이 어떻게 상상력으로 뻗어갈 수 있는지 살핀다.
근대가 이성의 이름으로 상상력을 배제하고 억압한 시기였다면, 상상이 기술의 도움을 받아 현실이 되는 테크놀로지 시대에는 "상상력이 곧 생산력"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상상력이 잘 발현된 예술 작품 속의 놀이들을 통해 상상력의 원천을 보여준다.
본문은 20개의 놀이를 '우연과 필연', '숨바꼭질', '수수께끼' 등 7개 주제 아래에 나누어 싣고 이들 놀이의 미학적 의미를 살피는 식으로 전개된다. 가로로 읽어도 뜻이 통하고 세로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아크로스티콘, 알파벳 철자의 순서를 바꿔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애너그램, 왜곡의 진리를 선물하는 아나몰포시스, 주사위, 체스, 카드 등의 게임 등이 다뤄진다.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책 자체가 하나의 놀이라는 것. 수록된 300여 컷의 그림을 읽고 곳곳에 감추어져 있는 크로스워드 퍼즐 같은 텍스트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경험할 수 있다. 지은이가 상상력 혁명으로 도래한 사유의 특징으로 꼽은 비선형성, 파편성, 중의성 등의 일곱 개의 키워드가 책의 형식과 내용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언제부터 책꽂이에 꽂혀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조금 풍족했던 시절 그저 제목이 마음에 들어 읽어보려고 덥썩 사다 놓고는 몇 년 묵혀 놓은 듯 하다. 갑자기 이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한 건 조금 '놀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냥 허송세월하면서 노는 거 말고 조금은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놀이, 뭔가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구석에 꽂혀 있던 책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던 것 같다.
진중권 교수님이 촛불을 든 진보 논객으로 이름을 높이게 되었지만 실은 미학자, 나의 고정관념에 따르자면 왠지 정치와는 거리가 먼, 고매한 아티스트일 것만 같은 직업을 가진 분이다. 하지만 취미로 경비행기 조종을 즐기고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려다 만 독특한 이력과 취향을 가지신 분이라는 점에서 '왠지' 인간미가 느껴지기도 하는 분이기도 하다. 그가 제시하는 놀이와 예술이란 무엇이며 또 그 둘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일까. 또한 그 둘은 각각 노동과 어떤 관계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의 측면은 책장에 빨주노초파남보 일곱가지 컬러가 칠해져 있다. 그 안에 주사위, 마술, 만화경, 미로, 종이접기, 체스, 그림자놀이 등등과 관련된 인문학적(?) 고찰들이 서로 그룹지어져 자리하고 있지만 사실 어떤 컬러부터 선택해서 읽는가는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나같이 고지식하고 취향이 없는 인간의 경우에는 그저 곧이곧대로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갔지만 목차를 보고 땡기는 그 어떤 부분부터 읽더라도 이 책은 흥미롭다. 그리고 어느 부분부터 읽든지간에 어느 순간 애너그램에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 책을 수직으로 세워서 눈을 가늘게 뜬다든지, 옆으로 돌려보면서 전혀 다른 그림이 돌출하는 걸 보고 신기해 하거나 고전적 미로를 그리는 방법을 열심히 따라그리는 과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책을 가지고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쇼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할 듯.
미술관 접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최소연, 2003년 (책 328쪽)
책의 요점은 창의력을 지닌 인간이 되는 기쁨을 알려주려는 듯 하다. 기계와 인간이 비슷해지고 있다는 가설은 기술 발달에 의해 기계가 점점 인간을 닮아가는 현상을 말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꼭 짜여진 일상 속에서 아무 생각없이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인간들이 점점 기계화되어 가는 것 역시 경고하고 있다. 인간이 기계와 구별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은 바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내게 꼭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살짝 더 나아가는 잉여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놀이이고 장난감이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예술작품이 되는 것일 게다. 지금 나의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며 계속 나아가다 보면 마지막에서는 허탈하게도 내가 유년시절에 가지고 놀았던 놀잇감들에 대한 기억들이 딸려 나온다. 지금 내게 필요한 호기심과 삶의 여유가 그 땐 넘치게 많았던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고 일상을 살짝 비틀어 본다면 우린 지금보다 훨씬 신나고 흥미진진한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유년기로 돌아가는 일곱 가지 길을 독자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는 '노동'을 재치 있게 '놀이'로 바꿔놓은 톰 소여를 생각해보라. '노동'과 '놀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을 정돈하는 '노동'도 이렇게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 하긴,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게 바로 카를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사회가 아니었던가. 그 사회로 가기 위해 꼭 혁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노동이 유희가 되는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다.
- 책 3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