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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속의 중국사
기시모토 미오.하마구치 노부코 지음, 정혜중 옮김 / 혜안 / 2015년 12월
평점 :
-(위진 남북조)시대의 특징은 한대가 왕호만을 부여한 것과는 달리... 다른 지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까지 들어가 있는 아주 긴 관작명이 사용되고 있었다.
제4장 분열과 다원화, p.63
-다만, 수당시대에 과거를 통해 채용된 관리는 전체 관료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를 통한 관료의 등용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송대(10세기 이후)에 들어서고부터였다. p.69
-당왕조는 여러 민족을 통합해 나가기 위해 명확한 이념을 필요로 했던 북조정권의 여러 제도를 이어받아 그것을 집대성해 갔다. 당나라 초기 제도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수용ㅎ기에 적당한 보편성을 띠고 있었다. p.71
제5장 수당제국과 동아시아
-한문 사료에 나오는 이러한 4구분법(몽골, 색목, 한인, 남인)에는 원의 이민족 지배에 반감을 갖고 있던 한인 지식인의 주관이 들어간 것이며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의 차별은 없었다고 할 수도 잇다.p.102
제7장 원에서 명으로
-정효는 '북로'에 대해서나 '남왜'에 대해서나 단순한 이민족의 침입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중국인과 주변 민족이 뒤섞여 변경사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P.114
-만주와 정씨(정지룡, 정성공)의 두 집단은 명 말 변경교역의 붐 속에서 태어난 쌍둥이 같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p.121
제8장 명말 동아시아와 청조의 성립
-(강희제는)만주, 몽골적인 부족적 사회구조를 넘어 황제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중국적인 제도와 사고를 적극 채용했던 것이다. p.133
-조선, 류큐의 사절과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장 일행을 쇼군이 맞이하여 알현의식을 성대히 연출하는 제도가 시작된 것도 이 때(도쿠가와 정권 시기)였다.p,137
제9장 청조의 평화
-반면 아시아에서는 조선에 대해 강한 관심을 드러내어, 이후 처음으로 일본은 중국과 대든ㅇ한 관계를 구축하고 그로부터 얻은 '종주국과 동등'한 지위를 배경으로 조선에 조약 체결을 압박하고자 기획하여다. 이것이 1871년에 체결된 청일수호조규의 목적 중 하나였다. p.163
제11장 동아시아의 근대
-신해혁명은 혁명이라고는 하지만 그 과정을 보면 전반적으로 격렬한 무력투쟁은 적었고, 정권의 이행은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하며 청조의 지배에서 이탈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새로이 성립된 국가는 청조의 광대한 영역을 거의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받았다. p.176
제12장 근대 중국의 내셔널리즘
-위안스카이는...대총통의 권한을 강화하고 독재적인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것은 위안스카이가 통일과 부강의 달성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중국의 과제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열강이 경쟁하는 국제사회 속에서 주권국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앙권력을 장악하고, 군사력에 의거해서라도 통일을 꾀하고, 외국차관에 의거해서라도 재정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중국이 여전히 열강에 의한 불평등조약체제 아래 있는 이상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국의 강화를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인식이기도 하였다. p.179
-중국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17년 8월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전승국이 되었지만 '특수한 이해를 갖는 교전국(22개 국)'으로 분류되었다. p.181
제13장 20세기와 중국(I)
중국의 입장에서는 1950년대는 '반미소련'이었지만 1960년대에는 '반미반소'였다고 평가되듯이, 1958년이 되면 양자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소련 모델이 아닌 독자적인 국가건설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는 신속한 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대약진운동이라 할 수 있다. p.198
제13장 20세기와 중국(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