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3
폴 카틀리지 지음, 이상덕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을 강의하시던 은사님이 어느날, 고대 그리스를 알려면 이 책을 읽도록 권하셨다. 평소 은사님이 편애하시던 총서 시리즈였음을 고려하더라도, 추천하신 이유의 절반은 책 자체의 가치 때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 관해서는 개설서 몇 권을 읽고서 얻은 게 전부인 나는, 평생을 고대 그리스 연구에 바친 학자의 저서를 검토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리하여 책은 독파한다기보다는 감상하는 것에 가까웠다.

국내에서 기존에 출간된 고대 그리스에 관한 역사서들은 ‘아테네 중심, 스파르타’ 부중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크노소스부터, ‘마지막’ 그리스인 비잔티온까지 11개의 도시들을 균형 있게 다루었다. 게다가, 예시로 든 두 도시의 사이에 놓일 나머지 9개의 도시들은, 그 도시가 가장 존재감을 드러낸 시기 순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목차를 분석하자면

크노소스: 그리스 문명의 기원
미케나이: 크노소스의 미노스 문명을 대체함
아르고스: 미케나이 몰락 뒤 암흑 시대로부터 성장
밀레토스: 암흑시대 후 본격적인 식민 활동과 함께 번영
마살리아: 밀레토스 번영 시기에 세워진 지중해 서부의 식민시
스파르테: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도하여 승리
아테나이: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계기로 몰락
시라쿠사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김
테바이: 새로운 패권국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지
비잔티온: 그리스 세계의 끝, 그리고 머지않아 새로운 그리스(비잔티움 제국)의 시작

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개설서답게 시간 순서를 고려하면서도, 그동안 고대 그리스의 대명사로 여겨져 온 아테나이(아테네), 스파르테(스파르타) 외의 여러 도시들을 부각시켰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역사상을 꿰뚫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구성 방법이 아닐까?

유머도 함부로 던지면 말장난이 되지만, 이 책의 저자라면 어떨까?

“이 책에서 다룬 모든 도시들 중에서도 스파르테는 분명히 아주 짭은 입문서라는 이 책의 형식을 반겼을 것이다. 그들은 간략하게 말하는 것이나 짧은 말재간에 능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러한 형식의 말을 ‘라코니아식’이라고 한다. 이 명칭은 고대에 그들을 일컫던 이름인 라코네스(Lakones)’에서 유래했다. 이런 말들의 사례는 많으며 또한 전설적이다.”(책 92-93쪽 중에서)

스파르테는 촌철살인의 단어들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즐겼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분량이 짧은 걸 좋아하리라는 말이다. 이러한 언급에서 고대 그리스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저자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파르테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이 폴리스에 할애된 분량은 고장 18쪽에 지나지 않는다. 호적수였던 아테나이에 비해서도 그렇지만, 다른 폴리스들에 비해서도 결코 많은 분량이 아니다. 이것 또한 ‘라코니아식’으로 기술된 장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아테나이는 26쪽을 차지하여 여러 도시들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이는 단순히 아테네의 위상 때문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는 정반대로, 저 페리클레스의 추도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나긴 연설을 즐겼다. 아테나이의 분위기가 그러했던 것이다. 스파르테 서술은 짧고, 아테나이 서술은 길다. 저자는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책으로 구현하는 한편, 책의 분량 조절만으로도 그리스 세계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으로 아테나이에 대한 과도한 찬사를 경계하며,어디까지나 아테나이의의 재조명은 민주주의 발달에 힘입어 이뤄진 것으로 보았다. 폴 카틀리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에드워드 벌워 리턴)는 처음으로 고대 아테나이를 민주주의의 어머니 혹은 선구자라고 말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서구의 정치적 사유와 이데올로기는 반민주주의적, 친스파르테적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에서 발전한 새로운 근대 대의민주주의와 새로운 그리스 독립국가 건설, 그리고 19세기 서구 유럽에서 자라난 고대 그리스를 정치의 선조 혹은 모델로 보는 경향은 본질적으로 매우 다른 아테나이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를 유하게 바꾸었다. 1830년대부터 높아진 아테나이의 위상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책 110-111쪽 중에서)
“이 논점은 전(前) 헬레니즘과 (로마를 거친) 헬레니즘 그리스가 ‘정치’, ‘민주주의’를 비롯한 많은 것들의 근원이자 서구 문화의 가장 중요한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와 정치가 우리의 생각 및 행동과 매우 다를 뿐 아니라 사실상 이질적이고(어쨌든 1830년대에 노예폐지가 성취된 뒤로는) 그야말로 생소한 것이라는, 한마디로 ‘타자적’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그리스 민주주의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평가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역사교육 현장에서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를 곧잘 이야기하곤 하나, 그와 같은 표현은 동시대의 사실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것이지, 과거의 사실을 대상으로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역사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이질적’이고 ‘생소한’, ‘타자’라는 용어(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는 시의적절하다.

역사 강사와 전문가들 중에서는 과거의 정치 기구나 조직을 현대의 기구, 조직에 자주 비유하고는 한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왕과 대통령, 율령제 아래의 각 기구의 장과 행정 각부의 장관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비유의 방향은 과거에서 현재로 향한다. 유용한 방법이나, 여기에는 전통 사회의 권위를 정치가, 행정가들에게 부여하는 폐단이 생기기도 한다. 아주 조금이라도 서열에 차이가 있으면 의전에 벌벌 떠는 현실에선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델로스 동맹을 에게 해 조약기구, 또는 델로스 조약이라 부른다. 이는 분명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대가의 역사서에서 이와 같이 현대 사회의 용어와 개념을 활용하는데, 현대의 용어와 개념을 과거 사회에 적용함으로써 이번에는 비유의 방향이 현재에서 과거로 향한다. 역사 서술에서의 비유법에 관하여 참조할 만한 방법이다.

고대 그리스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는 부분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헬레네스>의 성소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올림피아와 델포이에 관한 내용이다. 델포이의 아포론 신전은 그리스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곳이면서도, 저자가 언급했듯이 온갖 도시들이 개별적으로 헌정한 기념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이라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공간이 그 세계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은, 고대 그리스 세계가 이와 같이 공통의 정체성을 지녔으면서도 수없이 경쟁했다는 것, 심지어 페르시아 전쟁 기간 중에도 “사실 더 많은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책 230쪽 중에서)는 것처럼, 하나의 다양한 세계였다는 점일 것이다.

※마침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중인데, 성화대는 후지산을 형상화한 것이고, 그 위에 빛나는 태양은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아마도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상징하는 것이었으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올림픽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기원한 이상, 그 태양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아닌 헤리오스, 혹은 아폴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쿄 올림픽이 일본의 올림픽이며, 수많은 논란과 문제가 쏟아지고 있지만 그것이 도쿄올림픽이 아닌, 머나먼 올림피아 제전의 권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