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건록 -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
무쓰 무네미쓰.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이용수 옮김 / 논형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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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불법 점거가 계속되고 있다.”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일본의 외교를 총괄하는 기구인 외무성의 공식 입장입니다. 이 외무성 앞에는 어느 한 사람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는 청일전쟁 시기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일본 외무성에 서 있는 유일한 동상입니다. 이는 그가 일본의 외교사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살펴볼 책은 그가 남긴 시대의 기록, 바로 <건건록>입니다.


무쓰가 외무대신이었던 1894, 조선에서 동학 농민운동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무쓰 무네미쓰는 이 사건에 대단히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 조정이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무쓰는 톈진 조약을 들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만약 청국에서 어떤 명분이든지 간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일본 또한 그에 상다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뜻밖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이 조선에 대해 권력을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p.20-21)

 

<건건록>동학당의 난(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무쓰는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이나 본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일본이 이 사건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청일전쟁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무쓰 무네미쓰였습니다.

사실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치닫기까지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무쓰는 청과 대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외교는 백척간두의 일보를 내디뎠다.”(p.49)

 

무쓰의 주장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자 동학 농민군과 조선 조정은 서둘러 화약을 맺고, 양국 군대의 철군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함께 군대를 철수하자고 일본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무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p.55)

 

조선의 내정이 어지러우니 개혁하기 전까지는 결코 군대를 철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과 청나라의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게 됩니다. 이를 반영하듯, 각국에 주재하는 일본과 청나라 외교관들이 본국과 주고받는 교신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무쓰는 이미 감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보다 먼저 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치밀한 외교 활동을 통해 서양 국가들은 여기에 간섭하지 못할 것이

라고도 판단합니다. 과연 무쓰의 판단은 적중했습니다.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써도 지장 없다. 실제의 움직임을 개시하라.”(p.142)

 

무쓰가 작성한 이 전문을 통해, 우리는 외교라는 것은 때로는 교섭을 통해 평화를 쌓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관계를 파탄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전문에 따라 1894723, 일본군이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23일 새벽을 기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약간의 병력을 급히 입경케 하였을 때 왕궁 근방에서 갑자기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함에 따라 우리 군은 이를 추격하여 성문을 밀어 열고 궐내로 진입했다.”(p.76)

 

무쓰는 어떤 방법으로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감청했을까요? 이번에 번역된 <건건록>의 주석에 자세한 사정이 밝혀집니다지금 소개하는 <건건록>은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가 교정을 보고 주석을 단 책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교토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여자대학의 교수로 강의를 했던 분입니다. 그는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논문과 책으로 공개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업적을 소개하자면, 일본이 청일전쟁을 앞둔 1894723,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기습 공격을 했다는 공식 기록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동안 이 사건은 일본 측의 왜곡 때문에 조선군이 선제 공격하여 일본이 반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바로 잡은 것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이를 조일전쟁이라 부를 만큼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으며, 청일전쟁의 목적도 조선 침략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런 나카쓰카 교수가 <건건록>을 철저히 분석했습니다. 그에 따라 무쓰의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 의도느 더욱 분명해집니다. 또한 무쓰가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비롯해 수많은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그 내용을 바로잡고 보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결과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한 이틀 뒤인 1894725, 아산에서 청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합니다. 이렇게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군인들의 몫으로 넘어갔을까요? 아니, 여기서부터 무쓰의 또다른 전쟁이 시작됩니다.

 

개전 직후, 영국 국기를 게양한 채 아산으로 향하던 청나라 함선, 고승호가 일본 해군에 의해 격침됩니다. 바로 고승호 사건입니다. 고승호가 영국 국적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금방 국제 문제로 치달았습니다. 영국은 일찍이 비슷한 사건으로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한 적도 있었지요(2차 아편전쟁). 무쓰는 외교 라인을 총동원하여, 고승호 격침이 정당한 행위였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 랴오둥 반도의 여순구를 점령한 일본군이 청나라 민간인을 학살하는 여순구 학살이 보도되어, 일본에 대한 여론은 물론, 당시 진행되던 미구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에도 차질을 빚게 됩니다. 이 때 무쓰는 평소 일본군이 군기가 엄정했다고 주장하며 여순구 학살을 부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 수행에 관여합니다.

 

한편, 조선과는 일한양국맹약이라는, 일시적인 군사 동맹을 맺도록 합니다. 이 동맹으로 일본은 조선을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무쓰의 치밀한 기획에 따라 이뤄진 일입니다.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이니 당연히 동맹을 맺을 권리가 있다고 국제 사회에 선전하는 한편, 실제로는 조선을 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동맹을 과연 동맹이라 할 수 있을 것일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결과는 동맹을 맺은 나라 백성들의 떼죽음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공주, 그리고 장흥에서 섬멸했고, 그 잔당을 철저하게 추적해 살해했습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동학농민운동을 일본이 저지른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석연치 않은 군사 동맹과 동맹국 백성의 대량 학살. 그 의미는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무쓰는 청과 전쟁을 벌이려고 조선을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무쓰가 조선에 이와 같은 외교 정책을 실시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건건록> 전반에 걸쳐 조선에 대한 온갖 편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관해서는 번역자인 이용수 연구원이 해제에서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니, 책을 참고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사이, 무쓰는 안으로는 전쟁에 대한 일본 국내의 여론을, 그리고 밖으로는 열강의 동향을 살피며 전쟁 지도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이 시기 일본 국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지지와 청에 대한 적개심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예상치 못하게 일본이 선전을 거두자, 일본에 대한 인식을 크게 전환하게 됩니다.

 

무쓰는 이러한 상황에 편승해, 새로운 점령지를 확보해 국민들의 욕망을 채우는 한편, 자칫하면 국민들의 감정이 교만으로 변하지 않을지 예의주시합니다. 한편,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이 확산되는 데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는 전세가 유리한 상황을 적극 활용하여 유럽 국가들과 교섭하여,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숙원이었던 불평등조약 개정 작업을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쓰는 외국이 점차 일본에 위협을 느끼고 이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우세한 상황에서 이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긴박한 전쟁 외교를 개인의 내면은 물론 세계적 차원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됩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조야의 엇갈린 요구들이 사방에서 쏟아집니다. 이에 무쓰는 강화 조약을 준비하여 청에 강요했습니다. 청나라가 당시 국제 관례에 따르지 않고 전권대사를 파견하자 이를 돌려보내는 등으로 외교상의 기선을 제압했으며, 이를 예상해 미리 각서까지 준비해 둔 것은 무쓰의 주도면밀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마침내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회담이 열렸고, 청나라의 대신 이홍장이 왔습니다. 무쓰는 이홍장을 상대로 능수능란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이 때 이홍장의 외모에 대한 감상이나, 만날 때 느낀 바를 이야기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외교관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교섭에 활용하려는 태도는 한편으로는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이홍장은 강화회담이 패전에 따른 배상이 아니라, 청일 양국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역으로 청일 동맹을 주장하는 등 강화 회담의 프레임을 전환하고자 하는 노회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동시에 청나라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휴전을 주장합니다. 무쓰는 이에 대해 휴전 조건을 가혹하게 내세우는 식으로 이홍장의 시도를 저지합니다.

 

그러던 중, 이홍장은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의 몸을 내던져 강화 회담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홍장을 마구 비웃던 국내 인심마저도 그를 동정할 정도였으며, 국제 여론도 청나라에 동정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이홍장이 주장했던 휴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피를 덜 흘리게 된 것입니다.

 

강화 조약 체결을 앞두고, 이홍장은 무쓰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일본국은 현재 세력이 이미 강대하고 인재도 많아 더욱 더 융성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형편이다. 지금 배상 금액의 많고 적음과 할지(할양지)의 넓고 좁음 같은 것은 모두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지만,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 영원히 화목하게 될 것인가 또는 영원히 원수로 볼 것인가.”(p.286)

이는 일본의 앞날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쓰는 <건건록>에 이홍장의 이 말을 기록하면서, 자기 조국의 앞날에 대해 일말의 불안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1895417,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을 침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비롯한 영토를 일본에 할양합니다.

그러나 이 때, 러시아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박합니다. 그 유명한 3국간섭입니다. 무쓰는 이 사건이 일본 육해군을 비롯해, 국민 일반에게 미칠 영향을 경계하는 한편, 3국에 맞서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자칫하면 시모노세키 조약 전체가 파탄될 수도 있는 상황.

 

무쓰는 러시아를 비롯한 3국은 처음에 이와 같은 간섭을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예상 외로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탓에 간섭이 이뤄졌다고 판단합니다. 마냥 승리하는 것이 오히려 훗날의 외교적 고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외교의 곤란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편, 서로 민족 감정으로 강렬하게 충돌했던 프랑스와 독일마저 한 편을 이루었을 만큼 상황은 중대했습니다.

 

전쟁은 전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진정한 싸움은 전쟁이 끝난 뒤부터라는 것임을, 그것이야말로 전쟁이고, 또 외교임을 <건건록>은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일본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의 군함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는 등 상황은 일촉즉발. 막상 실제 위협을 받자 강경하던 언론까지도 겁을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제군들의 훌륭한 생각과 뛰어난 의견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함과 대포를 상대로 숙의해야 할 것이다.”(p.365)

 

마침내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반환합니다.

불과 2주 동안 일본을 뒤흔들었던 3국 간섭은 청일 전쟁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었습니다. 이는 각국의 지략이 총동원된 또다른 전쟁이었으며, 그 한가운데 무쓰 무네미쓰가 있었습니다.

이 때 무쓰는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굴욕감과 불만이 점차 커져 가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훗날 이 감정은 무쓰가 죽은 뒤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치닫도록 합니다. 그 결과, 일본은 광대한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되고, 결국에는 패망하게 됩니다만 이는 과연 무쓰의 계산에 있었던 것일까요.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전쟁은 무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무쓰 무네미쓰는 이렇게 청일 간의 갈등을 유도했고,

청일 전쟁의 승리에 외교적으로 기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3국 간섭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방어하며 전쟁으로 얻은 이익의 손실을 최소화합니다.

일본의, 그리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운명을 세 번이나 결정지은 것입니다.

 

<건건록>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외교관들의 사고방식 전반, 곧 그의 내면과 계산, 정책 결정 과정을 보여 주는 긴요한 자료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침략과 전쟁을 기획한 자의 기록.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식민지가 되었고, 동아시아는 수십 년에 걸쳐 전쟁에 휘말렸였으니, 이 중대한 기록을 읽을 필요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청국에서 어떤 명분이든지 간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일본 또한 그에 상다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뜻밖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이 조선에 대해 권력을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 - P20

"바야흐로 우리 외교는 백척간두의 일보를 내디뎠다." - P49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 - P55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써도 지장 없다. 실제의 움직임을 개시하라." - P142

"23일 새벽을 기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약간의 병력을 급히 입경케 하였을 때 왕궁 근방에서 갑자기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함에 따라 우리 군은 이를 추격하여 성문을 밀어 열고 궐내로 진입했다." - P76

"일본국은 현재 세력이 이미 강대하고 인재도 많아 더욱 더 융성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형편이다. 지금 배상 금액의 많고 적음과 할지(할양지)의 넓고 좁음 같은 것은 모두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지만,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 영원히 화목하게 될 것인가 또는 영원히 원수로 볼 것인가." - P286

"지금은 제군들의 훌륭한 생각과 뛰어난 의견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함과 대포를 상대로 숙의해야 할 것이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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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위안부' - 애국심과 인신매매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2
니시노 루미코.오노자와 아카네 엮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 논형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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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국민 ‘위안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해국 국민이자 피해자로서, 일본인 ‘위안부‘는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으며, 특히 한국에서 그러하였다. 진정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다면, 이제는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서도 알아 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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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유신 - 성공한 쿠데타인가, 실패한 쿠데타인가
한상일 지음 / 까치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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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면 관군, 지면 적군.˝ 그러나 그 끝에는 관군도 적군도 없을 것이었다. 쇼와 유신의 기원과 과정, 그 영향에 대한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라 할 수 있을 만한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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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위안부' - 애국심과 인신매매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2
니시노 루미코.오노자와 아카네 엮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 논형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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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어요?”
교무실과 교실 오가며 책을 읽고 있으니, 어떤 학생이 물었다. 그러나 나 역시 한동안은 식민지, 또는 점령지 여성들로만 ‘위안부’를 만든 줄 알고 있었다. 비로소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 것은 그 유명한 <#제국의위안부>(박유하)를 통해서였다.
그동안 우리에게 ‘위안부’ 문제는 언제나 민족 문제였기 때문이다. 종종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분노를 “일본에게 똑같이 되돌려 줘야 한다” 라는 격앙된 발언이 나오곤 하는데, 이는 ‘위안부’ 문제가 어디까지나 민족 문제라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때로는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 인권 문제, 여성 인권 문제로도 여겨져 왔으나, 어떻게 규정하든 그것은 민족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하나의 표어라는 측면이 있었다.
그 점에서 가해국 국민이었던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관심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박유하가 이야기했던 제국의 일부였던 식민지 조선의 ‘위안부’들을 제외한, 제국의 나머지 부분의 ‘위안부’들, 그 중에서도 ‘내지’의 ‘위안부’들에 주목한다면 ‘위안부’ 문제는 다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외면받아 온 ‘일본인’ 위안부의 조명

일본 근현대사에 관한 여러 논저를 펴내 온 논형에서는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총서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리고 첫번째 번역서인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니시무라 히데키)에 이어, 그 두번째 책을 펴냈다. 바로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제1장에서는 일본인 ‘위안부’의 모집 과정에서 나타난 불법성, 군의 주도는 물론 외무성 및 해외 영사관과 내무성 및 경찰의 묵인, 방조, 그리고 조력 문제를 다뤘다. 이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된다.
제2장은 일본인 ‘위안부’의 전시 생활상을 다루었는데, 조선인 ‘위안부’가 겪은 것과 같은 참상은 드러나진 않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일본인 ‘위안부’가 상대적으로 나은 지위를 차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제국 내부의 민족 차별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제3장에서는 패전 이후 일본인 ‘위안부’의 운명을 다루는데, 이를 통해 일본 정부, 그리고 사회에서 일본인 ‘위안부’를 수십 년에 걸친 외면하여 온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입장도,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입장 수준을 결코 넘어서지 않을 것이며,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 또한 지난함을 인식하게 된다.
‘내지’ 출신 여성과 국가주의의 관계
먼저, 일본인들이 ‘위안부’가 된 데에는 국가나 군에 대한 신뢰가 제법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증언에 따르면 이른바 ‘전차금’ 및 위안소 이용료는 군에서 일정 부분을 부담했다.(p.31, 39) 오늘날에도 전봇대나 게시판 등에 ‘꿀알바’ 라는 등, 어딘지 의심스런 곳에서 만들어진 듯한, 뭔가 으스스한 전단지가 붙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집 경로를 통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당시에도 비슷하게 모집업자들은 감언이설로 단기간에 고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좋은 근무조건임을 떠벌렸는데(p.39), 그것이 국가와 군이라는, 공적 기관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은 오히려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국가와 군을 좀 더 두려운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던 식민지의 ‘위안부’들과는 달리, ‘내지’의 ‘위안부’는 오히려 ‘내지’ 사람이기 때문에 국가주의 논리에 더욱 취약했을 수 있다.
더군다나 메이지 유신 이래 지속된 국가의 신성화, 군의 절대화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행해졌다는 점은, 더더욱 많은 여성들이 실제와는 다른 사기 광고에 속아, 안심하고 ‘위안부’가 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지’적 성격이 요구되었던 ‘위안부’
위안소는 ‘내지’의 연장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만 하다.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에는 ‘내지’의 모방으로서의 성격을 강요받았다. 위안소는 현지의 이름이 아닌 ‘내지’의 이름을 간판에 내걸었고, ‘위안부’는 ‘내지인’의 이름으로 불렸다.
‘내선일체’ 같은 표어, 조선인 ‘위안부’들이 했다던 “(일본인과 조선인은)천황 폐하가 같다”는 표현은 그만큼 제국의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 간에 격차와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동시에, 위안소 또한 ‘내지’의 성격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일부 ‘위안부’들에게는 오히려 식민지적 특색을 그대로 지니도록 요구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나카자토 치요, 일본 민의련 인터뷰, 2015), 위안부들에게 요구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내지’의 속성이었다.
동향 ‘위안부’의 모집
그렇다면 ‘내지’의 모방이 아닌, ‘내지’ 그 자체인 일본인 ‘위안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내지’의 요릿집이 그대로 전선으로 옮겨간 경우도 있었거니와(p.34), 군인들과 같은 고향 출신의 여성들을 모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p.29, 34). 특히 이 책에서는 위안부 모집이 본격화된 1938년의 사례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2.26 사건으로부터 2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2.26 사건의 배경에는 도호쿠 출신 장병들이 고향의 누이들이 유곽으로 풀려나가는 데 울분을 품었다는 점이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에 제법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나, 중일전쟁 이후로는 오히려 동향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모집하는 사례가 종종 나오고 있다. 일본군이 전반적으로 도덕적, 성적으로 무감각해진 사례라고 여길 수도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묘하게도, 동향의 여성들에게는 군인들이 쉽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군 상층부의 계산이라고도 생각된다.
영화 <난징! 난징!>에 묘사되는 어느 일본인 ‘위안부’처럼, 군인들은 일본인 ‘위안부’들에게 더욱 동질감을 느낀 듯한데, 식민지나 점령지 출신의 ‘위안부’가 겪은 것과 같은 극단적 사례가 좀처럼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단, 자신이 상대했던 군인들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일본인 ‘위안부’들에게, 그 군인들이 직접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 발설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므로, 아직 진술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위안부’
한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들이 있다. <제국의 위안부>가 조선인 ‘위안부’들을 모집한 조선인 업자들에게 주목했다면, 이 책은 일본인 업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조선인 업자들이 일본인 ‘위안부’들을 좀처럼 모집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데 반하여, 일본인 업자들의 경우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들까지도 모집을 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보면 일본인 업자들의 제국-식민지 질서 내에서의 우위가 드러나는 한편, 그러한 우위를 바탕으로 자본가적 성격 또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에게 ‘위안부’는 일종의 자본이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 내에서 자본의 이동이 원활하게 이뤄지듯, ‘위안부’들 또한 수요에 따라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를 넘나들게 되었다. ‘위안부’ 사업은 확장에 따라 더욱 큰 규모로, 더욱 다양한 지역에 걸쳐 전개되기도 하며 심지어 이들 자본을 공유, 세습할 수도 있었다.
부부가 함께 위안소를 경영한 사례(p.45)는 물론, 위안소 업자였던 아버지를 아들이 계승해서 사업을 이어가는 사례(p.32)를 보면 비정상적이고도 ‘일시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지 또는 후방의 식민지보다는 전장의 요구가 우선시되고 있음을 볼 때(p.33), 제국주의 내지 군국주의의 비인간성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논리가 기저에 흐르고 있다는 점, 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일체화되어 있는 구조를 생각해 볼 만 하다.
‘위안부’ 제도에 내재된 파국의 씨앗
생각해보면, 위안부 제도의 등장 그 자체야말로 전쟁의 장기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선의 확대에 따라 휴가, 귀향의 기회 또한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위안부’의 제도화는 의미심장하다. 일본군의 성적 착취가 식민지와 점령지를 넘어, ‘내지’에서도 전개되었다는 것은, 제국 붕괴의 전조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편, 일본 정부는 근대의 천황제와 제국 질서를, 신민들에 대한 ‘일시동인’의 명분으로 정당화고자 했으나, 이미 신민들 내부에는 계급 구조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나이로는 어리고, 성별로는 여성이며, 경제적으로는 곤란한 처지에 처한 이들이 ‘위안부’가 되었다.
착취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위안부’의 비극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전시 체제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훗날 소년층을 대상으로까지 하여 전개된 ‘근로 동원’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나라를 위해’라는 ‘위안부’ 서사의 이면
한편으로는 일본인 ‘위안부’는 식민지 출신과는 달리 더욱 적극적으로 ‘위안부’가 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식민지 및 점령지 여성들에 비해, 일본 여성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가 많았다(p.154 등).
조선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기 등을 통한 모집을 겪기도 했었지만, 그들 스스로 야스쿠니에 합사된다는 기대를 품기도 했을 만큼(p.40), 분명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분에 감응한 사례도 있었으며, ‘내지’ 출신의 위안부로서 일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도 하다. 다만 이는 단순히 애국 논리로만은 볼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결코 사람들에게 ‘소녀’라고 불릴 수 없는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모집되었다는 점 역시 조선인 ‘위안부’와 구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녀로 형상화되는 경우가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과는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에는 이미 ‘추업’이라 불리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상태에서 모집된 경우가 많았다. 일본인 ‘위안부’들이 종종 ‘나라를 위한다’라고 진술한 배경에는, 국가가 내세운 명분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추업’의 상태로 전락했다는 심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괴로움을 생각하게 된다. 그 점에서 조선 출신의 경우에는 ‘위안부’ 이전의 삶과 단절되어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하여, 일본 출신의 경우 ‘위안부’ 이전의 ‘추업’이라 불리던 생활상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를 통해 전시의 ‘위안부’ 문제 뿐만 아니라, 여성 인권 문제 전반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한편, 일본인 ‘위안부’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라를 위해...수고가 많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전후에도 기억했으며, ‘위안부’ 시절이 더 나았다고 회상하는 일부의 증언, 게이샤가 되었어도 ‘위안부’로서의 과거를 서로 숨겨야 했던 구술, 심지어 패전 이후에도 ‘위안부’ 시절 알게 된 군인들과 교류했던 사례 등을 읽다 보면, 그들이 전쟁 전은 물론 패전 이후에도 사회로부터 극심한 차별과 격리를 받았다는 점은 물론, ‘국가를 위한다’던 명분이 무색하게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 점에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전후 국가적, 사회적 차원의 처우 문제에 관해 살펴볼 수 있다.
전후에 분명히 드러나는 일본 정부의 ‘위안부’ 인식
‘츠구나이’ 논란이 시사하는 것처럼,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강제동원 여부 그 자체로 논의를 국한시키는 한편, ‘위안부’ 제도의 본질이나 ‘위안부’ 개인의 삶에 관해서는 모호한 영역으로 남겨 둔 채, 구체화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만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 차원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사례는, 오히려 패전 이후 미군 점령 시기 일본 정부 측의 용어 사용으로부터 드러난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미군 점령 시기로 계승되었고, ‘위안부’들은 미군을 상대하게 되었으며, 당시 ‘위안부’ 활동을 ‘여성 특공’으로 명명하기도 했다(p.249). 근현대 일본에서 ‘특공’이란 ‘가미카제’로 알려져 있는 자살공격을 뜻하는 공식 군사 용어였다. ‘여성 특공’이란 용어는 전쟁 당시 미군을 상대하기 위한 ‘특공’과, 패전 이후 ‘위안부’들이 미군을 상대하는 행위에 일면 동일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그러나 ‘위안부’ 용어의 계승, ‘특공’이라는 명명, 미군을 대상으로 한 ‘성에 대한 굶주림’이란 인식을 통해, 전쟁 전 일본군을 상대로 한 ‘위안부’ 활동 또한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여성 특공’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코 동등한 동일시로 볼 수 없으며, 기지촌 내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애국자’라 명명한 것과 같이 기만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특공’이라 불리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일관계사는 주로 고대와 근대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나, 근대의 한일관계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이 현대에 들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띤다. 현대 한일관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특공’의 이면
‘위안부’라는 존재 양식이 그 명칭까지 이어받을 만큼 연속성을 지닌다면, 더군다나 시간적 단절 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던 것이라면,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 역시 연속성을 지닌 것이며, ‘성에 굶주린 미군’ 이전에 ‘성에 굶주린 일본군’을 상대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전시체제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표면화될 수 없었던 인식이, 타자였던 미군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미군에 대한 ‘특공’이 패전과 함께 끝난 뒤에, 일본인 ‘위안부’에게 여전히 ‘특공’이 강요되었다는 점, 더군다나 대전기 수년 간 증오하도록 강요되어 온 미군을 상대해야 했음을 보면, 그나마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지었음은 물론 한국전쟁의 ‘은인’으로 인식되기도 하는 한반도의 미군을 상대했던 이들보다도 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동시에 전쟁 당시의 의식이 공적 활동의 이면에 지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패전 후에도 상당 기간 남아 있던 미군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위안부’ 활동이 특공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전제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들어 있기도 하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유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 조성을 둘러싸고 한때 일본 정부가 내걸었던 ‘츠구나이(償い)’라는, 다소 복합적인 용어가 한국 언론을 통해 배상(atonement)이 아닌 보상(compensation)으로 번역되면서, 합의가 불발에 이른 사례를 언급했다. 한편, 이 책에 실린 원고에서 연구자 히로타 가즈코는 책의 기획자이기도 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인원들이, “지금 무엇을 하면 ‘위안부’였던 분들께 ‘츠구나이’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p.220).
외견상 한국에서는 ‘배상’문제로 접근하면서 하나의 해결책을 추구하는 한편, 일본 정부 및 리서치 액션센터를 비롯해, 일본 측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 ‘츠구나이’라는 다양한 차원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츠구나이’란 어느 하나의 의미로 대응될 수 없는 것인 만큼, ‘위안부’ 문제 또한 다면적인 처우를 수반하는 해결이 요구될 것이다. 이는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이라고 알려진 데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개념 자체를 모호하게 규정함으로써 ‘위안부’ 제도의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고, ‘배상’이라는 직접적인 표현만은 피하는 동시에, 어감의 차이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유발하고, 마침내 결렬에 이르게 함으로써 상대 측에 그 책임을 지우는 기법으로도 읽히기도 한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와의 연대 필요성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츠구나이’ 번역과 관련해 한국 측에서 일을 그르친 듯이 서술되어 있지만, 이 책을 통하여 일본 정부는 자국 내 ‘위안부’들에게조차 ‘츠구나이’가 무엇이든 그조차 하지 않은 듯이 여겨진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 ‘위안부’들에게 ‘은급(恩給공적 임무를 수행한 자 혹은 유족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연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과거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황국’, ‘황군’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는 전쟁은 ‘성전’이 되어야 하는 만큼, ‘위안부’ 제도의 실상, 그리고 그 강제성에 대해서는 자체적인 논리에 의해 그 제도의 창설 당시부터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군인들과 그들의 친족들이 일본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자국 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일본이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것이라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완벽하게 타자로 인식되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책임 있게 해결하라는 외침은 정당하고도 호소력은 높은 것이나, 일본 국내에서의 정책 변동을 이끌어내기는 요원한 듯이 보인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면, 이제는 자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일본인 ‘위안부’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인 인권 문제, 여성 인권 문제로도 여겨지고 있는 만큼,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함께 해결할 만한 당위성은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통해, ‘위안부’ 제도의 불법성과 폭력성, 그리고 국가의 무책임이 어우러지는 모순은 더욱 더 분명해진다. 이 책의 표지, 그리고 속지 곳곳에는 두 개의 빈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자리 중 하나는 물론 조선인 ‘위안부’의 소녀상이 앉을 자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옆의 의자는 누구의 것일까?
지금껏 소녀상의 양적인 팽창 뿐만 아니라 강제징용 노동자의 상이 함께 세워지는 등 민족 차원에서의 접근이 이뤄졌고 그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혹은 타국 출신 ‘위안부’의 상이 소녀상과 함께 했다.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 그동안 가해국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부각되어 온 반면, 피해자로서의 측면은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조차 무시되어 왔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나머지 빈 자리는 일본인 ‘위안부’의 자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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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3
폴 카틀리지 지음, 이상덕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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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세계 자체를 책으로 형상화한, 작고 거대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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