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위안부' - 애국심과 인신매매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2
니시노 루미코.오노자와 아카네 엮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 논형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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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어요?”
교무실과 교실 오가며 책을 읽고 있으니, 어떤 학생이 물었다. 그러나 나 역시 한동안은 식민지, 또는 점령지 여성들로만 ‘위안부’를 만든 줄 알고 있었다. 비로소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 것은 그 유명한 <#제국의위안부>(박유하)를 통해서였다.
그동안 우리에게 ‘위안부’ 문제는 언제나 민족 문제였기 때문이다. 종종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분노를 “일본에게 똑같이 되돌려 줘야 한다” 라는 격앙된 발언이 나오곤 하는데, 이는 ‘위안부’ 문제가 어디까지나 민족 문제라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때로는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 인권 문제, 여성 인권 문제로도 여겨져 왔으나, 어떻게 규정하든 그것은 민족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하나의 표어라는 측면이 있었다.
그 점에서 가해국 국민이었던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관심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박유하가 이야기했던 제국의 일부였던 식민지 조선의 ‘위안부’들을 제외한, 제국의 나머지 부분의 ‘위안부’들, 그 중에서도 ‘내지’의 ‘위안부’들에 주목한다면 ‘위안부’ 문제는 다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외면받아 온 ‘일본인’ 위안부의 조명

일본 근현대사에 관한 여러 논저를 펴내 온 논형에서는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총서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리고 첫번째 번역서인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니시무라 히데키)에 이어, 그 두번째 책을 펴냈다. 바로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제1장에서는 일본인 ‘위안부’의 모집 과정에서 나타난 불법성, 군의 주도는 물론 외무성 및 해외 영사관과 내무성 및 경찰의 묵인, 방조, 그리고 조력 문제를 다뤘다. 이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된다.
제2장은 일본인 ‘위안부’의 전시 생활상을 다루었는데, 조선인 ‘위안부’가 겪은 것과 같은 참상은 드러나진 않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일본인 ‘위안부’가 상대적으로 나은 지위를 차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제국 내부의 민족 차별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제3장에서는 패전 이후 일본인 ‘위안부’의 운명을 다루는데, 이를 통해 일본 정부, 그리고 사회에서 일본인 ‘위안부’를 수십 년에 걸친 외면하여 온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입장도,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입장 수준을 결코 넘어서지 않을 것이며,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 또한 지난함을 인식하게 된다.
‘내지’ 출신 여성과 국가주의의 관계
먼저, 일본인들이 ‘위안부’가 된 데에는 국가나 군에 대한 신뢰가 제법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증언에 따르면 이른바 ‘전차금’ 및 위안소 이용료는 군에서 일정 부분을 부담했다.(p.31, 39) 오늘날에도 전봇대나 게시판 등에 ‘꿀알바’ 라는 등, 어딘지 의심스런 곳에서 만들어진 듯한, 뭔가 으스스한 전단지가 붙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집 경로를 통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당시에도 비슷하게 모집업자들은 감언이설로 단기간에 고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좋은 근무조건임을 떠벌렸는데(p.39), 그것이 국가와 군이라는, 공적 기관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은 오히려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국가와 군을 좀 더 두려운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던 식민지의 ‘위안부’들과는 달리, ‘내지’의 ‘위안부’는 오히려 ‘내지’ 사람이기 때문에 국가주의 논리에 더욱 취약했을 수 있다.
더군다나 메이지 유신 이래 지속된 국가의 신성화, 군의 절대화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행해졌다는 점은, 더더욱 많은 여성들이 실제와는 다른 사기 광고에 속아, 안심하고 ‘위안부’가 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지’적 성격이 요구되었던 ‘위안부’
위안소는 ‘내지’의 연장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만 하다.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에는 ‘내지’의 모방으로서의 성격을 강요받았다. 위안소는 현지의 이름이 아닌 ‘내지’의 이름을 간판에 내걸었고, ‘위안부’는 ‘내지인’의 이름으로 불렸다.
‘내선일체’ 같은 표어, 조선인 ‘위안부’들이 했다던 “(일본인과 조선인은)천황 폐하가 같다”는 표현은 그만큼 제국의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 간에 격차와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동시에, 위안소 또한 ‘내지’의 성격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일부 ‘위안부’들에게는 오히려 식민지적 특색을 그대로 지니도록 요구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나카자토 치요, 일본 민의련 인터뷰, 2015), 위안부들에게 요구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내지’의 속성이었다.
동향 ‘위안부’의 모집
그렇다면 ‘내지’의 모방이 아닌, ‘내지’ 그 자체인 일본인 ‘위안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내지’의 요릿집이 그대로 전선으로 옮겨간 경우도 있었거니와(p.34), 군인들과 같은 고향 출신의 여성들을 모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p.29, 34). 특히 이 책에서는 위안부 모집이 본격화된 1938년의 사례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2.26 사건으로부터 2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2.26 사건의 배경에는 도호쿠 출신 장병들이 고향의 누이들이 유곽으로 풀려나가는 데 울분을 품었다는 점이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에 제법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나, 중일전쟁 이후로는 오히려 동향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모집하는 사례가 종종 나오고 있다. 일본군이 전반적으로 도덕적, 성적으로 무감각해진 사례라고 여길 수도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묘하게도, 동향의 여성들에게는 군인들이 쉽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군 상층부의 계산이라고도 생각된다.
영화 <난징! 난징!>에 묘사되는 어느 일본인 ‘위안부’처럼, 군인들은 일본인 ‘위안부’들에게 더욱 동질감을 느낀 듯한데, 식민지나 점령지 출신의 ‘위안부’가 겪은 것과 같은 극단적 사례가 좀처럼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단, 자신이 상대했던 군인들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일본인 ‘위안부’들에게, 그 군인들이 직접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 발설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므로, 아직 진술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위안부’
한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들이 있다. <제국의 위안부>가 조선인 ‘위안부’들을 모집한 조선인 업자들에게 주목했다면, 이 책은 일본인 업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조선인 업자들이 일본인 ‘위안부’들을 좀처럼 모집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데 반하여, 일본인 업자들의 경우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들까지도 모집을 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보면 일본인 업자들의 제국-식민지 질서 내에서의 우위가 드러나는 한편, 그러한 우위를 바탕으로 자본가적 성격 또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에게 ‘위안부’는 일종의 자본이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 내에서 자본의 이동이 원활하게 이뤄지듯, ‘위안부’들 또한 수요에 따라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를 넘나들게 되었다. ‘위안부’ 사업은 확장에 따라 더욱 큰 규모로, 더욱 다양한 지역에 걸쳐 전개되기도 하며 심지어 이들 자본을 공유, 세습할 수도 있었다.
부부가 함께 위안소를 경영한 사례(p.45)는 물론, 위안소 업자였던 아버지를 아들이 계승해서 사업을 이어가는 사례(p.32)를 보면 비정상적이고도 ‘일시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지 또는 후방의 식민지보다는 전장의 요구가 우선시되고 있음을 볼 때(p.33), 제국주의 내지 군국주의의 비인간성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논리가 기저에 흐르고 있다는 점, 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일체화되어 있는 구조를 생각해 볼 만 하다.
‘위안부’ 제도에 내재된 파국의 씨앗
생각해보면, 위안부 제도의 등장 그 자체야말로 전쟁의 장기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선의 확대에 따라 휴가, 귀향의 기회 또한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위안부’의 제도화는 의미심장하다. 일본군의 성적 착취가 식민지와 점령지를 넘어, ‘내지’에서도 전개되었다는 것은, 제국 붕괴의 전조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편, 일본 정부는 근대의 천황제와 제국 질서를, 신민들에 대한 ‘일시동인’의 명분으로 정당화고자 했으나, 이미 신민들 내부에는 계급 구조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나이로는 어리고, 성별로는 여성이며, 경제적으로는 곤란한 처지에 처한 이들이 ‘위안부’가 되었다.
착취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위안부’의 비극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전시 체제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훗날 소년층을 대상으로까지 하여 전개된 ‘근로 동원’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나라를 위해’라는 ‘위안부’ 서사의 이면
한편으로는 일본인 ‘위안부’는 식민지 출신과는 달리 더욱 적극적으로 ‘위안부’가 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식민지 및 점령지 여성들에 비해, 일본 여성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가 많았다(p.154 등).
조선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기 등을 통한 모집을 겪기도 했었지만, 그들 스스로 야스쿠니에 합사된다는 기대를 품기도 했을 만큼(p.40), 분명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분에 감응한 사례도 있었으며, ‘내지’ 출신의 위안부로서 일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도 하다. 다만 이는 단순히 애국 논리로만은 볼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결코 사람들에게 ‘소녀’라고 불릴 수 없는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모집되었다는 점 역시 조선인 ‘위안부’와 구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녀로 형상화되는 경우가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과는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에는 이미 ‘추업’이라 불리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상태에서 모집된 경우가 많았다. 일본인 ‘위안부’들이 종종 ‘나라를 위한다’라고 진술한 배경에는, 국가가 내세운 명분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추업’의 상태로 전락했다는 심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괴로움을 생각하게 된다. 그 점에서 조선 출신의 경우에는 ‘위안부’ 이전의 삶과 단절되어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하여, 일본 출신의 경우 ‘위안부’ 이전의 ‘추업’이라 불리던 생활상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를 통해 전시의 ‘위안부’ 문제 뿐만 아니라, 여성 인권 문제 전반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한편, 일본인 ‘위안부’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라를 위해...수고가 많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전후에도 기억했으며, ‘위안부’ 시절이 더 나았다고 회상하는 일부의 증언, 게이샤가 되었어도 ‘위안부’로서의 과거를 서로 숨겨야 했던 구술, 심지어 패전 이후에도 ‘위안부’ 시절 알게 된 군인들과 교류했던 사례 등을 읽다 보면, 그들이 전쟁 전은 물론 패전 이후에도 사회로부터 극심한 차별과 격리를 받았다는 점은 물론, ‘국가를 위한다’던 명분이 무색하게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 점에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전후 국가적, 사회적 차원의 처우 문제에 관해 살펴볼 수 있다.
전후에 분명히 드러나는 일본 정부의 ‘위안부’ 인식
‘츠구나이’ 논란이 시사하는 것처럼,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강제동원 여부 그 자체로 논의를 국한시키는 한편, ‘위안부’ 제도의 본질이나 ‘위안부’ 개인의 삶에 관해서는 모호한 영역으로 남겨 둔 채, 구체화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만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 차원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사례는, 오히려 패전 이후 미군 점령 시기 일본 정부 측의 용어 사용으로부터 드러난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미군 점령 시기로 계승되었고, ‘위안부’들은 미군을 상대하게 되었으며, 당시 ‘위안부’ 활동을 ‘여성 특공’으로 명명하기도 했다(p.249). 근현대 일본에서 ‘특공’이란 ‘가미카제’로 알려져 있는 자살공격을 뜻하는 공식 군사 용어였다. ‘여성 특공’이란 용어는 전쟁 당시 미군을 상대하기 위한 ‘특공’과, 패전 이후 ‘위안부’들이 미군을 상대하는 행위에 일면 동일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그러나 ‘위안부’ 용어의 계승, ‘특공’이라는 명명, 미군을 대상으로 한 ‘성에 대한 굶주림’이란 인식을 통해, 전쟁 전 일본군을 상대로 한 ‘위안부’ 활동 또한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여성 특공’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코 동등한 동일시로 볼 수 없으며, 기지촌 내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애국자’라 명명한 것과 같이 기만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특공’이라 불리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일관계사는 주로 고대와 근대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나, 근대의 한일관계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이 현대에 들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띤다. 현대 한일관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특공’의 이면
‘위안부’라는 존재 양식이 그 명칭까지 이어받을 만큼 연속성을 지닌다면, 더군다나 시간적 단절 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던 것이라면,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 역시 연속성을 지닌 것이며, ‘성에 굶주린 미군’ 이전에 ‘성에 굶주린 일본군’을 상대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전시체제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표면화될 수 없었던 인식이, 타자였던 미군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미군에 대한 ‘특공’이 패전과 함께 끝난 뒤에, 일본인 ‘위안부’에게 여전히 ‘특공’이 강요되었다는 점, 더군다나 대전기 수년 간 증오하도록 강요되어 온 미군을 상대해야 했음을 보면, 그나마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지었음은 물론 한국전쟁의 ‘은인’으로 인식되기도 하는 한반도의 미군을 상대했던 이들보다도 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동시에 전쟁 당시의 의식이 공적 활동의 이면에 지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패전 후에도 상당 기간 남아 있던 미군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위안부’ 활동이 특공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전제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들어 있기도 하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유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 조성을 둘러싸고 한때 일본 정부가 내걸었던 ‘츠구나이(償い)’라는, 다소 복합적인 용어가 한국 언론을 통해 배상(atonement)이 아닌 보상(compensation)으로 번역되면서, 합의가 불발에 이른 사례를 언급했다. 한편, 이 책에 실린 원고에서 연구자 히로타 가즈코는 책의 기획자이기도 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인원들이, “지금 무엇을 하면 ‘위안부’였던 분들께 ‘츠구나이’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p.220).
외견상 한국에서는 ‘배상’문제로 접근하면서 하나의 해결책을 추구하는 한편, 일본 정부 및 리서치 액션센터를 비롯해, 일본 측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 ‘츠구나이’라는 다양한 차원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츠구나이’란 어느 하나의 의미로 대응될 수 없는 것인 만큼, ‘위안부’ 문제 또한 다면적인 처우를 수반하는 해결이 요구될 것이다. 이는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이라고 알려진 데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개념 자체를 모호하게 규정함으로써 ‘위안부’ 제도의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고, ‘배상’이라는 직접적인 표현만은 피하는 동시에, 어감의 차이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유발하고, 마침내 결렬에 이르게 함으로써 상대 측에 그 책임을 지우는 기법으로도 읽히기도 한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와의 연대 필요성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츠구나이’ 번역과 관련해 한국 측에서 일을 그르친 듯이 서술되어 있지만, 이 책을 통하여 일본 정부는 자국 내 ‘위안부’들에게조차 ‘츠구나이’가 무엇이든 그조차 하지 않은 듯이 여겨진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 ‘위안부’들에게 ‘은급(恩給공적 임무를 수행한 자 혹은 유족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연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과거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황국’, ‘황군’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는 전쟁은 ‘성전’이 되어야 하는 만큼, ‘위안부’ 제도의 실상, 그리고 그 강제성에 대해서는 자체적인 논리에 의해 그 제도의 창설 당시부터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군인들과 그들의 친족들이 일본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자국 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일본이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것이라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완벽하게 타자로 인식되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책임 있게 해결하라는 외침은 정당하고도 호소력은 높은 것이나, 일본 국내에서의 정책 변동을 이끌어내기는 요원한 듯이 보인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면, 이제는 자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일본인 ‘위안부’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인 인권 문제, 여성 인권 문제로도 여겨지고 있는 만큼,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함께 해결할 만한 당위성은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통해, ‘위안부’ 제도의 불법성과 폭력성, 그리고 국가의 무책임이 어우러지는 모순은 더욱 더 분명해진다. 이 책의 표지, 그리고 속지 곳곳에는 두 개의 빈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자리 중 하나는 물론 조선인 ‘위안부’의 소녀상이 앉을 자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옆의 의자는 누구의 것일까?
지금껏 소녀상의 양적인 팽창 뿐만 아니라 강제징용 노동자의 상이 함께 세워지는 등 민족 차원에서의 접근이 이뤄졌고 그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혹은 타국 출신 ‘위안부’의 상이 소녀상과 함께 했다.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 그동안 가해국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부각되어 온 반면, 피해자로서의 측면은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조차 무시되어 왔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나머지 빈 자리는 일본인 ‘위안부’의 자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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