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혼백의 길
메도루마 슌 지음, 조정민 옮김 / 모요사 / 2025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에 관해서는 역시 몇년 전, 『철의 폭풍』이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다. '철의 비(鉄の雨)', '철의 폭풍(鉄の嵐)'란, 오키나와의 땅과 바다에 퍼부어진 (주로 미군 측의)포탄, 그로 인해 초토화된 오키나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끔찍한 일은, 바로 본국인 일본, 우군인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사'이다.
머리말을 통해 정리한 키워드는 크게 3가지, '차별', '전쟁', '집단사'이다.
사람들이 한일 역사갈등을 이야기할 때마다 왠지 모를 갈증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한일이라는 이분법으로 담아낼 수 없는 존재들, 아니, 존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들이 그와 같은 이분법 구도에는 배제되어 있는 탓이다.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은 어느 정도 익히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그에 대해 생명력, 이미 초토화된 그 전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표현이 왠지 기괴하게는 여겨질지라도, 내가 일본, 오키나와를 이야기할 때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꼈던 것을 이 책을 통해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혈근황대, 히메유리대 등등, 오키나와인들은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죽음으로 내몰렸을 뿐 아니라 제 손으로 서로를, 심지어는 혈육을 죽이도록 강요받았다. <혼백의 길>에서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이지 못해 낯선 군인의 손으로 죽여 달라던 빈사의 어머니의 심정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아이의 의식을, 그리고 그것을 트라우마로 간직하게 된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을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죽였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는 제 손으로 그것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만 남았을 뿐, 이를 지휘하고 명령한 이들에게는 남지 않았으리라. 6월 23일, 오키나와 전투 위령일 지정은 그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의 자결을 위령할 뿐이 아닌가. 미군이 오면 다 죽는다던 당시의 국가와 군부는 뻔뻔스럽게도 살아남았고, 오직 오키나와인들만이 국가와 군부가 강요한 전쟁의 적, 미군과 함께 지금도 공존을 강요받고 있다. 오스프리라는 표상과 함께.
미야기 씨가 이야기해 준, 동료의 혀에 묻혀 준 침 한 방울, 야스요시 씨가 이야기해 준 빈사의 중학생의 몸에서 나왔다는 이슬, 그리고 죽은 야스요시 씨의 입에서 나온 마른 밥알. 각각의 이야기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있다.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을 이야기할 때 그건 주로 미군과 일본 본토, 미군과 오키나와, 본토와 오키나와라는 대립구도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장에서는 오키나와 내부, 오키나와인들 사이의 벽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같은 역사 문화를 공유한 이들, 같은 트라우마를 지닌 이들 사이에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은 존재한다는 것을. '이슬'이 실제로는 무엇이었지는 확실치 않지만, 야스요시 씨는 몇 번이나 자신이 '이슬'을 먹고 살아났다고 했다. 긴조 씨는 야비한 농담이나 지껄였지만, 사실 '이슬'의 실상은 그보다도 더 처참한 것이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전쟁을 겪고 나이도 더 많은 우에하라 씨나 미야기 씨보다도 더 젊은 나이에 야스요시 씨는 죽어 버렸다. 야스요시 씨는 자신의 기억을 '이슬'이라 여기며 겨우 살아남았는데, 동료들은 그 기억을 비웃고 굳이 들춰내고자 했다. 이해받지 못한 벽이 그를 결국 죽여버린 것은 아닐까.
갑작스레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우에하라 씨네 부대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을 리 없고, 미야기 씨가 동료의 혀에 침을 발라 줬다는 것도 거짓일지 모른다. 그들은 또한 무엇을 숨기고 있었을까.
후미야스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자신의 아버지, 가쓰에이를 스파이라는 구실로 처형한 본토 출신 일본군 청년장교 아카자키를 우연히 마주하고 뒤를 밟는다. 그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본토 출신 인물들의 공모와 침묵, 차별이었다. 본토인들은 전쟁 중에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오키나와를 짓눌렀고, 전후에는 오키나와인들에게 저지른 짓에 대해서 침묵의 공모로 여전히 오키나와를 짓누르고 있다. 그 구도를 후미야스는 바꾸어놓지 못했지만 알을 낳는 바다거북은, 그리고 후대의 신 뱀장어의 존재는 이야기한다. 그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는 대를 이어서 전해질 것이라고, 그러나 대를 이어도 쉽사리 바뀌지는 않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