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홍범도 - 송은일 장편소설
송은일 지음 / 바틀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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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것은 영웅의 귀환 소식을 듣고 있던 무렵이었다. 민중은 그를 가리켜 나는 홍범도라고 불렀다. 생각해보면 고대로부터 민중은 사나운 이민족을 오랑캐라 부르며 두려워했고, ‘오랑캐를 격파한 장군을, 나는 장군, 비장군(飛將軍)’이라 칭송했다. 소설 속 민중은 임진란 때의 이야기를 마치 엊그제 일처럼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아직 임진란을 치른 왕조의 백성이었고, 지금은 일제의 침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홍범도는 그토록 기다려왔던 비장군이었다. 소설의 제목은 홍범도의 별명이자 생애였으며, 민중의 기다림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민중이 홍범도에게 품었던 각별한 마음은, 홍범도가 홍경래의 후예라는 설화에서도 드러난다. 민중은 진실로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그래서였을까, 소설에서 홍범도는 스스로 홍경래의 고손자로 자처한다. 이를 통해 한때 역도로 불렸던 홍경래, 그와 함께한 민중들은 홍범도의 독립 투쟁을 거쳐 명예를 회복하는 한편, 그들의 못다 이룬 꿈이 홍범도를 통해 부활하는 장치였다. 이렇게 소설은 홍범도의 입을 통해 민중의 여망을 구현한다.


한편, 민중들은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이야기한다. 단군의 전설부터 이성계의 꿈, 호랑이에 관한 소문들이 소설 속, 그리고 실제로도 홍범도가 살았던 산속을 떠돌고 있다. 한반도의 수많은 신화는 산속으로부터 시작되며, 소설 속 홍범도의 이야기 또한 산속의 중봉에서 시작된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홍범도의 이야기 역시 신화적 성격을 지니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홍범도의 신화는 소설 전개 과정에 걸쳐 점차 고조되며, 봉오동, 청산리에서의 전설적인 승리로 정점에 이른다.


그렇지만 신화 속 영웅은 승리하기만 했던가. 철령 협곡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을 때, 홍범도는 오히려 설움을 느꼈다. 그가 한평생 싸우는 동안 첫 동지 김수협을 비롯해 수많은 동료를 잃었고, 지난 싸움과 다가올 싸움의 사이에는 아내 옥영과 맏아들 용범이 북청 주둔 일본 헌병대의 손에 죽었다. 크게 승리할 때마다, 오히려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잃었다. 그리고 홍범도를 시기하거나 밀고하는 자들이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첫 동지와 만났을 때, 홍범도는 술에 취해 있었고, 울고 있었다. 잠시 만삭의 아내를 잃어버린 때였던 탓이었을까, 어쩌면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는 싸워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자기 삶을 아편쟁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그가 민족의 운명을 이끌었던 것만큼이나, 스스로 민족의 운명에 휘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앞장서, 한복판에서 싸웠기에 그는 더욱 괴로워했다. 그의 싸움은 당장의 승리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피를 흘려야 했으므로, 싸우기 위해 동지들을 잃었다. 자신과 동지들의 피는 언제나, 빈사의 상태에 놓인 독립 전쟁의 숨결을 이어가는 마지막 한 물 한 모금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새로 동지가 되고자 홍범도를 찾아왔다. 그 수는 수 명에서 수십, 그리고 수백으로 늘어났으니, 우리의 독립운동 또한 이와 같은 것이었다.


홍범도는 언제나 민중과 함께 있었다. 그 스스로가 민중이었다. 홍범도라는 이름은 그 혼자만의 이름이 아니며, 홍범도의 싸움은 민중의 싸움이었다. 민중은 그들 자신과 가까이 있었던 이들을 영웅으로 기억함으로써, 홍범도를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저마다 스스로 홍범도가 되고, 스스로 영웅이 되었다.


한때 홍범도가 대장으로 섬겼던 유인석은 여전히 신분 질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유인석이 상민 출신 선봉장 김백선을 처형하는 데서 신분 질서의 모순은 극대화된다. 실제로는 총살형이었던 이 사건은 소설에서는 참수형으로 묘사되어 그 비극성을 더한다. 이에 홍범도가 유인석 등 수뇌부를 꾸짖으며 의진을 떠난다. 이는 신분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또한 유인석으로 상징되는 군주 국가에서, 홍범도로 상징되는 민주 국가로 나아가는 태동이었다. 소설은 이렇게 홍범도를 부각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등장했음을 선포한다.


소설은 봉오동·청산리에서 거둔 큰 승리로 마무리된다. 봉오동과 청산리로 가는 길은 조국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홍범도의 싸움터는 북방으로 자꾸 밀려나고 있었다. <날으는 홍범도가>에서는 홍(범도) 대장 가는 길에 일월이 명랑하다 했건만, 사실 그가 지나온 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홍범도의 나머지 삶을 알고 있다. 식민지 백성이 된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었듯, 카자흐로의 강제 이주 또한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그러나 독립 전쟁이 그러했듯이, 홍범도, 혹은 민중의 또 다른 이름은 카자흐의 불모지에 또 다른 세상을 이뤄냈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으나, 이제 조국은 독립되었으며 홍범도는 돌아왔다. 그의 귀환은 어느 영웅의 귀환이 아닌, 민중의 귀환이었다. 그의 전설과 같이, 정말로 날아서 왔다.


우리가 홍범도의 유골에 이토록 감격하는 것은, 그가 맞서 싸운 시대가 남긴 문제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홍범도와 그 시대의 민중들은 바라던 조국에 묻혔으며, 자신들의 싸움을 마쳤다. 그리고 우리들의 차례가 되었다. 분명한 것은, 안될 것 같은 독립을 그들이 이뤘으며, 멀기만 한 조국에 그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앞날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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