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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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번역체가 너무너무 읽기 힘들었다. 나도 말이 무슨 소설책 말투라든지, 문어체라든지 하는 소릴 자주 듣곤 하는데, 그런 내가 불편하다고 느꼈을 정도면 도저히 읽을 만한 번역이라 하기 힘들 것 같다. 그 때문에 <파리대왕>의 장면 장면들은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지 않았으며, 더더욱 기괴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소설의 배경은 전쟁 중, 혹은 전후(戰後)라고 느껴졌다. 누군가는 영국에 원자폭탄이 터졌다는 언급이 있다고 하던데, 다시 읽어 볼 땐 아무래도 그런 내용 대신 이런 것만 보였다.

"그때 분 폭풍이 바다로 몰고 갔어."(p.10)

원자폭탄이 만들어 낸 폭풍일까, 아니면 그냥 망망대해에 불어오는 폭풍이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소년들을 더욱 전율하게 할 것이었다.



추락한 비행기, 공중전, 낙하산에 매달린 시체. 심지어 소년들을 구해주러 온 것도 순양함의 커터를 타고 온 해군 장교.

Distopia. '미래'라는 건 지금보다 더 발전하거나 찬란하기만 한 게 아니다. 과학기술면에서는 어떨까? 오히려 더 후퇴할지도 모른다. 전쟁을 경험해보았다면 이런 예감쯤은 쉽게 할 수 있을까.



전개는, 살아남은 소년들이 무리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제 역할을 하다 내분을 일으키는데, 이들의 역할은 섬에서의 생존(①)이냐, 아니면 구조(②)냐로 대립되고 있다. 둘 다 생존을 위한 활동이지만, ①은 외부 세계의 존재를 전제로 한 생존 방식으로, 어떤 궁극적인 생존을 의미한다. 한편, ②는 섬 자체에서 자급자족 가능한 생활 양식으로, 일시적인 영위라고 볼 수도 있겠다. ②를 맡은 소년들은 사냥 등으로 우위를 점하고, 동시에 ①이 요구하는 봉홧불 올리기를 무시한다. 마치 고의적으로 봉홧불 올리기를 무시하는 게 아닐까 할 정도였다.



그래도 규칙이란 것이 있다. 그 규칙은 소라에서 나는 신호로 상징된다. 자신들이 이미 알던 세계가 멸망한 듯한 상황에서도, 그 멸망한 듯한 세계의 규칙은 어느 정도까지는 지속된다. 그러다 결국엔 소년들은 잔인한 동물적 본성으로 돌아간다.



유일한 어른인 해군 장교가 등장하기 전까진, 아이들이 인류 전체였다. 다른 세상이 절멸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핏한 단서로 외부 세계는 있으리라 암시되지만, 한정된 시공간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만큼 여전히 의문스럽다. 다른 세상, 그들을 제외한 모두는 존재하는지.



어른들이 없다면, 아이들 사이엔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에 힘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 해군장교가 나타나자, 애들은 다시 애들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해군 장교와 같은 어른들 역시, 전쟁을 일으켰을 이들로, 본질에서는 애들이나 어른들이나 다를 것이 없다.



어른들의 전쟁으로, 그리고 아이들의 싸움으로 섬은 불길로 뒤덮였다. 모두를 궤멸시키려던 그 전화(戰火가, 순양함이 애들을 구조하러 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역설일까.



인간 본성의 어두움과 어리석음을 다룬 이 소설. 놀이, 전쟁은 결국 본질에서 같은 것일까. 어른들이 보기에만 그러진 않을 것이다.



집단 따돌림, 외부인(이방인), 배제된 자, '돼지'의 존재. 얼굴에 분칠을 하고 '야만인'이 되어 버린, 인간은 사소한 것으로도 인간성을 너무나도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 자기 파괴적이고, 고집스런, 계속 자신의 믿음을 고집하는, 인간이란...



아, 생각해보니 윌리엄 골딩은 해군 중위로 제대한 뒤 교사로 살다 갔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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