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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ㅣ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평점 :
중화인민공화국. 세계 인구의 4반을 거느린-이 표현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아직 나는 찾지 못했다-제국은, 진대 이후로 여전히 제국으로 남아 있다. 제국은 한때 민국을 비롯하여, 수많은 가능성과 시도를 점쳤지만 그 끝은 제국으로 귀결되었다. 황제가 없음에도, 신격화되고 종신 집권하는 지도자, 이에 복종하는 인민-아니, 신민(臣民), 사상 최대 규모의 관료제-공산당, 그리고 식민지-시짱(티베트), 신장(위구르) 등.
그러나 수많은 세기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그 자체가 혁명을 형상화한 것처럼 여겨졌으며, 그것을 형상화한 것은 마오쩌둥-이제는 '마오'라는 성을 지닌 수많은 중국인들을 지워버리고, 오직 그만이 '마오'였다. 역사상 어느 누구도 그만큼이나 철저하고 광범위한 굴복을 이뤄내지 못했고, 그만큼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신은 다른 신에게 언제나 배타적이고 잔혹했으므로, 그가 종교에 대하여 취한 태도를 고려하면 그는 역시 신이었다. 그러나 구약에 나오는 신보다도 더 무자비한 것은, 그에게는 영원한 백성이 없었고, 신봉자들에게조차 신의 채찍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마오는 혁명의 아이콘이었고-특히나 68년의 좌파들에게는 더더욱. 우파에게는 현세에 도래한 마왕이었다. 어느 것이나, 마오가 전지전능하였다는 것은 좌우가 공히 인정한다. 단, 그것은 그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고, 유지 강화하는 데에 한해서였으며, 정책의 성공까지를 의미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 정책이 자신의 신격화에 있었다면, 그것만큼은 분명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프랑크 디쾨터의 서술은 단순한 서술에 머물지 않는다. 독자는 어느 순간 수많은 기록과 증언의 바다-피바다 속을 헤엄친다. <인민>을 위한 혁명, <인민>이 이뤄낸 혁명이라고 믿었던 붉은색이, 사실은 혁명의 적-<지주>, <반동분자>, <부농>들, 그리고 <인민>들의 피로 물든 것이라는 것을 서구 세계는 너무 늦게 깨달았고, 중국의 인민들은 너무 빨리 깨달았다. 그 피를 쏟아 내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므로!
공산주의는 역사와 그 발전을 믿는다. 그러나 인간까지 믿지는 않는다. 수많은 제도, 이를 위한 할당량, 또 그것들을 위한 감시는 이 사상-체제가 철저히 인간에 대한 불신에 기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주의 혁명의 지도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혁명마저도 믿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중국 대륙은 대약진 운동부터 잘못되었다고, 그리고 문화대혁명은 그 잘못에서 하나도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나, 이미 이 당의 탄생과 성장 과정부터 결정적이고 불가역적인과오들이 존재했음을 기록으로 증명한다. 중국 공산당은 이미 혁명의 적들 뿐만 아니라 인민을 혁명의 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한편, 혁명의 적으로 몰린 인민들, 혹은 중국 공산당이 그리도 찬탄해 마지않는 농민, 노동자들은 꽤 일찍부터, 그리고 꽤 대담하게도, 그리고 꽤 늦게까지 이 대륙에 존재했던 수많은 정권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무자비한 정권에 감히 맞붙어 싸우려 했던 것이다. 공개 처형과 능욕, 혹사와 추방이 일상화된 그 상황에서조차 말이다.
공산 혁명의 결과는, 어느 지역에서든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중국에서는 그것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뿐이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무서우리만치 날카로운 분석이 느껴진다. 보고와 증언-심지어 그 대부분은 내부 문건이었다! 본문보다도 더, 신념으로 가득찬 문서들이 대륙 내부의 범행을 폭로하는 데 이리도 신뢰할만한 자료가 될 수 있다니.
또 하나, 한국 전쟁-중화민국에서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라고 한다-은 유엔군과 싸운 전쟁이라기보단, 오히려 내부의 투쟁이었다. 그야말로 또 다른 전쟁이었다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7장 <또 다른 전쟁>이 주목할 만하다.
안후이 성 서쪽의 한 곳에서 민중이 몇몇 지주들을 증오했고 그들을 죽여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지주들을 죽였다. 지주들이 죽자 민중은 희생자의 친척들이 복수할까 봐 두려워했고 그래서 앞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명단을 가져와서 그들까지 죽일 수 있다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민중의 바람에 따랐고 그 사람들마저 죽였다. 그들이 죽고 나자 민중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복수를 할 거라고 생각해서 또 다른 명단을 가져왔다. 우리는 계속 사람들을 죽였고 갈수록 불안을 느낀 민중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p.127, 4장 <폭풍우> 中
중국 속담에 <가난한 사람은 부자에게 의지하고 부자는 하늘에 의지한다>고 했다. 이제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가 당에 의지하게 될 터였다.
…
사람들은 살인에 동참할 때 비로소 당과 영원한 결속을 다지게 될 터였다.
p.129, 4장 <폭풍우> 中
<부패한 형의 시신은 개울가에 걸린 썩은 나무 같았다. 둘째 형과 어머니가 물속으로 들어가서 꺼내려 하자 시신이 힘없이 분해되었다. 우리는 뼈를 수거해서 물에 잘 씻은 다음 가져갔던 상자에 담았다.>
p.157, 5장 <대공포 시대> 中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배(舟)에서 끌려 나와 고된 노동을 하도록 보내졌다. 마침내 혁명이 땅에서 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p.165, 5장 <대공포 시대> 中
그들은 혁명의 희생양이었다. 공산당을 제쳐 놓고 잘못된 편을 선택한 사람들이 어떤 운명들을 맞게 되는지 상기시키는 본보기로 평생을 계급 투쟁의 전장 속에서 살아야 했다.
…
누구도 자신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예측 불가능한 본질이야말로 공포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었다.
p.168, 5장 <대공포 시대> 中
후난 성 출신의 농부 저우창우의 말에 따르면 <국민당 시절에는 징집 기간에 산으로 숨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산에 들어가 숨으면 간첩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빠져 나갈 방법이 정말 전혀 없다.>
p.227, 7장 <또 다른 전쟁> 中
로버트 루와 가장 친했던 사람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그래서 무척 상처를 받았지만 이내 나와 친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위협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나처럼 자본주의에 물든 죄인에게 증오와 경멸을 느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p.264, 8장 <숙청> 中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침묵할 자유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공산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과 충성심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진술을 하도록 강요받는다.>-후스(胡適)-
p.290, 9장 <사상 개조> 中
1년 뒤 열린 정치 협상 회의에서 저우언라이가 솔직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부추기자 제의를 받아들인 량수밍이 농촌의 빈곤화를 개탄했다. 도시 노동자들이 <천국의 아홉 번째 수준으로 살고 있다면 농민들은 지옥의 아홉 번째 수준으로 살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p.291, 9장 <사상 개조> 中
<매질을 당한 뒤에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뿐더러 마음 한구석에서 고통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상 개조를 통해 정신적으로 고문을 당하면 돌아갈 곳이 아무데도 없다. 사상 개조는 그 사람의가장 심오하고 깊은 내면에 영향을 끼치고 정체성 자체를 공격한다.>-로버트 포드-
p.382, 12장 <노동 수용소> 中
<그들은 민족주의자들 앞에서는 애국심을,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 앞에서는 헌신을, 억압받는 사람들 앞에서는 복수심을 과시한다.> 요약하자면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의 비위를 다 맞추려 들었다.
p.396, 13장 <사회주의의 그늘> 中
현장의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수많은 추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그들에게 자신이 역사적 대전환기를 살고 있으며 자신보다 훨씬 크고 훌륭한 무언가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신기록을 달성한 노동자나 적군의 총탄을 몸으로 막아 낸 군인 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되도록 부추겨졌다. 선전 기관은 본보기로 제시된 수많은 영웅적인 노동자와 농부, 군인 등을 끊임없이 미화했다.
p. 399, 13장 <사회주의의 그늘> 中
중국은 하나의 극장이었다. 심지어 무대 밖에서도 사람들은 강제로 미소를 지어야 했다. 농부들은 곡식을 더 많이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조차 팡파르를 울리며 열정적으로 웃어야 했다. 상점 주인들은 재산을 국가에게 넘기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환한 얼굴로 자발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아시아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미소는 언제나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곤혹스러움을 표현하거나 고통이나 분노를 감출 때도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괜히 꾸물거렸다가 비난을 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생계를 국가에 의존했다 .그리고 해방 이래로 무수히 많은 시간의 학습 모임을 통해 당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고 올바른 대답을 내놓고, 동조하는 척하는 방법을 배운 터였다 .일반인들은 어쩌면 위대한 영웅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상당수가 훌륭한 배우였다.
p.401, 13장 <사회주의의 그늘> 中
겉치레용 건축물에 막대한 돈이 투입되면서 일반인을 위한 주택 사업이 외면당했다. 베이징 대학의 학생 기숙사나 시안의 인민 맨션처럼 보여 줄 목적으로 지어진 전시용 숙소의 경우는 물론 예외였다. 기본적인 위생 기준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공장과 깃구사가 마구 뒤섞여 지어졌다. 지역 주민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걸핏하면 쫓겨난다> 라며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
p.404, 13장 <사회주의의 그늘> 中
1956년에는 수년 전 해방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부는 국민을 존중하기는커녕 대차 대조표상의 단순한 숫자로, 위대한 목적을 위해 활용되어야 할 자원으로 여겼다. 농민은 집산화라는 명목 아래 토지와 농기구와 가축을 잃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곡식을 국가에 넘겨야 했으며 아침이면 그들을 부르는 나팔소리에 달려 나가서 지방 간부들에게 지시를 받아야 했다. 도시의 공장과 상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ㅈ어부에서 선전하듯이 노동자 계급의 영웅이 아니라 채무 노동자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유례없이 오랜 시간을 일하고 하나의 생산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강요되었으며 그럼에도 소득은 계속 줄어들었다. 공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우토피아 건설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p.419, <사회주의의 그늘> 中
한번은 한 여성이 네 명의 수척한 어린아이와 함께 몸에 팻말을 매달고 국무원 정문으로 다가갔다. 팻말에는 <굶주림>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던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글이었다. 또 다른 경우에서는 한 남자가 백주 대낮에 초롱불을 켜고 마오쩌둥과의 접선을 요구하며 중난하이에 있는 공산당 당사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공산당이 대지를 뒤덮는 어둠의 대리인이라는 뜻이었다.
p.429, 14장 <독초> 中
※<페스트>(알베르 카뮈)에 이어 열린책들의 서평을 쓰게 되었는데, 그다지 별 의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