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로섬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9월
평점 :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호러'가 아닌 '테러'라는 키워드로 섬뜩한 상상력을 잘 보여주었던 단편집 '인형의 주인' 이후 두 번째 접하는 저자의 책이다.
지금까지 천 편이 넘는 단편을 쓴 저자의 이력답게 이번 책 역시 단편집으로 총 열두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음산한 느낌의 표지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번 책에 수록된 작품들도 음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단편들이니만큼 공통된 주제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다 읽고 수록작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뒤틀린) 관계'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싶었다.
수록작들 모두가 어딘가 굉장히 뒤틀려있는 형태의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제로섬'은 흠모하던 교수의 집에 초대받은 한 대학원생의 이야기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 결실인 교수의 아이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안긴다는 내용이다.
저자가 이런 식으로 뒤틀린 애정이 향한 희생양들의 멘탈을 털어 버리는 결말을 꽤나 좋아하는 모양인지 이어서 수록된 '상사병'이나 '참새' 등의 작품에서도 인물들이 정신적으로 고통받게 되는 결말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작품인 '끈적끈적 아저씨'는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아들이 성 노예로 팔려 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소녀들이 잠재 고객들을 소탕(?!) 한다는 내용인데 잔인함의 수위가 상당히 세다.
충격적인 장면들을 통해 뒤틀린 정의감과 이를 공유하는 우정의 위태로운 모습도, 훗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정을 꾸려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양면성이 가지는 섬뜩함도 잘 보여주고 있다.
수록작들이 대체로 50페이지 미만인데, 중반에 수록된 '자살자'는 80페이지 정도로 다른 작품들보다 길다.
이 작품에서는 끊임없이 자살 시도를 하는 남편을 맹목적으로 돌보는 아내가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속 아내와 '한기' 및 '베이비 모니터'에 등장하는 엄마의 심리는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자식이나 남편 모두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임에는 분명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자기 자신도 파괴할 정도의 맹목적인 애정이라면 그건 더 이상 애정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라면 그 애정 때문에 어느 한 쪽이 힘들어하는 결과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면, 심지어 상대가 그러한 희생을 원한 것도 아니라면, 그 희생은 솔직히 스스로가 희생하는 자신에게 중독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모든 중독은 적절한 치료의 대상이지 결코 애정의 결과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수록된 세 작품은 앞의 작품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세 작품 모두 SF 소설 속 디스토피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작품인데 마치 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간 순서로 연이어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첫 작품에서는 뇌를 파먹는 아메바가 등장한다.
두 번째 작품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세계가 멸망해가는 가운데, 타인과의 연결이 부재한 개인의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작품에서는 인류의 마지막 개체의 처리를 두고 고민하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처럼 서로 연관성도 있고 각각의 길이도 짧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저자인 만큼 기본적으로 모든 작품들이 읽는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중반의 '자살자'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뒤로 갈수록 재미나게 읽었던 것 같고, 특히 마지막 세 작품은 SF를 좋아하는 개인 취향에도 잘 맞아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단편만 천 편을 쓴 저자라 하니 앞으로도 저자의 주옥같은 단편들이 더 나와줄 것 같아서 앞으로 국내에 어떤 작품들이 소개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