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 라이
프리다 맥파든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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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항상 그랬죠. 두 사람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뿐이라고."

무슨 내용인가 잠깐 펼쳤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시작부터 남의 집에 들어간다고?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간다고? 뭐? 거기서 잔다고? 문화 차이야 뭐야 하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침착한 이선과 끔찍한 기운을 직감하고 계속해서 겁에 질리는 트리샤의 대비가 인상 깊었다. 특히 인물들 간의 심리 묘사가 치밀해서 마치 내가 그 집 안에 같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트리샤가 밀실에서 발견한 테이프를 듣는 순간, 우리도 과거로 끌려간다. 실종되기 전의 에이드리언과 현재의 트리샤가 교차되는데, 전환이 빠르고 자연스러워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흐름이 끊기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다.

집을 보러 다니는 이선과 트리샤, 테이프 속 환자들, 그리고 에이드리언까지. 이들 중 누가 더 못됐는지 순위를 매겨도 재미있을 정도다. 루크라는 인물을 제외하면 선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대결. 치밀하려다 실패한 사람은 덜 나쁜 사람, 끝까지 치밀했던 사람은 최악의 사람이 된다. 그런 인간 군상들이 엮어낸 이 이야기, 너무 재미있었다.

그리고 결말이 진짜...... 어이없게도 해피엔딩이다. 어?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게 아무 일도 아닌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고, 마지막 인물의 대사를 읽으며 소름이 쫙 끼쳤다.

대단한 트릭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짧고 강렬한 심리 스릴러의 정석이라 할 만하다.


오랜만에 영미 스릴러 읽었는데 너무 재밌고 만족스럽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의 마음은, 아마 전 세계 공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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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 어느 30대 캥거루족의 가족과 나 사이 길 찾기
구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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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나의 모든 것은 부모님의 선택지 속 선택이었다. 근데 점점 나만의 것을 꿈꾸기 시작한다.

"이거 이쁘다. 독립하면 이런 접시 쓰고 싶어.", "여기다가는 파스타를 올리는 거야!", "독립하면 파스타 자주 해 먹어야지." 이래서 다들 독립하는 건가? 자기 맘대로 하려고? 나의 규칙으로, 나만의 것이 가득한 집. 독립이랑 그런 거겠지. 상상해 본다. 내가 온전히 삶의 주인으로 서는 날을.

처음엔 제목만 보고, '정말 독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까? 아니면 결국 독립해야 한다는 뜻일까?' 하는 의문을 품으며 책을 펼쳤다. 다 큰 어른이 되도록 엄마의 주머니 속에 살다가, 갑작스럽게 독립의 기로에 선 나에게 『독립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는 꽤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대라고들 하지만, 치솟는 집값, 무차별 범죄, 자살률 1위, OECD 국가 중 최하위의 행복지수, 기후 위기까지!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다. 작가이자 주인공인 ‘구희’는 다 큰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게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까 걱정하면서도, 바깥세상은 여전히 '헬'이라 자립이 두렵기만 하다.

아무도 늙지 않고 모든 것이 풍족한 네버랜드 같던 우리 집을 돌아보니 부모님도 늙어가고, "마흔이 되어서도 혼자면 같이 살자" 약속했던 친구들도 하나 둘 결혼해 아이를 낳는다. 퀘스트를 깨듯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주변인들을 보며, 나만 제자리에 멈춘 건 아닐까, 계속 부모님께 얹혀살아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작가이자 주인공인 ‘구희’는 자립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걷어내고, 조심스레 한 발씩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막연히 ‘혼자 사는 것’이 곧 독립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혼자 살고 있어도 자립하지 못하면 그건 독립이 아니다’라는 말을 새기게 되었다. 혼자 살림을 꾸리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도 분명 독립의 즐거움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건 정신적인 자립이다.

작가는 자립을 ‘내가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힘’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 힘이 있어야 비로소 세상에 온전히 발을 디딜 수 있다는걸, 이 책이 알려주었다.

나이만 먹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던 나. 내일 모레 마흔인데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나에게 응원을 보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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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38세에 죽을 예정입니다만
샬럿 버터필드 지음, 공민희 옮김 / 라곰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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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 중 몇 사람이나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을까? 후회란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갖지 못한 기회에 대한 것일까?


19년. 넬은 19년이란 시간에 갇혀 깊게 사랑하지도, 제대로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고, 슬픔을 감당할 가족들에게서도 멀어지게 된다.

내가 넬처럼 예언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넬처럼 담담하진 못했을 것 같다. 오히려 시름시름 앓으며 죽음을 기다렸겠지..... ‘38살에 죽는다’는 예고는 삶을 만끽하기도 전에 끝나버릴 것만 같아서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가족들과 전남친, 하루를 즐긴 남자에게 편지까지 보내놓고 무일푼으로 새 인생을 맞이한 넬의 모습이 제대로 웃겼다.

넬은 집도, 돈도, 소지품도 모두 정리한 채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간다. 부자가 된 전 남친 그렉과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새롭게 주어진 인생에서 자신만의 방향을 찾고자 한다. 그런 넬의 선택을 응원하게 된다. 다만, 그렇게 맞이한 새 인생에서 두 남자 사이에서의 줄다리기 묘사가 꽤 많았던 건 조금 아쉬웠다. 물론 그 남자들 역시 넬의 영향을 받아 삶을 되돌아보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래도 넬의 이야기 중심이 좀 더 단단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이 정말 좋아진 건, 치매가 있는 화려한 할머니 ‘주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주노 덕분에 넬의 인생은 진짜로 새롭게 시작된다. 보트 위에서 카페를 열고, 개업식에 사람들이 모인 장면은 희망과 활기로 가득 차 있다. 개업식 날, 넬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이 잔뜩 모여든 장면에서는 그녀의 진가가 드러난다. 역시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들만 모이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넬이 처음 눈을 떴을 땐 그동안 죽음에 사로잡혀 살아온 19년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 하고 싶은 걸 다 해봤기에 새로운 삶에 더 빨리 안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고 살아갈 넬의 앞날이 정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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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게 묻다
김희진 지음 / 폭스코너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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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은 식물원의 유리 온실을 닮았다. 어디에 앉아 있든 유리 벽과 유리 천장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햇살을, 기온과 날씨를 과장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다. 때때로 너무 환하고 밝아 이곳에서 생겨나는 모든 감정들은 나에게 들켜버리기 일쑤였다. 투명한 공기 사이사이로 떠다니는, 기대에 찬 설렘과 웃음들. 한마디로 ‘부러움’이라 뭉뚱그릴 수 있는 그것들을 발견하고 나면 내가 이곳에서 챙겨가게 되는 것은 좌절을 비롯한 박탈감과 위화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이 공항에 오고 말았다. 너무 광활하고 거대한 나머지 여기에 앉아 있으면 우주 속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그리고 나만 이렇게 살게 내버려두지 않겠지 하는 불만이 소소한 기대로 바뀌게 될 것 같아서 찾게 되는 이곳은,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돼온 일탈의 장소이자 상상과 가능성의 장소였다. <같은 일요일>


첫 이야기 [오후에게 묻다]부터 주인공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누군가는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누군가는 그저 조용히 받아들이고, 또 누군가는 느리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길을 찾아간다. 어떤 인물은 스스로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기도 한다.

그 과정은 때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처절했고, 또 때로는 아무런 발버둥도 치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모습에 가슴 한켠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이야기들은 세상의 부조리함을, 빈곤이 끊이지 않는 삶을, 상실의 고통을,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사랑을 가장한 무언가를 말한다.

여덟 작품 모두 닮은 듯 다르다. 그래서 더 다채롭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여러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이야기는 재밌는 소설로 재밌게 읽혔고, 어떤 이야기는 내 이야기처럼 읽혔다.

누군가의 눈엔 보이지 않을 그들의 안간힘에 공감하며 읽는 동안 많이 울고, 위로도 받고, 나도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외출], [같은 일요일], [늙은 밤]이다.

새로 발급받은 교통카드를 쥐고 마치 ‘남들처럼 살아도 괜찮다’는 허가증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던 [어떤 외출] 속 남자의 모습, 여권을 만들며 새로운 가능성에 설레던 [같은 일요일] 속 남자의 모습, 그리고 부모의 죽음을 예감하며 검은색 넥타이를 매야 한다고 울던 여섯 살 아이의 모습.

이 장면들은 아마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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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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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아주 한국적인 정서로 시작한다. 산의 주인 ‘백호’의 병을 고치고 능력을 물려받은 청년이 전국을 돌며 이형의 존재들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한다. 사람들은 그를 ‘호미’라 불렀고, 그는 기운이 좋은 곳에 집을 지어 머물렀다. 말썽 많던 이형의 것들이 그의 집에만 오면 잠잠해졌고, 이내 소문이 퍼져 사람들은 수상한 물건들을 들고 그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긴 곳이 ‘호랑골동품점’이다.


시작은 매우 한국적이었지만, 첫 골동품은 19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진 성냥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귀신이 깃든 물건이라는 설정은 익숙하지만, 한국적인 전설과 ‘한’이 서양의 골동품과 만나 만들어낸 이 조합은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김규리는 어느 날 밤 우연히 골동품점 앞을 지나가다 빈티지 성냥에 홀린 듯 손을 댄다. 도둑질 이후, 악몽이 시작되고 회사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 그녀 앞에 골동품점의 주인 ‘이유요’가 나타나, 성냥에 깃든 사연과 골동품점 물건들의 정체를 들려준다.


이야기 속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회사의 누구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미선 아줌마’가 성냥 속 불길에서 체조를 하던 장면은 무력하고 안타까웠고, 가정폭력을 일삼는 김택구가 못난이 인형 속 메뚜기떼에 휩싸일 땐 묘한 통쾌함이 느껴졌다.

사고로 죽은 친구 ‘박서현’과 낡은 공중전화기로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눈물을 터뜨리게 했고, 토끼발 열쇠고리를 훔친 문정열, 심길용, 권병욱은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판매 금지 태그를 떼고 짚인형을 산 ‘채주연’은 외로움에 잠식된 사람의 그림자 같았고, 마지막엔 콩주머니를 쥔 ‘소하연’이 용기를 내어 엄마의 한을 풀어내고, 이유요 또한 변화해가는 모습이 엔딩으로 잘 어우러졌다.


이형의 존재들은 자신과 비슷한 한을 가진 사람을 끌어들인다. 가게 밖을 나와 사고를 치고,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다독이기도 한다. 살아 있는 이의 한을 대신 풀어주기도, 그 외로움을 품어주기도 한다.


욕망, 외로움, 후회 같은 감정이 마음을 잠식할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감정들 사이에 ‘신비한 골동품’이라는 장치를 더해,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의 균열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읽는 재미도 충분했다. 힐링 호러라는 말이 딱 맞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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