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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통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9
정용준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5월
평점 :
나는 다 줬는데, 다 맡겼는데, 동아에게 닿는 것은 없었다. 나는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싫어 말하기를 포기했다. 제대로 던지지 못할까봐 던지지 않았다. 오해받고 싶지 않아 마음을 감추고 감정도 감추고 행위까지 감췄다.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무서워 시도하지 못했고 나아가지 못했고 건네지 못했다. 내가 한 유일한 노력은 계속 0을 유지하는 것. 거슬러오르지는 못하고 휩쓸려가지도 않으려는 내 안간힘을 사람들은 안정감으로 느꼈다. 나는 친절한 사람. 따뜻한 사람. 다정한 사람으로 칭찬받았다. 나의 웃음과 나의 열심은 사실 그런 것이었다. 비겁하고 소득없는 그야말로 제로게임. 후회하지 않도록 애쓰는 힘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망치고 싶지 않아 두 팔을 주머니에 집어는 행위는 얼마나 이상한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싫어 입을 닫아버린 인하와, 들뜨고 기대하는 것이 두려워 사람을 곁에 두지 않으려던 동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종이에 메모를 적어가며 나누는 필담도, 서로에게 바라는 모습이 있어도 강요하지 않는 태도도, 침대에 나란히 누워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참 예뻤다. 동아가 겨울통에 걸리기 전까진...
낫는 방법은 없고, 오로지 물이 되는 것만이 결론인 이 병을 '나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울고불고 호들갑을 떨다가 잔뜩 겁먹은 채로 물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내가 보였는데, 동아는 달랐다.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고, 호들갑을 떨고 싶지도 않다는 동아는 인하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약속을 받아내지만, 평소 동아의 바람을 알아도 모른척하던 인하는 후회와 함께, 동아를 다시 되돌릴 방법을 찾아 밤새 인터넷을 돌아다닌다.
정용준 작가님의 소설 중에 내 인생 소설이 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말을 더듬는 아이가 언어 교정원에서 비슷한 사람을 만나 굳게 닫힌 마음이 녹아내리고 상처를 치유하고, 읽는 나도 위로받았던 그 소설. 사람 사이의 소통에 꼭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려준 작가가, 이번에는 언어장애로 말을 할 수 없는 인물을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 이번 소설에서 언어장애는 중심 갈등도, 극복해야 할 과제도 아니었다. 그저 인하를 이루는 수많은 특징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단어와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다른 인하는 입을 아예 닫아버렸고, 동아는 그런 인하의 입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말이라도 자신은 알아들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인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인하를 보고 싶어 했다. 인하는 동아의 바람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했고, 끝이 정해지고 나서야 후회한다. 나 역시 인하처럼 누군가에게 나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입장이라, 만약 동아가 겨울통에 걸리지 않았다면, 인하가 자신을 동아 앞에 다 내보일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비슷한 속도와 온도로 온전히 나를 바라봐 주는 동아 같은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나 역시 내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도 궁금했다. (난 못해...)
나는 책을 읽을 때, 아무 정보도 없이 읽는 걸 제일 좋아하고, 수많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도 범인이 궁금해 죽겠어도 책의 뒤부터 읽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억지로 쥐어짜낸 해피엔딩을 만들어내지 않는 작가인 걸 알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면 어쩌나 걱정하며 자꾸만 책의 뒤쪽을 들춰보게 됐다. 읽는 내내 인하에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결국엔 원하는 결말을 받았지만, 내 안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 같다. 소랑 도서관 한구석에서 책 읽는 척하며 두 사람을 몰래 훔쳐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 이 소설의 제목과 표지만 보고, 지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인데 겨울에 읽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겨울통'이라는 겨울 느낌을 가진 이 소설이 푸릇푸릇한 봄에 출간됐을까 하는 호기심을 갖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읽을수록 하지에 시작해 동지에 끝나는 이 병이, 계절을 따라 흐르는 이야기가, 봄에 읽기에 딱이었다. 정용준 작가님은 늘 이런 식으로 사랑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모르는 나에게, 이렇게 또 사랑을 가르쳐 주는 소설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