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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공감의 두 얼굴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 지음, 두행숙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감능력이 너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을 나의 남편은 오지랖이라고 말한다.
오지랖의 결과는 두가지이다.
타인으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에 따른 나의 대외적 이미지가 좋은 결과라면
과도한 공감능력에너지소모로 인한 자기에너지 소진으로 내 일상을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타인에게 신경쓰느라 내것을 챙기지 못한 소위 말하는 내코도 못닦고 시간이 지난후 보면 내손안에 쥐어진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공감차원에서 선한 마음으로 한 일들이 부정적 평가를 받았을 때 과도한 자기비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 제목을 봤을 때 강렬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책은 질문한다.
공감능력을 향상시키는 약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좀 더 일반적으로 묻자면 공감이란 널리 장려해야 할 만큼 좋은 것일까?
즉,공감의 긍정적인 면도 부정하지 않지만 공감의 어두운 면에 대한 고찰을 위한 책이라고 하겠다.
#나도그렇게생각한다 #심리
나의 사례처럼
공감은 자아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의 나를 잃거나 내려놓음으로써 공감능력이 생긴다.
공감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강한 '나'를 다시 인식하게 한다. 공감적으로 자세히 관찰된 강한 인간은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에게서 떨어져나간 바로 그것, 즉 '나'를 갖고 있다. 아마도 여기서 객관적이고 공감 능력이 있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나라는 이념을 포기하는 인과관계가 성립할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니체에 의라면 인간은 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한다 57쪽
여기에 대한 해답은 없을까?
우리는 고도의 공감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해도 무방하지만,한편으로는 공감을 억제하고 통제하고 제한하는 법은 배운다면 언제 어떻게 또다시 공감히 허용되는지 즉 찬단을 피하거나 공감을 허용하는 중립화 매커니즘과 기술이 필요하다.
공감은 흑백사고, 또는 친구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보인다.
내가 해석하자면 친구아니면 적 즉 남이 되는 방법이다.
공감력을 행사하면 나는 도덕적으로 매우 우수한 사람으로 나의 공감력에 토를 다는 자에게 늘 말한다.
나는 잘못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그말도 겸허히 듣고 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나보다 더 도덕적으로 생각하는 우월한자와의 조우이다.
그는 그의 선한 공감력으로 나의 선한 공감력을 공격한다. 나의 공감력이 더 저급한 것으로.
그것도 무리지어, 또 다른 공감이란 이름으로
하지만 아무리 그런다하더라도 서로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것들이 있는데 상대가 그것을 넘어섰을 때는 그 무리들이 다시 화살을 그에게로 돌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는 나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졌고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고 표현한다.
정작 나는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고 무대응으로 일관했지만서도 말이다.
이 파트를 읽고 있는데 맘이 아프지만 인간은 역시 실패와 아픔속에서 배워나가나 보다.
공감은 늘 동일시하는 것으로 혼동되어 잘못 표현되곤 한다.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과 함께 느끼는 대신 자신을 구원자이자 조력자로 생각한다. 이것은 공감적인 사람에게는 즐거운 일이겠지만 곤경에 처한 사람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공감력은 누구가 가지고 있지만 어느 특정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공감마저도 힘이 들때가 있다.
공감으로 인한 결과에 대한 책임범위를 생각하게 하고 많은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에 그 공감에 대해서도 절제가 필요할때가 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는 것은 예외적 일이 아니다. 공감적인 사디즘에는 정신벽적인 행위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모욕하고 깎아내리고 폭로해서 웃음거리로 만드는 등의 행위를 비롯한, 일상적인 수많은 행동이 포함된다. 사디스트가 다른 사람과 공감하기 위해 얼마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원하거나 야기한다.
도덕적으로 위험한 공감의 또 다른 양상으로는 다른 사람을 수단삼아 자신의 체험을 넓히려고 하는 흡혈귀행위가 있다. 흡혈귀행위는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을 자식들을 통해 체험하고 싶어하는 헬리콥터 부모와 스테이지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공감이 도덕적 행위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은 권장할 만한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 공감을 배워야 하는가?
이 경우에 공감을 너무 많은 희망과 연결하지 말아야 한다. 고감은 선행이나 배려에 대한 기대, 그에 상응하는습관, 사람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이해와 복잡하게 연결될 때만 도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일생의 가치관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타인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공감능력이 결코 나에게 이로운 친구만은 아니라는 것이고 공감력이 부족한 사람을 나의 잣대로 부도덕하다고 낙인찍을 하등의 권리가 나에게 없다는 것이다.
결국 공감이라는 이름의 출발은 나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나를 잃지 않는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