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지음, 이기우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2월
평점 :
절판




물에서밖에 숨 쉴 수 없는 물고기는 물 밖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읽는다’는 개념과 ‘말한다’라는 개념 사이의 무의식적인 고리를 과감히 깨부순다. 따라서 이 책은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이행이 인간의 의식체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문자와 책과 인쇄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사고방식을 음성적인 소리에서 시각적인 텍스트로 고정시켰는지를 보여준다.

노자가 도덕경의 첫 구절에서 ‘도를 말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말했’으니,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결국 이를 ‘말해야’하는 고민을 안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옹 역시 선입견을 버리고 구술문화를 바라볼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 주장을 다름 아닌 '책'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사실은 상당히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한데, 이미 문자와 의식을 연동하여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지금 시대에서는 편견을 깨기 위해서도 편견을 사용해야 한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다만 ‘책읽는’ 행위를 의식하는 것, 그리고 음성으로 구술되는 말하기가 본래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가 있다.

옹은 쓰거나 인쇄하는 것을 전연 알지 못하는 문화의 구술성에 입각한 성격을 ‘일차적인 구술성’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고도화된 기술문화의 이차적인 구술성과 비교해보면 어째서 일차적인지를 알 수 있다. 후자의 새로운 구술성은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과 같은 전자장치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어서 쓰기와 인쇄에 의존하지 않고는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오늘날 엄밀한 의미에서의 일차적인 구술문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자장치가 아니더라도 인류가 문자를 만들고 발전시킨 오랜 역사를 생각해보면, 인간이 현대인의 생각 이상으로 오랜 기간 동안 '구술문화'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는 설명에 의아함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구술문화, 즉 저자가 '1차적 구술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로만 의사소통이 이뤄지고 이야기로만 역사가 전달되는 그런 문화를 말한다. 당장 요즘이라고 해도 아직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에는 읽고 쓰기를 못하는 '문맹'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식자층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구술문화는 아주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왔고, 정치경제적 지배층의 언어문화와 다르게 실제로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했던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그런 문화였다는 것이다.

문자문화 사회에 속하는 우리들이 지금에 와서 1차적 구술문화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역설적이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담은 책(문자)들이라든가, 얼마 안 되는 구술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오지의 원주민 사회 정도이다. 옹 또한 현존하는 구술문화 집단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결과들에 상당부분 기대어서 구술문화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옹은 문자문화와 비교했을 때 구술문화에서 '이야기' 혹은 '말하는 방식'에 나타나는 특징들을 설명한다. 구술문화가 지배적이던 시기, 입에서 입을 통해 역사와 지식이 전달되던 시기에 말은 곧 행동이었고, 이름은 곧 힘이었다. 사고(思考)는 대화를 통해 이뤄졌고, 기억은 패턴 혹은 리듬(관용구)을 통해 이어져왔다. 희랍의 저 철학자들이 그러했고, 호머의 서사시들을 비롯한 옛이야기들에서 영웅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것이다. 심리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옹은 언어학적 측면에서 이를 설명한다. 기억을 저장하기(고정시키기) 위해서는 뭔가 뚜렷한 특징을 가진 인물, 혹은 유별난 행동을 한 인물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반복성이다. 과장된 웅변투의 말이나 중요한 부분을 반복하는 연설문, 혹은 다소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장황하고 후렴구가 반복되는 서사시들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구술문화의 특징을 다루면서 옹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지금의 우리의 의식구조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에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이는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문자문화는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인간의 의식을 해방시켰고, 인간의 사고는 책이라는 저장도구가 생겨나면서 날개를 달았다. '듣는' 부담이 사라지고 논리와 추론이 가능해졌다. 동시에 이야기는 사물(책)이 되었다. 인쇄는 이 특별한 '물건'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면서 대부분의 사회에서 구술문화를 밀어내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기록문화에 물들어버린 사람들로서는 구술문화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사람들이 지녔던 사고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다만 그렇다 하여도 그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책에서 언뜻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몇 가지 테마들은 지금, 우리의 문자화된 언어문화를 되돌아보는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위대하시고 영명하신' 등등 독재자 앞에 따라붙던 수식어구가 구술문화가 가진 반복성의 위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구술문화 시기 엘리트들의 독점적 문자문화에서 배제됐던 여성들이 훌륭한 이야기꾼이자 소설 애호가가 된 이유, 추론과 논리를 '지성'과 동일시하는 우리의 버릇이 사실은 글 못 읽는 나뭇꾼의 체험적 지식보다 우스운 것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전문학(oral lierature)이라는 용어가 일견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이것이 아주 이상한 개념이며 불합리한 용어라는 것이다. 구전이란 글로 씌여지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문학은 곧 쓰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최근까지도 이 용어가 학계에서조차 사용에 별다른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예로서 들고 있다.


[저 위대한 밀만 패리의 이름을 붙인 ‘하버드 대학의 밀만 패리 구전문학 컬렉션’이라는 명칭은 당시의 관리자의 깨달음 상태보다는 오히려 전대 학자들의 깨달음 상태를 기념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옹은 우리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대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에 대한 통렬한 뒤집어보기를 시도하고 있고, 이러한 관점은 한국 구비문학(전술했듯이 이 용어의 불합리함 때문에 옹은 구전문학 대신 구전예술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고 있다)을 살펴보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접근에 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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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4-1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영어본으로 대학원 석사과정 외국어 시험을 쳤더랬습니다. ㅠㅜ 안 좋은 기억이...
리터러시의 반대가 오럴 전통인데... 오럴 리터러쳐라는 개념이 오히려 낯설게 느끼도록 만드는 재미있는 책이죠.
잘 읽고 갑니다.
이 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