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일본 근대문학의 흐름 1

1. 근대문학의 여명

일본의 근대는 메이지유신에서부터 태평양전쟁(1868~1945년)의 패전까지를 가리킨다. 이는 갑오경장을 시초로 8.15 해방까지를 근대라고 보는 우리의 근대 구분과 대략 같은 궤에 있다. 메이로쿠샤(明六社, 모리 아리노리가 중심이 되어 1873년 결성된 계몽된 학술 단체.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 쓰다 마마치 등이 핵심 인물이며 서유럽 문명 도입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계몽하고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해나갔다.)는 근대화의 완성을 위해 계몽을 주장했고 이는 부국강병의 국가 이데올로기 구현으로 이어진다. 초기 계몽사상의 핵심은 평등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로 대변된다. 여성, 아이, 상인들 사이 형성된 세속 문학이었던 전근대 문학양식이었던 게사쿠(戯作, 장난삼아 지은 작품이라는 뜻으로 샤레본西落本, 곳케이본, 기뵤시黃表紙, 고칸合券, 요미혼, 닌조본人情本 등이 이에 속한다.)는 공리주의와 실용주의 덕목에 밀려 무용한 것으로 냉대받았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재빨리 부응한 게사쿠 작가로 가나가키 로분仮名垣魯文이 있다. 게사쿠 작가로는 나가키 로분(1829~1894)이 대표적이며 그는 사양 문물을 소개한 『서양만유』, 쇠고기 요리점에서 서민들의 입을 빌어 개화기 풍속을 풍자한 『책상다리 냄비』와 같은 글을 썼으며 이후 케사쿠 작가들은 신문의 연재를 맡기도 하였다.

『메이지 문학사』를 쓴 나카무라 미츠오는 "메이지라고 하는 시대는 서양의 영향으로 일본사회 전체가 엄청나게 바뀐 시대"라고 하였는데 문화 면에서 이를 반영하는 것이 번역물이다. 입신출세 청년의 이야기인 새무얼 스마일스 『자조론』(1871), 피터 팔리 『서양야화』(1874), 기조 『유럽 문명사』(1874) 등은 근대국가와 문명의 성립과정, 그리고 그 당위성을 역설하며 계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당시 번역된 문학작품으로는 에드워드 리튼의 『어네스트 맬트라버스』(1878),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1878), 『달나라 여행』(1878),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872),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880), 알렉상드르 뒤마의 『바스티유 탈취』(1882), 『어떤 의사의 회상』(1882), 폴 베르니에의 『허무당 퇴치기당』(1882), 디즈레 일리의 『크닝스비』(1884) 등이 있다. 이는 과학에 기초한 문명의 경이, 강점, 서양 법률 과제, 생활상 등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소설을 여성이나 아이들, 상인들의 오락거리로 생각하던 당시 문인,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20년을 근대 이식 과도기라고 하는데 이때 문학의 양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정치소설의 등장이다. 1880년대는 자유당, 입헌재헌당이 창립되고 정치활동의 연장선으로 정치소설이 쓰여졌다. 대표적인 것이 민권운동의 승리 과정을 다룬 『설중매』(1886)이며 스에히로 데츠초는 속편 『화간앵』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개진당으로 대표되는 당시 국권운동의 연장으로 야노 류케이의 『경국미당』(1883~1884)이 있다. 그리스 약소국인 테베가 스파르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국권회복'을 역설하는 정치 슬로건이 된다. 도카이 산시는 『기인이 기우』(1885~1897)에서 강대국들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다. 셋째는 부국강병을 내세운 '계몽'이다. 이는 당시 여권신장과 맞물려 있으며 사카자키 시란의 『미인국』(1889)을 탄생시키게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 주류는 역시 정치소설이며 정치소설의 효시라 평가받는 도다 긴도의 『정해파란』(1880) 이후 10년 동안 약 220편의 정치소설이 출간되었음은 이를 반영한다.

1890년대의 특징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정치소설뿐만이 아니라 순수문학의 번역이 활발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호프만, 빅토르 위고, 알프레드 테니슨, 알퐁스 도데, 레오 톨스토이, 찰스 디킨스, 투르게네프와 같은 세계문학 전집에 속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활발하게 번역되었다. 이는 지식인, 엘리트층의 소설 창작 의욕을 자극하고 통속적이라고 던져놓았던 소설의 주제에 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20년간을 흔히 "화혼한재和魂漢才에서 화혼양재和魂洋才의 문화 이데올로기로 궤도 수정하는 과도기"라고 하는데 고바야시 히데오는 좀더 정확히 말해 "일본의 근대화는 서양화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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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내오랜꿈 > 서구의 철학으로 그려내는 일본의 '얼굴'
유머로서의 유물론 문화과학 이론신서 3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경훈 옮김 / 문화과학사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유머적인 정신 상태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드물게 밖에 발견되지 않는 천분이며,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 결핍되어 있다. (프로이트, <유머>, 132쪽)

ⓒ2003 문화과학사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세계 문학계가 알아주는 일본의 문예비평가이다. 스스로 '비평가'라고 불리길 자청했지만 가라타니 고진은 단순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비평가, 평론가와는 좀 차원이 다르다. 아즈마 히로키(東 浩紀)가 이 책의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스스로 비평가이기를 자청하는 것은 기존의 문예비평의 전통, 곧 비평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고 동시대의 문학(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전통을 잃어버리고 '동업자비평' 수준으로 전락한 현실에 맞서고 저항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 문학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마련인 우리나라에서조차 최근에 소개되고 있는 그의 저서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번역서는 '덧붙이는 글' 참조).

이를 문학평론가 홍정선 교수는 문화일보를 통해 "가라타니의 저술활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적인 학문풍토와 상당히 다른 세계다. 그는 작은 주제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일본적인 아카데미즘과는 반대로 넓고 큰 문제들을 거침없이 다루는 서구적인 아카데미즘의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문학이라는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철학, 역사, 건축, 마르크시즘 등 폭넓은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개방시켜왔다"고 하면서 이런 가라타니의 세계성과 열린 정신이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게 된 이유일 것이라 말하고 있다. 실제로 가라타니는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천황제에 반대하는 비판적 지식인 그룹에 속한다.

<유머로서의 유물론>은 이런 가라타니 고진이 1969년부터 작업해온 것들을 모아서 엮은 '평론'집이다. 그 대부분이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잡지에 실린 원고들이라고 한다. 평론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공간, 두 개의 19세기', '비데카르트적 코기토',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과 문학, 건축을 오가는 '메타담론'에 가까운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 순서대로 읽어도 좋고 각 글마다 따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는데, 그건 전적으로 필자의 일본 문학에 대한 무지 탓이다.

일본 문학이나 문화에 생경한 필자에게는 그들의 작품이나 작가들이 나열되는 문학사가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과 같이 어느 정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글부터 읽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아마도 문학보다는 철학에 익숙한 필자의 취향 탓일 것이다. 그러나 다 읽고 난 후에 생각해보니 이건 쓸데없는 선입견에 따른 선택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글이나 단순히 철학이나 문학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영역을 횡단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에.

이러한 가라타니의 방법론은 어찌 보면 푸코의 '고고학'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다만 푸코가 광기나 성, 권력 등 서구 근대사회의 메타담론에 입각해서 고고학적 계보학을 형성하고 있다면, 고진은 근대국가의 성립,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근대의 형성에 가장 가까이 있는 문학담론의 형성으로써 일본 근대의 기원을 파헤치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에서 도입한 이러한 방법론을 이용해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서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원용, '에크리튀르'(Ecruture:문자/글말)에 대한 통찰을 얻어내고 이를 메이지(明治)시대의 언문일치 연구를 통해서 다시 데리다를 뒤집어 버린다.

언어에서 문자를 배제한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의 음성중심주의를 데리다는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만 가라타니는 근대 민족의 형성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근대의 민족은 각각 '세계 제국' 안에서 분절화되어 출현한다. 그것을 정치적인 국가의 측면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문학'에 의해, 아니면 '미학'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 64쪽)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 야콥슨, 데리다는 물론 우리에게 생소한 토키에다와 같은 일본 언어학자들의 이름들이 나열되지만 결론은 (일본)언어(≒문학)를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분리해서 사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일본만의 고유한 '표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라타니의 인식은 "푸코와 일본"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푸코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관해 책을 썼던 (…) 하이데거로부터 코제브, 바르트,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 그들에겐 일본이란 서양 외부의,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nowhere)이며, 그곳에 그들의 '서구' 비판이 투사되고 있다. 그 '일본'이 그들의 표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일본인으로서도 '일본'은 중국이나 서양이라는 거울에 비친 표상이며, 그 경우의 '중국'과 '서양'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다. 그리고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통해 스스로의 문화를 비판하는 일은, 자기동일성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푸코와 일본", 107~108쪽)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들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의 기존의 사고틀에 맞추어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가하지만 원래 '인식'이란 것의 속성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문화의 비교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은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이 아니라 거꾸로 그 안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과도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서구 철학이나 사상을 구부러뜨리고 일본의 문학을 종횡무진 오가며 일본의 근대, 동양의 근대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의 것, 일본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오늘의 일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드러내는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히로키는 이 작업을 바로 오늘의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흔적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만의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바다 건너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리라.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것이 이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도 못하는 짤막한 글 "유머로서의 유물론"을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유머'란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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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omadia > 프롤레타리아의 가면들 -[트랜스크리틱] 비판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프롤레타리아는 천 개의 가면을 쓴다. 그렇다고 가면 뒤에 어떤 본질이 숨어 있는 것도, 목소리 뒤에 어떤 실체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초재적인 주체성으로부터 또는 어떤 일자로부터 이데아를 분유(methexis)받지도 않는다. 그들은 세계의 표면을 횡단하고, 접속하며, 분산하며, 수렴한다. 이들은 계열이며, 양태고, 적합 관념들(adequate ideas)이며 결과적으로 기쁨과 혁명적 열정을 표현한다.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1871년 빠리 꼬뮌에 이르기까지 프롤레타리아들의 가면은 전문노동자다. 1917년 러시아에서 그들은 대중노동자의 가면을 더 선호했다. 1968년과 1977년-79년 동안 이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하나의 고원(plateaux)으로 삼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라고 외쳤다. 이때 이들은 다중이었고, 또는 사회적 노동자였다. 그리고 1994년 멕시코 라칸돈 정글에서 봉기한 싸빠띠스따들과 시애틀을 가득 매운 반세계화 시위대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전지구적 노동자로서, 다중으로서, 그리고 검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대륙간 회의를 통해 서로 악수하는 전개체적 특이성 자체가  된다. 전세계적, 세계사적 투쟁 순환의 역동적 힘(puissance)이 된다.

 

그렇다고 고진이 이런 가면 쓴, 스스로 변용(affectio)하는 분자들을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파악 불가능한 미분화의 지대, 그 어두운 지대(zone obscure)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과 같다.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고진에게 이 질문은 철지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호일 뿐인가? 그런데 만약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괴암적인 공산당, 또는 사회당의 재현 시스템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상 맑스에게 코뮤니즘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고진 또한 그것을 잘 안다.

 

이쯤 해서 그는 맑스의 유명한 정식을 가지고 올 것이다. G-W-G'(상품-화폐-상품). 중요한 지점은 <이전>의 지점이 아니다. <이후>의 지점이다. 즉 노동자는 W-G'의 지점에 일정한 파열구를 형성할 수 있다. 즉 이때 노동자는 곧 소비자고, 일종의 <노동자=소비자>라는 새로운 투쟁 주체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분명 노동자는 스스로가 생산한 상품의 소비자이며 여기에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가 있다는 것. 고진이 실천적(그의 표현대로라면 <도덕적>)이라고 부르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불매운동>이 투쟁수단이 된다. 고진에 의하면 이 운동은 언제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과 더불어 <새로운 시스템>, 세미라티스(Semilatice)형 생산-소비 공동체가 조력해야 한다. 새로운 화폐(LETS), 다시 말해 지역간 유통과 교환에서 어떠한 실재적인 잉여도 표장하지 않는 순전한 가치 상징물로서의 화폐가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실제로 고진은 이러한 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다.

 

문제는 고진이 <소비자=노동자> 운동에 방점을 두었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 운동의 가치 여부와는 상관없이 운동을 정당화하는 고진의 비판(비평), 트랜스크리틱 자체에 놓여 있다. 불매운동과 지역화페 운동으로 대항운동을 조직하자는 것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그러나, 고진은 코뮤니즘 운동이 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에서 생성된다는 맑스의 냉정한 통찰에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쓴 후 이렇게 말한다. <이 현실을 구성하는 힘 자체는 자본주의에서 온다. 그러한 의미에서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운동에 부수되는 것이고, 자본주의 자체가 낳는 대항운동으로 존재한다>(367). 고진에게 <그러한 의미>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자본주의가 현실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그것에 부수되며 결과로서만, 수동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진에 대해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간 것이 아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을 반응적(reactif)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투쟁 순환 동안 프롤레타리아가 맡아 왔던 능동적 역할들과 창조적 탈주들은 어떻게 되는가? 물론 미시적인 측면의 반동과 더 큰 측면들에서의 배신행위들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이 그랬고, 동독이 그랬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것이 프롤레타리아 역능의 탓인가? 고진조차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지점에서 고진의 <소비자=노동자> 주체성은 자본주의 암적 유기체의 자장 안에서 지난한 생존을 영위해야만 한다. 어떤 ‘출구’도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진의 실천이 완전히 자본에의 포섭 아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럴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 가능성이 짙을 뿐이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트랜스크리틱. 고진은 말한다. <내가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이라 부르는 것은 윤리성과 정치경제학 영역의 사이, 칸트적 비판과 마르크스적 비판 사이의 코드 변환(Transcoding), 즉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는 시도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와 마르크스에 공통된 ‘비판’(비평)의 의미를 되찾는 일이다. … 일반적으로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유물론에 결여된 주체적․윤리적 계기를 찾아내고자 했다. 사실 칸트는 결코 부르주아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나 ‘목적의 왕국’이 코뮤니즘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코뮤니즘은 그러한 도덕적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15-16). 고진의 언급은 매우 가공할 만한(?) 것처럼 보인다. 칸트와 맑스 ‘사이’에 고진은 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칸트가 부르주아 철학자가 아닌 이유는 주로 그의 ‘영구평화론’이 도덕적 정언명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와 목적의 왕국이고 책임 있는 도덕적 주체들이 최고선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곳, 이념들의 고향 ... 등등. 이 왕국에서 맑스와 칸트는 화해한다. 고진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어째서? 대답은 맑스와 칸트가 유사한 방법론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진도 그러려고 한다. 트랜스크리틱. 맑스는 리카도와 베일리 사이에 있었으며 헤겔과 포이어바흐를 횡단했고, 칸트는 <독단적인 합리론에 대해 경험론으로 맞서고, 독단적인 경험론에 대해 합리론으로 맞서는 일을 반복했다>(30). 따라서 고진은 맑스와 칸트 사이에 있으며, 잰걸음으로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트랜스포지션(transposition)말이다. 초월적 통각은 화폐와 더불어 이동을 행한다.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화폐가 눈부신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진의 맑스주의에서 화페는 기본적으로 잉여가치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가치의 실현은 ‘이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종합은 유통 국면에서 실현된다. 잉여가치가 유통 국면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고진의 이론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매우 멀리 나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산업자본의 잉여가치는 단순히 노동자를 일하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총체로서의) 노동자가 만든 물건을 노동자 자신이 사는 데서 발생하는 차액에서 얻어진다>(38).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고진이 맑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잉여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생산부부문을 고의적으로 탈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는 것으로 고려될 뿐이다. 고진에게 잉여가치의 최종심급은 화폐의 유통과 소비에 있다. 이로써 고진의 <소비자=노동자> 주체성의 이론적(계급적) 계보가 드러난다. <상인자본이 공간적인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얻는다면, 산업자본은 기술혁신에 의해 끊임없이 시간적으로 다른 가치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잉여가치를 얻는다>(39). 결국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에서의 부등가 교환과 기술혁신이라는 두 가지 차이의 체계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짐짓 구좌파들의 무지를 꾸짖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서는 가치 체계들 사이의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찾는 대신 그것을 생산과정의 ‘착취’에서만 찾아내는 사고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39).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잉여가치를 칸트의 초월철학에서 찾는 것보다 더 위대하게 난해한, ‘사이’의 사유과정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트랜스크리틱 말이다. 이럴 경우 최근의 신좌파들은 분명히 옛동지들의 명예를 위해 싸울 것 같다. 맑스가 블랑키를 위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상인자본의 잉여가치는 애초에 프롤레타리아와는 상관 없으며, 블랑키는 동일한 전선의 다른 계열에 속하는 공명(resonance)의 한 항(term)이기 때문이다.

 

고진이 이렇게까지 나아가는 데에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 속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생산-소비 공동체 운동이 충분히 실효를 가질 수 있으며, 전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기쁜 촉발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어째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이론의 ‘사이’ 운동과 사유의 ‘잰걸음’에 대해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고진은 이 책을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닐 것이다. 대상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칸트일 수도 있으며, 죽은 브레즈네프나 헤겔, 키에르케고르 ... 등등 이 책에 매우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산노동’인 다중(multitude)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칸트의 정언명법에 따라 건설된 코뮤니즘의 왕국에 한 무더기의 이신론자들이 회당 꼭대기에 십자가를 내걸든 말든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투쟁 순환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트랜스크리틱은 그 누구의 (심지어 부르주아의) 무기도 아니며, 왼쪽으로는 맑스와 한 꾸러미의 계열을, 오른쪽으로는 칸트와 또 다른 한 꾸러미의 계열을 배치해 놓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공명도 산출하지 못한다. 상인자본 또는 쁘띠들. 고진의 <가능한 코뮤니즘>은 혹시 그런 것이 아닌가? 도대체 거기에는 저들 한가한 대학 교수들 외에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가 트랜스크리틱을 위해 그의 비판서 한 줄의 인용이라도 허용할지 의문이라고 한다 해도 괜한 추측은 아닐 것이다. 코뮤니즘은 가능한(possible) 것이 아니라 잠재적(virtual)이며, 현실적(actual)일 뿐이다. 칸트가 있든 없든 그 사실은 동일하다. 고진의 로도스는 신화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가면들 중에 고진의 것은 없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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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끝없는 투쟁 - 가라타니 고진의 轉回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트랜스크리틱』 이후의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전회’라는 말을 자주 한다. 최근 출판된 『가능한 코뮤니즘』,『원리』,『NAM生成』 등에서 보이는 이론적인 고찰은 모두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에 관한 것들이라고 해도 좋으며, 가라타니 고진의 전회란 이론가 가라타니가 실천가 가라타니로 전환한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트랜스크리틱』 이전의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상 출현한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지만, 아이러니컬하게 자본주의를 긍정하고 자본주의의 철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공산주의라는 추상적인 비전 밖에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천가로의 전회가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90년대 중반까지의 가라타니 고진으로부터 원리적인 것을 탐구, 비판하는 일관된 태도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사회적 실천에 대한 지침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모순을 안고 있는 제도로부터 균형을 취해 이론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지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지침이란 개인이 사회성을 상실하고 차이성을 잃어 내셔널한 특수성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 자본주의의 다이내미즘에 몸을 맡겨 단독적으로 자유로운 개개의 결합을 지향함으로써 ‘역사의 종언’이라는 헤겔주의에 대항하는 형태로 ‘끝없는 투쟁’을 추구한다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와이(岩井) : 개개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의 공산주의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와 어디가 다른 것입니까?

가라타니 : 같은 것입니다. (『끝없는 세계』, 203쪽)


이 책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베를린장벽 붕괴, 동구의 붕괴,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라는 역사적 경험에 의해 발생한 ‘맑스주의의 붕괴’=‘역사의 종언’을 받아들이면서 행한 것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등의 이데올로그는 냉전구조의 붕괴를 ‘역사의 종언’이라는 헤겔주의적인 비전으로 수렴한다. 이 헤겔적 비전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류가 생명을 걸고 체제선택을 위해 행하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은 소비에트연방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권이 역사적으로 패배=붕괴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저적인 틀이 인류의 역사에서 승리함으로써 끝을 보았다. 따라서 역사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최종적으로 인류에 의해 선택된 것이며 이후의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저적인 틀을 전제로서 진행하기 때문에 ‘끝났다’고 하는 비전이 그것이다. 따라서 후쿠야마 등의 이데올로그에 의하면 맑스에 대하여 자유주의 사상가로서의 헤겔이 승리한 것이며 역사는 20세기 말에 ‘끝났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1990년대에 행해진 대담에서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강력한 역사적 비전에 대해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맑스)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주장하면서 역사의 목적이나 종언의 관념을 비판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시기의 가라타니 고진에게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반시스템적인 마이너리티운동 등의 급진적인(radical) 민주주의=포스트 맑스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에는 단호하게 비판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처음부터 상황에 대해 ‘윤리’적이며 자본주의적인 경제의 비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것에 의하면 그의 ‘전회’는 상황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냉전구조가 존재하는 시대에는 소련권의 사회주의체제와 자유주의체제의 양자를 비판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미소의 양극구조를 근저에서 지탱하는 세계자본주의의 다이내미즘을 아니러니컬하지만 긍정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제3의 길로서의 코뮤니즘을 가라타니 고진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양극구조를 지탱하는 한편이 붕괴하고 세계가 자본주의 경제권의 승리로 보이는 상황에서는 이론가가 말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1968년부터 1990년대까지 유효하다고 생각되었던 탈구축주의가 보수화되어 오히려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사고가 요청된다고 그는 말한다. 현재 신칸트주의적인 도덕주의(moralism)로의 회귀가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생겨나고 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후 이론가들은 맑스주의의 이념을 재검토하거나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전제를 인정하면서 자유경쟁과 사적 소유가 야기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안전망(safety net)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로의 사상적인 회귀=전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물론 사회민주주의적인 강령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맑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는 서구 맑스주의의 역사의 총체, 즉 루카치, 그람시를 거쳐 알튀세르, 푸코에 이르는 계보를 비판한다. 가라타니는 루카치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임노동-자본의 관계에 적용하고 노동자가 의식의 물상화를 넘어 자본가를 타도한다는 생산중심사관을 제시한 것을 맑스를 헤겔로 후퇴시킨 것이라 비판한다. 더욱이 그람시를 거쳐 알튀세르의 국가 이데올로기장치에 이르는 이론은 혁명화하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일상을 상부구조로 목표를 정하여 제도적인 분석을 행하는 것이지만, 가라타니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상부구조의 연구를 아무리 엄밀하게 하여도, 당연한 것이지만, 노동자계급은 혁명화되지 않고 실천적인 지침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역으로 결과적으로 이론가의 헤겔적인 ‘역사의 종언’으로의 ‘전향’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은 맑스주의에는 효과가 없다고 가라타니는 선언한다. 이러한 이론에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노동자계급과 자본가의 관계에 그릇되게 적용한 것과 생산중심주의적으로 이론을 구성한다고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가라타니는 이러한 이론이 전제로 하는 상부구조, 토대라는 이원론은 『資本論』에서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라타니에게 맑스는 『資本論』 전3권의 도달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가라타니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적인 환상으로서의 종교적인 구조, 즉 신용제도, 가치의 형이상학적인 성질 등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맑스의 가치형태론을 래디컬하게 읽으면서 가치의 幻想性을 폭로하기 위해 가치가 교환의 사후성에서 발생하는 것을 강조한다. 상품의 매수인과 매도인 사이에는 키에르케고르가 ‘공포와 전율’에서 신앙에서 윤리의 구조를 문제로 하면서 윤리적인 것을 허공에 매달고 말았듯이, 가치 그것 자체의 근거가 허공에 매달리는 계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맑스는 그것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가라타니의 맑스독해에는 이러한 의미에서 종종 환상 중단적인 비평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존재하고 매수인과 매도인의 비대칭성을 강조하면서 즉물적인 실천을 환상으로 대치하는 것에 의해 환상을 해체하려고 하는 경향이 내재하고 있다.


가라타니는 『가능한 코뮤니즘』의 서문에서 『트랜스크리틱』의 마지막 장을 쓸 때 큰 ‘전회’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제가 요청하는 윤리는 원리적으로 말해 타자를 단지 가치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하는 시스템이며, 가라타니는 코뮤니즘을 칸트의 말인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를 경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코뮤니즘이 칸트적인 것을 내재시키는 행위에 의해 확증되는 윤리적이며 절대적인 실천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의 가라타니의 윤리에 의하면 실천은 경험적인 레벨에 머무르는데 그치고 칸트가 생각하는 정언명령의 레벨로 고려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 장에서 우연한 실천으로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실천이란 아니러니컬하게 자본주의를 긍정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추상적으로 표현하는데 그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러한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노동자와 소비자 운동의 결합에서 보려고 한다. 가라타니가 지적하듯이 생산중심주의인 맑스주의는 노동자를 혁명의 주체로 파악하기 때문에 한계에 직면한다. 생산중심주의적인 노동자운동은 자본의 능동성이 노동자를 수동적으로 조직하므로 권리획득운동 이상으로는 진전하지 않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오히려 노동자가 주체로서 등장하는 장에서 가능성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자본제 상품이 판매되는 시장에서 노동자는 주체로서 자본에 향할 수 있게 되며 여기에서 비로소 비폭력적이면서도 혁명적으로 노동자는 자본에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노동자가 저항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이라는 G―W―G’의 운동을 그치게 하면 된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그는 자본이 최종적으로 유통과정에서 밖에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여 자본의 증식운동에 잠재되어 있는 ‘목숨을 건 도약‘을 내재시킨 환상적인 핵을 소비자운동이라는 즉물적인 실천에 의해 무산시켜 가치증식운동에 정지를 명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까지 오면 NAM을 말하는 가라타니까지 일보 전진한 것이다. 가라타니는 더욱이 잉여가치의 원천인 노동자가 자본에 자신을 팔 때에도 저항을 나타낼 수 있는 조직을 고려하고 있다. 가라타니는 자본의 무한의 가치증식운동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제 상품을 사지 않고, 자본제 상품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단순명쾌한 윤리를 실천하면 된다고 하여 두 번째의 ‘전회’를 수행하는 것이다.


NAM은 생산협동조합을 통한 소비자로서의 노동운동으로서 고려되는 것이며, 그것은 주체로서의 노동자가 소비자로서 시장에 등장하는 장면을 강조한 불매운동으로부터 한층 나아가는 형태로 발생하는 실천이다. NAM이란 노동자가 자본에 자신을 팔지 않아도 생산이 가능한 장을 창설하는 운동이다. NAM이라는 운동은 호혜성에 근거한 지역화폐의 창설에 의해 개개의 시장이 성립하는 때마다 매수인과 매도인 사이에 자유로이 지역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이므로, 그것이 어디까지 기능하는가 그리고 그 지역화폐인 LETS에 근거한 NAM이 어느 범위까지 확대되는가라는 문제는 유감이지만 여기서 고찰하기에는 어려운 것들이다.


우리들은 가라타니의 1990년 이후의 행보를 조망하면서 그의 전회는 사회주의권이나 동구의 붕괴를 계기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 전회가 『트랜스크리틱』의 결론부에서 소비자=노동자운동이라는 자본의 유통과정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표현된 것이다. 가라타니의 ‘희망의 원리’로서의 ‘코뮤니즘’은 칸트와 맑스를 비변증법적으로 매개하고 맑스를 칸트로부터 읽는 것, 혹은 칸트를 맑스로부터 읽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며 ‘가능한 코뮤니즘’으로서의 자본에 대한 저항운동은 윤리적인 자본에 대한 저항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NAM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공동조합적인 생산자에 의한 트랜스 내셔널한 네트워크적 생산이 만들어지는 새롭게 ‘결합된 悟性’을 초월론적인 통각으로서 기능시키는 코뮤니즘을 목적의 왕국으로서 행위에 의해 확증된 실천이성의 의미로 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어떤 뒤틀림이 있다. 왜냐하면 가라타니 자신이 이러한 LETS를 내재시킨 NAM을 ‘대항물’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후기 정보자본주의 단계의 제도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침식하는 실천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의 『트랜스크리틱』은 칸트를 맑스에 의해, 맑스를 칸트에 의해 읽는 것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다. 원래 가라타니의 이론 자체에 자본주의제도 자체가 만드는 종교적인 환상의 구조를 소박한 실천을 대치시키는 것에 의해 허무하게 한다는 비평적 혹은 환상 중단적인 경향이 내재하지만, 『트랜스크리틱』에서는 가라타니의 종래의 측면에 대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절묘하게 적용하는 것에 의해 가라타니의 논리를 기초지우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가라타니의 이론적 가능성은 칸트철학 자체의 가능성에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칸트는 이론이성에서 인간의 정신의 무한성을 표현하는 것인 내세, 신, 영원 등의 이념을 허무화하면서 이성의 적용을 오성의 범위에 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천이성에서는 오성의 범위에 적용된 이성이 실천이성의 우위 아래, 행위에 의해 확증된 이념의 실현으로 확장된다. 다만 칸트이론 자체의 한계와 가능성은 주체의 근거 지움을 욕망하면서 실제는 주체를 허무화시켜 현실과 이론의 관계 자체가 주체의 실천적 효과 밖에는 아닌 것, 즉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근거 짓는 이론 자체가 근거 지움 불가능이라는 불가능성을 내재시키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은 칸트의 초월론적인 주체를 공허한 주체로 부르며, 헤겔이론은 그 공허한 위치를 주체에게 확보하기 위해 『정신현상학』을 쓴 것이다.


가라타니의 이론은 메비우스의 띠처럼 현실과 이론이 대응관계를 가지면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가라타니에게 NAM의 실천은 자본주의사회의 종교적이며 환상적인 구조를 허무화시키고 거기에 윤리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무한하게 진행할 듯이 보이는 자본의 증식운동에 정지를 명하지만 그 운동 자체가 현재 자본주의제도 총체 자체의 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NAM이 제출하는 공동체의 시스템과 자본주의의 시스템과의 구별 자체를 자본주의가 내재화시킨 경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다만 NAM 자체를 메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현실과 이론의 관계를 유토피아적으로 외부로부터 조망하는 것이 가능한 시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점이 중요하기 때문에 NAM에서 주체가 윤리화되어야 할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호혜성에 기초한 LETS의 운동이 확대되어 복잡한 생산시스템을 갖게 되어 버렸을 때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노동화폐’운동을 추진하는 부르동을 비판한 것처럼 자본을 창조하지 않는다고 하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운동은 자본주의사회의 환상의 구조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그 환상에 내재화되어 있는 경향을 부단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가라타니는 환상의 허무화, 정지의 순간 자체를 실현하는 ‘행위’ 자체의 유물론적인 힘에 모든 것을 걸고 있으며, 그 환상이 중단되는 시간에서 가능성이 근원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이론에 의해 긍정하며 그것을 희망의 원리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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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퍼온글]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데리다가 타계한 뒤 지난 열흘 동안 4개의 추모글을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국내에 데리다 전문가가 드물다보니 저같은 문외한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군요. 오늘 마지막 글을 써보내면서 일단 한숨은 돌렸는데, 급하게 여러 편의 글을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된 건지도 모르겠고 중첩되는 내용들도 좀 있고 해서, 후련한 게 아니라 꺼림칙합니다.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같은 주제로 여러편의 글을 쓰지 말자는 것이라고 할까 ... -_-;;;

그 글들 중에서 비교적 평이하고 분량도 많은 것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가을산님이 데리다 번역본들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절이 좀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조만간 보충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지난 10월 8일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한 데리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철학자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가 타계한 직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는 프랑스가 배출한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인물이지만, 국내에는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始祖)이자 매우 난해한 책들을 쓴 철학자라는 것, 그리고 ‘해체주의’라는 매우 특이한 철학 사조를 창안했으며,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는 불가해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일 국내의 신문들이 쏟아내는 추모 기사들, 때로는 상생(相生)의 철학자로, 때로는 ‘반골 철학자’로, 또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그를 치켜세우는 기사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길래 지성과 사상에 인색한 국내의 신문들이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그를 추모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현전의 형이상학의 해체

 

데리다는 난해한 사상가라는 평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글쓰기와 차이]라는 얼마간 그릇된 제목으로 번역되곤 하는) 같은 그의 몇몇 작품들은 상당히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또는 로고스를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 곧 음성이야말로 참다운 매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루소,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一回的)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전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론: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서의 정의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전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전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의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ㆍ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의 원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에서 이러한 유령들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하며,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그렇다면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간주하거나 생뚱맞게 상생의 철학자로 치켜세우는 일은 그의 철학이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처럼 엉뚱한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저작들 중 제대로 번역된 책들이 매우 드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8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들 중 10 종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심지어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데리다 특유의 현란한 언어유희나 섬세한 논의를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삶이란 저작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에게 데리다는 처음부터 생명을 박탈당한 유령, 환영이었던 셈이다.

  빼어났지만 그만큼 치열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데리다는 실제로 유령, 망령이 되어 그의 저작들, 그의 기록들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서 허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쫒는 대신, 데리다가 그랬듯이, 우리도 그의 기록들 안에 깃들어 있는 타자의 부름에 귀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작품들

 

 데리다는 80여권의 저서 및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수백편의 논문들 및 인터뷰 등을 남겼을 만큼 다작(多作)의 철학자다. 국내에 번역된 책도『입장들』(솔, 1991)『마르크스의 유령들』(한빛, 1996),『다른 곶』(동문선, 1995),『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시네 퐁주』(민음사, 1998),『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 등 10여종이 훨씬 넘고, 그에 관한 해설서도 여러 권 나와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들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비전공자들이 마구잡이로 번역하곤 해서 대부분의 데리다 저서들이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번역도 괜찮고 읽을 만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상당히 난해한 데다가 번역에도 약간 문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긴 하지만, 데리다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책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입장들』은 초기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며, 『에코그라피』는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개관하기에 적합한 책이다. 그리고 『다른 곶』『법의 힘』『테러 시대의 철학』은 유럽 공동체, 법과 정의, 테러와 민주주의, 주권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경으로 데리다의 정치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이다. 

  데리다 해설서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시공사, 1999)는 데리다 사상 전반을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이며,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는 니체, 하이데거 철학과 데리다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데리다 철학의 특징을 간명하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국내 연구자들의 작업 중에서는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 및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을 추천할 만하다. 좀더 쉬운 입문서를 원하는 독자들은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 2003)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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