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끝없는 투쟁 - 가라타니 고진의 轉回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트랜스크리틱』 이후의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전회’라는 말을 자주 한다. 최근 출판된 『가능한 코뮤니즘』,『원리』,『NAM生成』 등에서 보이는 이론적인 고찰은 모두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에 관한 것들이라고 해도 좋으며, 가라타니 고진의 전회란 이론가 가라타니가 실천가 가라타니로 전환한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트랜스크리틱』 이전의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상 출현한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지만, 아이러니컬하게 자본주의를 긍정하고 자본주의의 철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공산주의라는 추상적인 비전 밖에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천가로의 전회가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90년대 중반까지의 가라타니 고진으로부터 원리적인 것을 탐구, 비판하는 일관된 태도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사회적 실천에 대한 지침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모순을 안고 있는 제도로부터 균형을 취해 이론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지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지침이란 개인이 사회성을 상실하고 차이성을 잃어 내셔널한 특수성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 자본주의의 다이내미즘에 몸을 맡겨 단독적으로 자유로운 개개의 결합을 지향함으로써 ‘역사의 종언’이라는 헤겔주의에 대항하는 형태로 ‘끝없는 투쟁’을 추구한다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와이(岩井) : 개개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의 공산주의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와 어디가 다른 것입니까?

가라타니 : 같은 것입니다. (『끝없는 세계』, 203쪽)


이 책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베를린장벽 붕괴, 동구의 붕괴,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라는 역사적 경험에 의해 발생한 ‘맑스주의의 붕괴’=‘역사의 종언’을 받아들이면서 행한 것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등의 이데올로그는 냉전구조의 붕괴를 ‘역사의 종언’이라는 헤겔주의적인 비전으로 수렴한다. 이 헤겔적 비전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류가 생명을 걸고 체제선택을 위해 행하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은 소비에트연방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권이 역사적으로 패배=붕괴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저적인 틀이 인류의 역사에서 승리함으로써 끝을 보았다. 따라서 역사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최종적으로 인류에 의해 선택된 것이며 이후의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저적인 틀을 전제로서 진행하기 때문에 ‘끝났다’고 하는 비전이 그것이다. 따라서 후쿠야마 등의 이데올로그에 의하면 맑스에 대하여 자유주의 사상가로서의 헤겔이 승리한 것이며 역사는 20세기 말에 ‘끝났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1990년대에 행해진 대담에서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강력한 역사적 비전에 대해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맑스)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주장하면서 역사의 목적이나 종언의 관념을 비판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시기의 가라타니 고진에게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반시스템적인 마이너리티운동 등의 급진적인(radical) 민주주의=포스트 맑스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에는 단호하게 비판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처음부터 상황에 대해 ‘윤리’적이며 자본주의적인 경제의 비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것에 의하면 그의 ‘전회’는 상황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냉전구조가 존재하는 시대에는 소련권의 사회주의체제와 자유주의체제의 양자를 비판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미소의 양극구조를 근저에서 지탱하는 세계자본주의의 다이내미즘을 아니러니컬하지만 긍정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제3의 길로서의 코뮤니즘을 가라타니 고진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양극구조를 지탱하는 한편이 붕괴하고 세계가 자본주의 경제권의 승리로 보이는 상황에서는 이론가가 말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1968년부터 1990년대까지 유효하다고 생각되었던 탈구축주의가 보수화되어 오히려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사고가 요청된다고 그는 말한다. 현재 신칸트주의적인 도덕주의(moralism)로의 회귀가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생겨나고 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후 이론가들은 맑스주의의 이념을 재검토하거나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전제를 인정하면서 자유경쟁과 사적 소유가 야기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안전망(safety net)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로의 사상적인 회귀=전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물론 사회민주주의적인 강령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맑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는 서구 맑스주의의 역사의 총체, 즉 루카치, 그람시를 거쳐 알튀세르, 푸코에 이르는 계보를 비판한다. 가라타니는 루카치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임노동-자본의 관계에 적용하고 노동자가 의식의 물상화를 넘어 자본가를 타도한다는 생산중심사관을 제시한 것을 맑스를 헤겔로 후퇴시킨 것이라 비판한다. 더욱이 그람시를 거쳐 알튀세르의 국가 이데올로기장치에 이르는 이론은 혁명화하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일상을 상부구조로 목표를 정하여 제도적인 분석을 행하는 것이지만, 가라타니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상부구조의 연구를 아무리 엄밀하게 하여도, 당연한 것이지만, 노동자계급은 혁명화되지 않고 실천적인 지침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역으로 결과적으로 이론가의 헤겔적인 ‘역사의 종언’으로의 ‘전향’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은 맑스주의에는 효과가 없다고 가라타니는 선언한다. 이러한 이론에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노동자계급과 자본가의 관계에 그릇되게 적용한 것과 생산중심주의적으로 이론을 구성한다고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가라타니는 이러한 이론이 전제로 하는 상부구조, 토대라는 이원론은 『資本論』에서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라타니에게 맑스는 『資本論』 전3권의 도달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가라타니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적인 환상으로서의 종교적인 구조, 즉 신용제도, 가치의 형이상학적인 성질 등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맑스의 가치형태론을 래디컬하게 읽으면서 가치의 幻想性을 폭로하기 위해 가치가 교환의 사후성에서 발생하는 것을 강조한다. 상품의 매수인과 매도인 사이에는 키에르케고르가 ‘공포와 전율’에서 신앙에서 윤리의 구조를 문제로 하면서 윤리적인 것을 허공에 매달고 말았듯이, 가치 그것 자체의 근거가 허공에 매달리는 계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맑스는 그것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가라타니의 맑스독해에는 이러한 의미에서 종종 환상 중단적인 비평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존재하고 매수인과 매도인의 비대칭성을 강조하면서 즉물적인 실천을 환상으로 대치하는 것에 의해 환상을 해체하려고 하는 경향이 내재하고 있다.


가라타니는 『가능한 코뮤니즘』의 서문에서 『트랜스크리틱』의 마지막 장을 쓸 때 큰 ‘전회’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제가 요청하는 윤리는 원리적으로 말해 타자를 단지 가치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하는 시스템이며, 가라타니는 코뮤니즘을 칸트의 말인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를 경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코뮤니즘이 칸트적인 것을 내재시키는 행위에 의해 확증되는 윤리적이며 절대적인 실천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의 가라타니의 윤리에 의하면 실천은 경험적인 레벨에 머무르는데 그치고 칸트가 생각하는 정언명령의 레벨로 고려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 장에서 우연한 실천으로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실천이란 아니러니컬하게 자본주의를 긍정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추상적으로 표현하는데 그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러한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노동자와 소비자 운동의 결합에서 보려고 한다. 가라타니가 지적하듯이 생산중심주의인 맑스주의는 노동자를 혁명의 주체로 파악하기 때문에 한계에 직면한다. 생산중심주의적인 노동자운동은 자본의 능동성이 노동자를 수동적으로 조직하므로 권리획득운동 이상으로는 진전하지 않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오히려 노동자가 주체로서 등장하는 장에서 가능성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자본제 상품이 판매되는 시장에서 노동자는 주체로서 자본에 향할 수 있게 되며 여기에서 비로소 비폭력적이면서도 혁명적으로 노동자는 자본에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노동자가 저항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이라는 G―W―G’의 운동을 그치게 하면 된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그는 자본이 최종적으로 유통과정에서 밖에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여 자본의 증식운동에 잠재되어 있는 ‘목숨을 건 도약‘을 내재시킨 환상적인 핵을 소비자운동이라는 즉물적인 실천에 의해 무산시켜 가치증식운동에 정지를 명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까지 오면 NAM을 말하는 가라타니까지 일보 전진한 것이다. 가라타니는 더욱이 잉여가치의 원천인 노동자가 자본에 자신을 팔 때에도 저항을 나타낼 수 있는 조직을 고려하고 있다. 가라타니는 자본의 무한의 가치증식운동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제 상품을 사지 않고, 자본제 상품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단순명쾌한 윤리를 실천하면 된다고 하여 두 번째의 ‘전회’를 수행하는 것이다.


NAM은 생산협동조합을 통한 소비자로서의 노동운동으로서 고려되는 것이며, 그것은 주체로서의 노동자가 소비자로서 시장에 등장하는 장면을 강조한 불매운동으로부터 한층 나아가는 형태로 발생하는 실천이다. NAM이란 노동자가 자본에 자신을 팔지 않아도 생산이 가능한 장을 창설하는 운동이다. NAM이라는 운동은 호혜성에 근거한 지역화폐의 창설에 의해 개개의 시장이 성립하는 때마다 매수인과 매도인 사이에 자유로이 지역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이므로, 그것이 어디까지 기능하는가 그리고 그 지역화폐인 LETS에 근거한 NAM이 어느 범위까지 확대되는가라는 문제는 유감이지만 여기서 고찰하기에는 어려운 것들이다.


우리들은 가라타니의 1990년 이후의 행보를 조망하면서 그의 전회는 사회주의권이나 동구의 붕괴를 계기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 전회가 『트랜스크리틱』의 결론부에서 소비자=노동자운동이라는 자본의 유통과정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표현된 것이다. 가라타니의 ‘희망의 원리’로서의 ‘코뮤니즘’은 칸트와 맑스를 비변증법적으로 매개하고 맑스를 칸트로부터 읽는 것, 혹은 칸트를 맑스로부터 읽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며 ‘가능한 코뮤니즘’으로서의 자본에 대한 저항운동은 윤리적인 자본에 대한 저항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NAM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공동조합적인 생산자에 의한 트랜스 내셔널한 네트워크적 생산이 만들어지는 새롭게 ‘결합된 悟性’을 초월론적인 통각으로서 기능시키는 코뮤니즘을 목적의 왕국으로서 행위에 의해 확증된 실천이성의 의미로 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어떤 뒤틀림이 있다. 왜냐하면 가라타니 자신이 이러한 LETS를 내재시킨 NAM을 ‘대항물’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후기 정보자본주의 단계의 제도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침식하는 실천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의 『트랜스크리틱』은 칸트를 맑스에 의해, 맑스를 칸트에 의해 읽는 것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다. 원래 가라타니의 이론 자체에 자본주의제도 자체가 만드는 종교적인 환상의 구조를 소박한 실천을 대치시키는 것에 의해 허무하게 한다는 비평적 혹은 환상 중단적인 경향이 내재하지만, 『트랜스크리틱』에서는 가라타니의 종래의 측면에 대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절묘하게 적용하는 것에 의해 가라타니의 논리를 기초지우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가라타니의 이론적 가능성은 칸트철학 자체의 가능성에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칸트는 이론이성에서 인간의 정신의 무한성을 표현하는 것인 내세, 신, 영원 등의 이념을 허무화하면서 이성의 적용을 오성의 범위에 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천이성에서는 오성의 범위에 적용된 이성이 실천이성의 우위 아래, 행위에 의해 확증된 이념의 실현으로 확장된다. 다만 칸트이론 자체의 한계와 가능성은 주체의 근거 지움을 욕망하면서 실제는 주체를 허무화시켜 현실과 이론의 관계 자체가 주체의 실천적 효과 밖에는 아닌 것, 즉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근거 짓는 이론 자체가 근거 지움 불가능이라는 불가능성을 내재시키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은 칸트의 초월론적인 주체를 공허한 주체로 부르며, 헤겔이론은 그 공허한 위치를 주체에게 확보하기 위해 『정신현상학』을 쓴 것이다.


가라타니의 이론은 메비우스의 띠처럼 현실과 이론이 대응관계를 가지면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가라타니에게 NAM의 실천은 자본주의사회의 종교적이며 환상적인 구조를 허무화시키고 거기에 윤리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무한하게 진행할 듯이 보이는 자본의 증식운동에 정지를 명하지만 그 운동 자체가 현재 자본주의제도 총체 자체의 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NAM이 제출하는 공동체의 시스템과 자본주의의 시스템과의 구별 자체를 자본주의가 내재화시킨 경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다만 NAM 자체를 메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현실과 이론의 관계를 유토피아적으로 외부로부터 조망하는 것이 가능한 시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점이 중요하기 때문에 NAM에서 주체가 윤리화되어야 할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호혜성에 기초한 LETS의 운동이 확대되어 복잡한 생산시스템을 갖게 되어 버렸을 때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노동화폐’운동을 추진하는 부르동을 비판한 것처럼 자본을 창조하지 않는다고 하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운동은 자본주의사회의 환상의 구조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그 환상에 내재화되어 있는 경향을 부단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가라타니는 환상의 허무화, 정지의 순간 자체를 실현하는 ‘행위’ 자체의 유물론적인 힘에 모든 것을 걸고 있으며, 그 환상이 중단되는 시간에서 가능성이 근원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이론에 의해 긍정하며 그것을 희망의 원리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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