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아시아의 근대화를 읽는 서브 텍스트
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지음, 임성모 옮김 / 산처럼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혹시 "근대화연쇄점"을 기억하시는가?

내가 어렸을 때 "근대화"는 오늘날의 세계화 혹은 지역화처럼 유행어였던 모양이다. 구멍가게보다는 조금 크고 오늘날 우리가 마트 혹은 수퍼마킷이라는 호칭으로 익숙한 잡화점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의 가게들 중에 일종의 체인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근대화연쇄점이라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굳이 "근대화의 역군"이라든지 하는 우리 주변의 떠들석했던 여러 구호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근대화""반공"과 함께 최고의 이데올로기였다. 근대화가 의도하고자 했던 숨겨진 정서는 아마도 "못 살겠다 갈아보자""갈아봤자 더 못산다"던 이승만 정권 시절의 지긋지긋한 가난, 우리 민족 반만년을 억누른 배고픈 설움을 극복해보자는 것이었을 게다.

근대화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였다.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란 책에 대해 말하면서 왜 느닷없이 "근대화" 타령인가, 그것은 "만철", 아니 "만주국"이 우리 근대화의 실제 모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따라 "근대화(近代化, modernization)"는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쉽게 정의되기 어려운 말이면서 시대 상황과 그 말이 쓰이는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생각하는 근대화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의 근대화는 크게 두 가지을 의미한다. 그것은 '산업화와 민주화'이다. 막스 베버식의 관점을 차용했을 때 근대화란 봉건사회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것을 아시아 혹은 다른 여타 후진 사회에 도입했을 때 근대화는 단순하게 보자면 서구화 혹은 서유럽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협소한 개념으로 보는 이들은 어느 한 사회가 다른 단계로 전이되어 가는 상황에서 응당 겪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근대화는 단순하게 서구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 근대화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전통적인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이행해 하는 과정을 의미하고,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의 근대화는 어찌 보자면 서구화(경제적으로는 산업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의미한다)를 의미한다.

이 책의 저자인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 같은 발음이지만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와 착각하지 마시길 -  교수는 "대동아공영권, 쇼와 파시즘, 중일전쟁" 등 일제 침략사를 연구해온 일본의 중량급 역사학자다. 그의 연구 제목들이 알려주듯 그는 전쟁전 일본의 과거를 탐문하고 있다. 그의 저서 "만철"에서 종종 일본에 의해 피지배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묻어나는 것은 역시 그가 이런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탓이다. 스티븐 E. 앰브로스의 저서 "대륙횡단철도"는 미국의 건국과 발전 과정에서 남북전쟁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을 대륙횡단철도 부설에 놓고 있다.

1865년 미국에서 시작된 센트럴 퍼시픽과 유니온 퍼시픽의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되는 대사업은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대의 삶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바뀌게 되는 과정, 20세기 최대의 사건이랄 수 있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의 도화선이자 바탕이 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되는 초석을 놓아기 때문이다. 중국은 상해와 같은 동부 해안으로부터 옌안과 같은 내륙으로 100km 들어갈 때마다 시대적으로 10년씩 뒤로 밀려난다고 한다. 근대화가 동부 해안 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탓이다. 중국이 장강 삼협댐 건설과 같은 내륙의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우리는 얼마전 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3시간만에 주파한다는 고속철도는 그러나 서울에서 멈춰버렸다. 만약 이 열차가 평양을 거쳐, 신의주,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모스크바, 바르샤바, 베를린에서 파리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반도국가라는 지리점 잇점을 십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비록 일제강점기였기는 하나 우리의 선조들이 열차를 타고 만주와 세계를 향해 떠날 수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만주와 고구려사, 과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도 이 책은 재미난 도입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주국과 박정희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만철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미국의 대륙횡단철도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서부개척의 총본부였던 것처럼, 만철이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일제의 만주경영을 맡은 사실상 식민기구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일종의 모델하우스처럼 만들고 싶었던 나라 만주국의 실질적인 브레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근대화 모델 박정희의 사상적 뿌리와 모델이 바로 그곳 만주에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의 신경(新京:現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8·15광복 이전까지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만철보다는 만주국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며, 저자 자신이 만철을 이야기하며 만철을 통해 만주국 경영 문제가 전쟁 전과 전쟁 후를 잇는 주요 맥락으로 살피고 있는 이유이다. 만주국은 전후인 1950년대 일본이 이룩한 경제기적의 기본 정책을 실험했던 곳이고, 현재 남북한의 지배 엘리트들의 양대 뿌리를 이룬 박정희와 김일성이 청년기를 보낸 곳이다. 만주는 동북아 근/현대사의 블랙박스인 것이다. 박정희만 만주 출신인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최장기 국무총리를 지냈던 최규하 전 대통령 역시 만주국 관리 출신이란 점에 주목해 보자.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원형이 시작된 곳,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에 의한 재벌중심의 경제 성장 정책이 시작된 곳이  바로 그곳이다.

근대화의 두 얼굴 - 착취와 풍요

이 책을 읽노라면 종종 이 책의 저자 고바야시 히데오가 간과하고 있는 몇 가지가 느껴져서 개운하지가 못하다. 그것은 고바야시 히데오가 만철의 낭만적인 면모에 몰입한 나머지 만철의 기본적인 속성과 숨겨진 의도를 적절하게 노출시키지 못하거나 가볍게 넘어가는 것들이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동인도회사를 건립한 뒤에 네덜란드를 식민지배했고, 영국인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뒤 인도를 식민지배했다. 만철은 일본이 만주를 식민지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일본은 민간회사를 가장해 제국주의적 침식의 한 수단으로서 만철을 이용한 것이다. 제국주의적 침탈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일본 정부는 만철이 주도한 식민 침탈을 단지 민간회사의 실수로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로 잡아 뗄 수 있었다.

앞서 우리 사회 근대화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고 말했다. 저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만철의 경제개발, 경제발전에 주목하면서 만주철도와 근대화가 지닌 다른 어두운 측면을 손쉽게 건너띈다. 오늘날 지역사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대자본의 유통업체들이 지역 사회의 작은 구멍가게들을 질식시키듯, 지역사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대자본의 서점들이 지역 사회의 영세 서점들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철도를 통해 이룩한 근대화(산업화)는 지역 혹은 한 국가, 민족의 자급자족적 경제 질서를 붕괴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적 팽창을 좀더 손쉽게 만들어 준다. 조선의 근대화가 단발을 강요했던 것처럼, 철도 부설을 위해 저임금과 비인간적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얼굴은 고스란히 박정희 정권 시절의 근대화 역군들의 얼굴과 정확하게 오버랩된다.

우리는 경부고속도로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싼 값, 최단기간에 건설되었다는 근대화의 업적에 도취해 종종 그 뒤안길에서 살인적인 노동강도, 안전없이 강행된 공사로 인해 7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있는(기존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를 '동북아시대위원회'로 개칭하고 그 구조와 기능을 크게 확대) 동북아시대위원회의 미래 비전은 종종 과거 만철과 일본이 추진하고자 했던 '대동아공영권'- 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보았을 때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 다른 성질의 유사한 지향을 보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동북아네트워크 건설은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근대화의 두 가지 덕목 중 한 가지인 산업화는 분명하게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추진한 근대화의 후유증으로 인해 절름발이 근대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서구에서는 일찌감치 통과해왔고, 이제는 극복의 대상이 된 "민족국가" 건설이란 측면에서 아직 절름발이 상태에 놓여 있고, 식민지 지배 마인드 속에 추진되었던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산업화의 후유증 속에 놓여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민주화의 추진과정에서 끊임없이 박정희 모델이라는 이전의 망령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싯점마다 되풀이 되는 과거 청산과 수구보수세력의 역공은 물론 그들 자체가 이땅의 견고한 지배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문제도 있지만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세력, 민주화를 성취하겠다는  개혁세력이 박정희 모델로 표현되는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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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1

nationalism의 형성 배경

1. 대중은 언제 출현하는가?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분리시켜주는 것을 총괄하여 '문화'라고 부른다. 이는 개인이 유기체를 넘어서서 공유되고 전달되는 정보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대중은 크게 mass culture와 popular culture로 번역된다. mass culture는 대량으로 복제되는 문화의 측면에 초점을 맞춘 개념(문화의 생산과정, 대량복제가 가능한 매스미디어가 등장한 근대자본주의 이후의 문화산물로 한정되는 개념)이라면 popular culture(문화의 소비 또는 수용과정, 산업화 이전의 민중문화 내지 민속문화를 포괄하는 개념)는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향유하는 문화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는 '대중mass'이라는 존재 자체, 대중사회mass society를 전제로 성립된다. 대중의 등장은 대량생산, 대량전달, 대량소비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다면 대중이란 누구인가?

2. 대중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성립되었는가?

이는 전통적인 공동체(게마인샤프트)의 해체, 기존 사회의 공간적, 사회적 제약에서 풀려난 개인들이 광범위하게 이동하면서 형성되는 매우 새로운 인간관계의 조건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서로 간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아이덴티티를 공유하면서 일정한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동질감을 갖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를 민주주의 의식을 갖은 '시민'으로 칭했고 근대국가에서는 이들을 '국민'이라고 칭했다. 여기서 근대 국민국가가 나타날 때 형성되는 '민족주의nationalism'를 살펴보자. 민족주의는 국경, 주권, 영토에 의해 형성된 국민국가에서 자국민의 애국심과 소속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념이 된다. 이는 그들의 동질감과 정체성을 강조하여 강력한 국가의 기반이 되는 아이덴티티를 형성한다.

근대사회에서 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카를 도이체는 "광범위한 지역에 확장하는 경제 교류의 결과 중심지역이 주도권을 잡는 방식으로 문화적 동화(언어의 동질화)가 일어나 '소수민족'이 보다 커다란 지배적인 내셔널리즘에 흡수되어간다"고 논했다.

이를 이어받아 민족주의를 공업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서 이해한 에른스트 게르너는 "사람들의 아이덴티티의 원천은 지역색이 농후한 공동체와 그 안에서 주어지는 생득적 역할에 있다"고 보았다. 그 안에서는 엘리트와 서민의 사이가 문화적으로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국가가 생길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유동적인 노동인구를 필요로 하는 공업화 과정, 즉 많은 사람들이 혈연과 지연으로 맺어진 공동체의 제약을 벗어나 대거 이동하면서 민족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공용어의 확보는 그들의 협동과 분업에 필요한 요소였고 때문에 언어와 문화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통합이 요구되는데 이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참고> 에른스트 게르너,  <민족과 민족주의>(예하)   백낙청 엮음,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창비)

3. 왜 민족주의가 형성되는가?

그렇다면 왜 민족주의인가? 민족주의의 기원을 민족주의 특질과 연결시킨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사회에 들어 교통과 커뮤니케이션(신문, 잡지, 책)의 급속한 진전 속에서 사람들은 국민적 정체성을 획득했다고 본다. 그는 원거리를 넘어 타자를 공감시키는 능력과 심리적 동원을 통해 광범위하게 확보된 공통의 정체성은 의사소통수단의 발달로 역사적 동력을 얻는다고 본다. 그는 '국민'이라는 것은 이미지로서 마음에 그려진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고 피력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가 단위로 사람들을 통합하고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문화적 장치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만은 아니라는 전통에 대한 재해석의 문제이다. 홉스봄은 우리들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다고 생각하기 쉬운 '전통'이 사실은 많은 경우 근대에 접어들어 인위적으로 '창조된'(다시 말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홉스봄은 전통이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참고>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나남),  홉스봄, <전통의 창조>/<전통의 날조와 창조>(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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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2

일본적 내셔널리즘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1. 일본의 시대 구분

상대上代(~794) : 아마토, 나라시대

중고中古(794~1192) : 헤이안시대

중세中世(1192~1603) : 가마쿠라시대--남북조시대--무로마치시대

근세近世(1603~1868) : 에도시대

근대近代(1868~) : 메이지시대(1866~1912)--다이쇼(1912~1926)--쇼와(1926~1989)--헤이세이(1989~)

 

2. 일본적 민족주의는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일본은 엄격한 의미에서 개국을 받아들인 근대 이전에는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이는 왕 중심의 봉건적인 중앙집권국가 체제였던 한국, 중국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구별점이 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영주나 무사가 각각의 지역을 통치하고 세금을 걷어들이는 지방분권 체제를 유지한 봉건사회였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강력한 구심점이자 내셔널리즘의 상징이 된 천황를 중앙에 세움으로써(천황제) 비로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국을 단행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각각의 나라) 유지의 반발과 통합에 대한 위기의식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그들의 민족주의nationalism이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은 근대문화의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민'을 이러한 민족주의에 동원한다.

물론 에도시대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중국이나 한국사람과는 다르다는 종족적 정체성ethmic identity은 있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학國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동양의식은 중국(명나라-청나라)을 중심으로 한 중화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아비의 나라인 명나라의 뒤를 이어 오랑캐국인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호란을 통해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小중화의식은 일본에서는 에도 말기 일본중심의 국학을 꽃 피우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계층적,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근대적인 내셔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합의식의 성립은 메이지 30년간의 정치, 행정, 교육 제도의 중앙집권화와 공업화,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수단의 발달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3.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야만'을 극복한 '문명' 국가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문명사관은 대대적인 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학교를 통해 문명개화를 교육하고(이는 '순행'의 전통을 만들고 신민에게 천황을 선보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군대를 통해 천황의 국가를 결집시키며, 철도를 깔고 전신망을 구축하면서 각 지방을 중앙으로 모음과 동시에 일본인들의 의식과 정서를 하나의 커다란 세계 속으로 통합해가는 토대를 마련한다.

1)문명개화정책

이 과정에서 근대국가의 주체인 대중이 형성되는데, 이는 개혁에 필요한 근대적 개인의 필요에 의해 추진된 신분차별 타파(사민평등사상)를 통해 얻어진다. 이와 함께 징병제를 통해 국가방위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여기서 군대는 새로운 문물(침대, 서양의 기술, 전투력)을 선전하고 익히는 학교가 된다. 또한 서양동요의 음을 따온 창가를 교과시간에 편입시킴으로써 노래를 통한 일체감, 소속감을 부각시킨다. 각 지역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오마와리상(경찰관)을 둠으로써 지역 치안을 담당함과 동시에 그들의 소속을 중앙으로 응집시킨다(파출소제도). 그리고 긴자와 같은 서양식 거리를 조성하여 서양의 건축, 문화를 소개한다. 긴자에 시계탑을 세움으로써 전통적인 시간 개념을 부수고 정시법에 따른 표준시를 정한다. 이는 국가가 개인의 시간을 관리함과 동시에 그들의 노동력을 끌어올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꾼다든지 매장풍습을 화장으로 바꾸고 상투를 자르는 등의 일상의 감각을 바꾸는 개혁을 통해 근대적 대중을 만들어나간다.

2) 식산흥업정책

이러한 일상적인 환경의 변화는 비일상적인 계기를 통해서 더욱 밀도 있게 이루어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박람회이다. 이는 동물원이나 박물관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공감각(기린이나 코끼리의 등장은 전화나 라디오의 등장 못지않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는 대중에게 진기한 것들,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통로가 된다. 이는 분명 소비하고 싶은 충동과 연결되고 황무지에 떨어진 자전거가 눈깜짝할 사이에 자동차로 둔갑할 수 있는 생산 핫라인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그들의 식산흥업정책이 성공하고 '부국강병'을 외칠 수 있는 국민적 합의가 깔려 있다.

물론 이러한 일말의 개혁 단행 조치에 맞선 지방 유지들의 반발과 혼란스러워하는 지역민들의 소외 문제는 당연히 있어왔다. 특히 개혁의 첫 단계에서 실시된 판적봉환(구영주들로 하여금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반납하도록 하고, 구영주를 구영지의 지사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함)과 폐번치현(번을 폐하고 현을 놓음 : 임명한 지사들을 면직시켜 도쿄로 소환하고, 정부가 임명한 부지사, 현령을 파견하여 새로운 행정구역 단위인 부나 현을 다스리게 한 제도)은 사실상 봉건적인 지방 분권 체제를 종식하는 제도로 그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반발을 잠식시키는 가장 주된 힘은 문명개화정책과 맞물려 돌아간 식산흥업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전신(우정국:우체국)과 철도

하지만 박람회는 아무리 사람을 많이 동원한다 해도 일부층을 위한 것이라는 한계가 있는 바, 국민의 체험을 공통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학교와 군대이다. 그들은 수학여행, 운동회, 소풍의 전통을 여기서 새로 새웠으며 이를 통해 집단적인 일본인 의식을 심어주었다. 또한 우편제도를 알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가교로 사용하는데, 이는 수학여행이나 군대에서 고향으로 보내는 엽서(이후 인쇄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한다)를 무료로 함으로써 엽서에 그려진 천황과 서양문물을 고스란히 지방 곳곳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 또 엽서를 보내는 사람의 눈에 보인(수학여행과 소풍) 새로운 것들에 대한 동경 등을 전국적으로 배달하게 된다.

이는 미디어의 발달 이전에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중 확보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근대 천황제를 확립시키기 위한 첫번째 질문, '천황은 왜 중요한가?'에 대해 전국민이 '만세일계'를 외칠 수 있는 일체성을 은연중에 주입시키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한들, 지방 곳곳까지 그러한 것을 국가가 심어줄 수는 없는 법. 국가는 여기서 지방과 중앙을 잇는 철도사업을 진행해 지방의 노동력을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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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3

1. 다이쇼기를 전후로 일본인들의 생활문화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메이지시대 상류층을 중심으로 비일상적인 여가문화로 자리잡아가던 서양풍은 다이쇼기에 접어들면서 대중들의 일상으로 침투한다. 특히 도쿄를 중심으로 도시공간에서 근대적 소비문화가 급속히 확산되는데 도심과 교외 주택지를 연결하는 사철의 발달과 함께 생겨난 백화점문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 후쿠자와 유키치는 왜 근대 물리학에 주목했는가?

오랫동안 쇄국을 유지해온 일본(지역국가)이었지만 개국을 단행하면서는 서구문화의 채용을 국책사업으로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발맞추어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되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 과학 및 테크놀로지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일본의 독립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생긴 것이긴 하지만 그는 유럽 근대문명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불가결한 '도구'이며 그 도구에는 물질문명뿐 아니라 근데 테크놀러지를 만들어낸 근대 자연과학(물리학)이라는 학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는 근대 물리학에서 일본의 독립을 복돋우는 정신, 즉 '동양에 없는 것은 유형의 차원에서는 수리학이고, 무형의 차원에서는 독립심' 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잠깐 초유의 베스트셀러 <학문의 장려>를 살펴보자. 그는 여기서 '신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로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다. 또한 당시 일본인 3천만 명 중 글 읽는 사람은 대략 다 보았다는(70만 부) 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 대중적 스타가 된다. 그러나 이후 그의 글들을 살펴보자. <문명론 개략>에는 그는 인도인을 원숭이인 줄 알고 죽였다고 주장하는 영국인과 독일군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인도인과 같이 취급당하지 않으려면 하루 빨리 문명을 배워 서양을 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 김옥균의 쿠데타(갑신정변) 실패를 보고 <탈아론>을 발표한다. 그는 여기서 '나쁜 친구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나쁜 친구들이란 당연 조선과 더 나아가서는 중국대륙을 뜻한다. 이후 그의 논문은 일본 정부도 곤혹스러워 할 정도의 찬신민지론으로 치닿는다. 그는 1885년 이후 계속해서 이러한 사관에 입각한 논문을 발표한다. <조선만은 정리되어야 한다>, <조선의 형편을 다시 걱정할 필요가 있나?>, <조선 백성들을 위해 조선의 멸망은 축하할 일>, <조선의 멸망은 조선의 피할 수 없는 대세다>. 마지막 두 개의 논문은 일본 정부에서도 판매 금지를 시킬 정도로 그들의 식민지화 정책에 도움이 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내부의 논란을 막아보겠다는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일본 사회 좌파 지식인의 활동은 별도로 다음 번에). 작년에 바뀐 신화폐에서도 그가 여전히 1만엔 권 주인공이라는 것은 현재 일본 사회의 보수성과 그것이 통용되는 시대라는 점을 다시금 시사한다.

참고>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이토 나리히코, 행복한책읽기)

 

3. 다이쇼 문화는 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였나?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다이쇼 문화는 메이지 문화에 비해 소비 중심적이고 사생활 중심적이며 향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이상주의적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측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기점으로 도시중간층이 주도적인 개혁 주체로 전면에 나섬으로써 그 문화를 주도했다고 본다. 청일, 러일전쟁 이후 전쟁이 싫어진 대중들의 요구는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집중화를 낳았다. 이들은 문화생활을 중시하고 서양식으로 지어진 문화주택에 거주하면서 대중적, 소비적인 문화에 흡수(소비자) 내지는 소비의 재창조자(생산자)가 된다.

 

관동대지진이 문화에 미친 영향

그러나 이러한 도시문화는 동경의 반 이상을 폐허로 만든 1923년 관동대지진(대진재)을 기점으로 새로운 도시계획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낳는다. 이러한 도시계획에 의해 형성된 특징 중 하나가 도로공사로 도시는 새롭게 구획되고 정리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도시로 나고야를 꼽는다. 도시의 발달에서 중요한 것은 동경과 요코하마, 시부야와 신주쿠를 잇는 도시근교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간 사철이 급속히 놓여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사철의 정거장에는 어김없이 대형 백화점이 자리를 잡게 된다.

 

백화점 문화의 발달

사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백화점은 당시 사회의 유행을 리드하고 대중의 생활을 규격화, 획일화하는 데 기여한다. 백화점은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향해 뻗어나가던 근대 일본 문화를 새로운 모델에 대한 동경 또는 욕구를 채우기에 충분한 기호품으로 채워 넣는다. 일본의 백화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첫째는 전통백화점으로 그들의 전통문화(혼수품으로 평생 입을 기모노 옷감을 해가지고 간다든지 하는)에 기반한 포목상을 중심으로 한 백화점. 둘째, 사철을 중심으로 한 쇼윈도에 진열된 물픔을 구입하는 백화점으로 나뉜다. 전통백화점은 현재에도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귀족층의 대표적인 소비통로가 되고 있다.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정보의 대중화

또한 관동대지진의 피해는 도시의 새로운 복구와 더불어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의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요인이 된다. 다시 말해 지진 당시 라디오가 충분히 보급되었더라면 지진의 피해뿐 아니라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비롯한 대내 외국인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죽이는 일반 대중의 마녀사냥과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각성이 그것이다. 때문에 관동대지진 이후 철도의 보급과 함께 라디오를 비롯한 출판문화, 인쇄문화가 꽃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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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4

1. 쇼와 시대의 전시 총동원 체제의 시대적 배경

국가가 인간의 근로를 관리했던 시스템인 총동원 체제에 의해 운영되던 쇼와 시대는 본격적인 전쟁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태평양전쟁과 전시 총동원 체제는 전시법, 전시체제라는 시대적 비극을 낳았으며 대중문화가 꽃피었다고 평가되는 다이쇼 시대와는 반대로 대중문화의 침체를 낳는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당시 산적해 있는 문제 중 시급한 것으로 정치적 이슈가 된 것은 역시 여성의 참정권과 식민지 국민의 참정권, 국민의 보험과 보건교육, 노후 계획과 연결된 연금과 같은 민주복지사회의 요소들이다. 전쟁기에 이러한 것이 왜 필요했으며 왜 각료의 정권다툼에 끊임없이 주요한 이슈가 되었는가?

이는 전쟁에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회 복지제도를 구현함으로써 천황의 이름만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할 수 없다는 정치, 사회적 요구이기도 하다. 국가를 위해 나가서 싸우는 국가방위의 역할을 국민들에게 부가시키고 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복지제도의 구현이 시대적 요구 사항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일본은 그들의 적인 미국, 중국과 전쟁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세계공항에 부딪친 세계적 정세는 일본뿐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자원이 없는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선공격, 보다 많은 식민지 구축을 주 무기로 한 '파시즘'체제로 국가를 정비한다.

 

2. 평화헌법 제9조로 촉발된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

그들이 말하는 전후戰後란 제국헌법에 의해 운영되던 당시 사회를 '평화헌법'으로 재편성하고 새헌법에 맞는 전전과는 다른 시대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특히 평화헌법의 헌법 제9조는 주권이 천황에게서 국민에게로 옮겨졌다는 것과 전쟁포기와 비무장화로 상비군을 폐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전쟁 책임에 대해 천황에게 면책을 주고 대신 신의 권자에서 천황을 끌어내리게(천황제를 명맥만이라도 유지시키는) 된다. 이는 현재까지도 천황제를 둘러싼 일본 사회의 우익화와 전쟁 가해국이면서도 피해국이라는 피해의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게 되는 첫번째 요인이 되고 있다.

패전을 공표(1945)하고 미군정체제에 돌입한 일본은 미국의 소비, 대중문화의 유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평화헌법에 기초한 비무장화는 그들이 전시 총동원 체제하에서 갖춰놓은 군수, 공업 라인을 공업, 산업화로 돌릴 수 있는 핫라인으로 적극 이용된다. 또한 천황의 인간선언으로 촉발된 사회 분위기는 한국전쟁특수를 맞아 전국민이 생산 라인에 돌입하는 적극적인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후 문화를 리드하는 것이 재벌의 해체를 통해 얻어낸 '기업'과 '관료'가 되면서 일본을 제조업의 왕국으로 바꾸어놓는다. 기업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형태를 보면 그들의 복지정책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특징인  '종신고용제' '연공서열' '기업에 대한 애사심 강조' 등은 민주적인 분위와 맞물려 기업별 자치 노조를 결성하거나 고도성장기의 정치적 판도(자민당과 사회장의 대결)에도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전쟁특수와 맞물린 일본의 고도성장기 정책

여기서 잠깐, 한국전쟁은 세계적인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 터진 것임을 짚고 넘어가자. 한국전쟁으로 일본 사회에 징병제에 대한 부활 논의가 제기되는 가운데 한 발 앞서 미군정은 당시 냉전체제에 대한 위기감으로 일본 통치 방법을 민주화, 비무장화에서 부국화, 재무장화로 바꾸게 된다. 이러한 역코스는 평화헌법의 기조를 제안한 맥아더를 중심으로 표면화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자위대'이다. 자위대는 모병제로 월급을 받는 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로 미군의 주문하에 한국전쟁으로 집중되는 냉전 위협으로부터 일본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지켜내기 위한 정책의 집행이었다. 미국은 냉전체제에서 일본을 지키기 위해 민주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평화헌법의 내용을 깨뜨린 것이다. (이것이 일본 사회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나중에)

이러한 전쟁특수와 비무장화로 상대적으로 산업화에 집중된 정책으로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한다. 먹는 것에서 출발, 전쟁 전 수준으로 회귀하는 것을 목표로한 전후 1940년대로부터 일본은 1950, 1960년대에는 이케다내각의  '국민소득 배증계획'에 따라 '소비혁명' 내구소배재의 보급에 주력하게 된다. 당시는 일본 경제에 있어 가장 경기가 좋다는 뜻의 '진무경기' 시기로 올림픽으로 호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량소비시대로 가는 기반이 형성된다.

 

>>이쉬, 한 나라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무에 이리 거쳐야 할 것이 많단 말인가. 또 이름은 얼마나 헥깔리고. 머리 터지겠다. 정치권으로 넘어가면 헥헥 그게 그거 같고 이렇게라도 정리를 안 하면 돌아가시겠다. 푹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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