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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이지메.
일본 소설에 등장하는 괴롭힘, 아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왕따라는 말은 느낌이 살지 않는다고나 할까.
이지메. 라는 단어에서 확 오는 느낌은 더 답답하고 더 악의에 가득찬 느낌이다.
비채에서 나왔던 <헤븐>이라던가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에서도 어떤 의미로 이지메 당하는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는데, 나는 <물의 관>쪽이 훨씬 나았다. 읽고 난 후의 기분도 좋았고. 뭐야, 이야미스 어쩌고 할 때 언급되던 미치오 슈스케 맞나? 할 정도로 이번에 치유되는 느낌마저 받았다.
미치오 슈스케는 이번 작에서 꽤 많은 상징들을 등장시킨다. 댐, 도롱이 벌래, 인형, 타임캡슐, 편지, 열쇠고리 등등. 주인공들의 눈길과 손길이 닿는 곳, 생각이 미치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물들은 그 당시의 의미로도 꽤 흡입력 있지만 이야기 전체를 연결하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하나 풀리는 수수께끼처럼 이야기를 풍성하게 바꾸어 준다.
이지메에 고통받는 자신을 타임캡슐에 담은 것이 신경쓰여 평범한 꿈이 담긴 편지로 바꿔 넣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아이.
너무나 평범하고 삶에 대한 확신이 없는 채 살아가는 자신이 답답해 그 말에 흔들리는 남자아이.
그 둘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타임캡슐을 다시 파내기로 결심하는 순간, 세상은 마지막으로 각자의 의미를 바꿀 기회를 준다.
수많은 이미지가 등장함에도 과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하나의 확실한 결말을 향해 달리는 동안 회수되는 그 의미들이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내가 뭔가 취향이 변했는지도 모르겠고, 너무나 평범한 삶 가운데 갑자기 등장한 특별한 과거에 무너져 내릴 뻔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의 주인공 이쓰오가 변하는 과정, 스스로의 삶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상냥하게 대하는 모습은 정말 좋았다. 영리했고, 따뜻했으며 어른스러웠다.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달과 게> 때만 하더라도 어떤 과잉적인 에너지가 미치오 슈스케 특유의 '기괴함'이나 '찝찝함'을 느끼게 해 줬었는데, 이번엔 이야기의 스케일은 줄어들고 아주 조용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를 끝까지 잘 마무리 지었다는 생각이다. 기괴함과 찝찝함이 없는 미치오 슈스케가 낯설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틈이 없이 이야기에 집중했다. 성장소설로서의 관점으로 본다면 <달과 게>가 음악 테이프의 A side, <물의 관>이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다른 B side 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달과 게에서 뭔가 부족한 점을 느꼈다면 물의 관에서, 물의 관에서 조금 심심했다면 달과 게에서 그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표지도 예술이고, 번역도 좋다. 단어나 표현에 고민하는 모습이 항상 감사하다.
그런 걸 간파할만큼 날카롭지는 못하더라도, 읽는 내내 감정이 끊기지 않고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별 다섯에 별 넷. 그러나 당분간 잊지 못할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