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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 - 성공한 근대화, 실패한 근대화 ㅣ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총서 99
김석균 지음 / 예미 / 2022년 11월
평점 :
부의 역전, 그것은 바다로부터 시작됐다
예미에서 출판한 김석균 교수님의 <해금>은 근대화의 성공과 실패를 규정한 동아시아 3국의 해금령에 관해 이야기한다.
김석균 교수님은 동아시아 해양 문제 전문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해양법학자이다. 해적 연구의 전문성으로 ‘해적박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국제해양법 연구를 하면서 유럽의 대항해시대와 아시아 진출, 이에 따른 동아시아의 개항기 역사로 관심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 해금 책날개 중 ]
Photo by Meg Jerrard on Unsplash
저자는 근대 동서양의 부가 역전되고, 오늘날 서양 주도의 세계사가 이루어진 기원을 ‘해금’으로 설명하고 해금을 깨고 근대화한 일본과 해금을 통해 쇄국을 택한 청과 조선의 근대화 시기를 조망한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정치체제와 경제제도, 사회제도 속에서 살고 있다. 왜 서양적 사고는 합리적이고 앞선 사고라고 생각하는가. 오늘날 서양의 지위와 역사적 성취는 근세 유럽인들의 해양 개척의 결과물이거나 그 파생물이다.
15세기에서 19세기의 세계의 맹주는 중국이었고 그 지위는 견고했다. 명나라 집권기였던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정화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가 인도양으로 일곱 차례 원정을 떠났다. 60척이 넘는 거대한 ‘보물선’과 그보다 작은 200척의 지원선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승선 인원이 3만 명에 달했다. 함대에서 가장 큰 배는 4층짜리 갑판에도 길이가 120m, 폭이 52m를 넘었고 엄청난 양의 화물과 1,000여 명의 선원을 태웠으며 아홉 개의 돛대에 달린 돛을 펴고 항해했다. 배의 규모를 상상하기 힘든 정도인데 콜럼버스 선단에서 가장 컸던 산타마리아호가 23m에 달하는 것을 비교하면 정화 원정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Photo by David Dibert on Unsplash
그중 정화의 7차 항해(1405~1433)에서 사망한 이후 중국 명나라의 조치는 해금이었다. 출항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모자라 배를 건조하는 것도 불법으로 여겼다.
중국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다. 국가의 영토가 모호하던 시기에서 벗어나 해상 강국을 추구한 두 나라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해양을 확대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라는 두 강대국의 세계를 양분해서 권력을 갖겠다는 것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다.
포르투갈의 선교사는 일본에도 찾아갔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에 취임에 천황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모두 빼앗았다. 히데요시는 자신을 추종하는 다이묘의 영지를 확보하기 위한 침략으로 조선을 주목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히데요시의 가문의 보호자를 자처한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은 1600년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했다.
161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양의 선교사가 일본에서 기독교를 퍼트리는 것을 경계했다. 영화 ‘사일런스’는 ‘기리스탄’이라는 기독교인이 가혹한 고문과 배교할 것을 강요당한 역사를 고발한다. 기독교 금지와 쇄국령의 시행으로 해외무역은 활기를 잃고 일본은 고립의 길을 걷게 된다.
Photo by Katherine McCormack on Unsplash
1854년 일본은 흑선의 출현으로 문호개방을 하는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흑선은 당시 일본의 화력으로 맞설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벌어 메이지 유신을 이루어 낸다.
사쓰마번과 조슈번 사이의 불화를 잠재우고 사카모토 료마는 삿초동맹을 이루어내고 쇼군과 다이묘의 관계가 긴장을 가지는 시기를 거쳐 마침내 대정봉환(쇼군의 권력을 황제에게로 이양하는 사건-에도막부의 종결)을 통해 메이지 정부를 만들어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산업과 전쟁무기를 다량으로 확보하여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인도차이나반도 점령, 말레이반도 점령, 호주 침범 등 대동아공영을 이루었다.
한·중·일의 근대화를 결정지은 ‘해금’과 ‘개해’의 선택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하는 과정이다. 해양 진출은 해양자원 개발과 같은 해양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이용을 넘어선 의미가 있다.
영도에 위치한 해양박물관에 다녀오고 더 많은 사람이 해양에 관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역사는 바다를 차지한 나라에 의해 선도되었다. 미래를 선도하는 나라도 해양 진출에 대해 열린 사고와 개방적인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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