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임진왜란에 관한 뼈아픈 반성의 기록 클래식 아고라 1
류성룡 지음, 장준호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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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관한 뼈아픈 반성의 기록

 

아르테에서 출판한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반성의 기록이다아르테에서는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고전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클래식 아고라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고그 첫 번째는 <징비록>이다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요즘 제 2의 임진왜란을 경계하며 선생이 남긴 기록을 통해 무엇을 준비하고 경계해야 하는지 알리는 책이 징비록이다.

 

조선 성종시기 신숙주는 일본과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하라고 왕에게 유언하였고조선의 사절단을 보내게 된다일본으로 가는 도중 대마도의 날씨가 나빠 배편으로 더는 나아가지 않고 머물며 돌아왔다.

 

이후 1586년 일본의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지를 가지고 조선에 왔다.

 

야스히로는 예조에서 베푼 연회에서 후추를 한 줌 뿌리고 악공들과 궁녀가 이를 줍자 너희 나라는 이토록 기강이 해이하니 머지않아 망할 것 같다고 한다본국으로 돌아간 야스히로는 히데요시에게 끌려가 목이 잘렸다.

 

쓰시마의 소 요시시게는 충격으로 사망하고 아들 소 요시토시는 근심에 빠졌다다행히 유력한 가문 고니시 가문은 가까웠고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가 적극적으로 쓰시마를 도왔다.

 

아시카가 다카우지(1305~1358)가 1336년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를 창건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1358~1408)에 이르러 중국 중심의 국제 체계에 들어서게 된다무로마치 막부는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1537~1597)가 1573년 오다 노부나가(1534~1582)에 의해 막부가 있는 교토에서 추방당하면서 237년 만에 멸망했다전국시대 말기에 등장한 노부나가는 거의 일본을 통일할 뻔하며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웅으로 회자된다그의 심복 가운데 하나가 바로 히데요시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1582년 심복의 반역으로 횡사하자 히데요시가 경쟁 관계가 된 가신들과 지방의 강자들까지 차례로 격파한 다음 규슈까지 정복해 일본을 통일했다.

 

명의 태조 주원장(1368~1398)이 법전 형식으로 저술한 <황명조훈>의 내용 가운데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대목이 있어 조선을 이를 바로잡고자 변무사를 지속적으로 보냈다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바탕이 되는 <대명회전>에 이성계는 고려 왕을 네 명이나 죽이고 즉위한 자라는 대목이 발견되어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짓밟는 상황이 벌어졌다선조에 이르러 명이 <대명회전>의 오기를 수정해주겠다는 약조를 받고 선조는 물론 조선 전국이 미친 듯 날뛰었다.

 

정여립 역모사건은 동인의 영수인 우의정 정언신(1527~1591)에게 책임을 맡김이후 정철((1536~1593)을 불러 역모의 수사를 맡아 반역이 기정사실로 전환된다.

 

선조의 건저사건 전쟁이 임박해 세자를 책봉하자서인 정철은 광해군을 천거하지만 선조는 두 번째 후궁 인빈 김씨가 생산한 사형제 중 차남인 신성군을 총애했다배필로 신립(1546~1592)의 딸을 들임공빈 김씨가 낳은 임해군은 성미가 포악하고 둘째 광해군은 세자로 적격이다.

 

건저 사건으로 정철을 위시한 서인이 밀려나고 동인이 득세하지만 동인은 분열함제대로 보복하자는 이산해 등의 북인과 조정에 인재가 없으니 보복을 최소화하자는 류성룡의 남인으로 분열한다.

 

류성룡이 군무를 담당하는 좌의정으로서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판서까지 겸했다는 점이다전라좌수사의 보임은 좌의정이 병조와 협의할 사아인 데다 이조판서의 전결이 있어야 가능하다.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원균이다그는 가지고 있던 판옥선 100여 척과 200년 동안 모았던 관고를 불지르고 육지로 도망간다.

 

이일은 적이 다가왔다는 보고를 한 농민을 오히려 목을 베 군이 전멸하고 자신은 도망친다.

 

문경새재에 도착한 고니시는 새재를 지키는 병사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다.

 

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가 좌측의 추풍령으로 가고 2군의 가토 기요마사가 우측의 죽령으로 향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문경새재에서 돌파구를 열어야 했다홀로 도망친 이일이 문경새재를 지키던 군사들과 함께 도망쳤기 때문이다.

 

1592년 4월 28, ’탄금대전투‘ 당시 신립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을 벌였다지켜야 할 제래를 포기하고 주력인 기병을 활용하기 곤란한 곳에 진을 치고 결정적인 패착을 연달아 반복했다.

 

히데요시가 임진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히데요시가 쓰루마쓰를 이용해서 신분을 세탁하고 장차 새로운 막부의 창시자가 될 계획을 세웠지만쓰루마쓰가 죽었으니 후계 구도가 원상으로 돌아갔다히데요시의 천한 가문 출신은 끝까지 그를 괴롭혔다무엇보다 자신이 죽고 나면 칼을 뽑고도 남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중 가장 두려운 존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상대적으로 젊고 건강했으며 아들들까지 많아 기회가 오면 가만있을 인물이 아니었다동쬭의 호죠를 멸망시킨 다음 중앙 지역에 있던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늘려준다는 구실로 호죠의 영지로 이전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는 좀더 완전한 방법으로 이에야스를 통제해야 했다임진전쟁은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제어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의 활약에 일본군은 당황했다그들 개념에서 의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곽재우가 전공을 올리자 김수는 그를 역적으로 모함한다김수박홍원균은 책임조차 추궁당하지 않으며 관직이 높아졌다.

 

이순신은 전투에 집중할 것을 주문하지만 원균은 물에 빠져 죽은 적의 목을 베기에 바빴다원균은 항상 이순신의 덕택에 공을 얻으면서도 오히려 시기하고 모함했다.

 

5월 17일 일본군은 행동에 나섰다조선 왕의 도주라는 생소한 개념은 그들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했고지도부인 상인 가문 출신의 행정전문가 고니시와 히데요시의 인척이자 무장인 가토는 수시로 알력다툼을 벌였다.

 

임진강에서 가토는 조선군을 유인하자 김명원한응인은 추격할 것을 명한다유인책인 것을 눈치챈 유극량의 만류에 신할은 그의 목을 베려한다.

 

매복에 걸려든 무수한 군사들이 임진강에 몸을 던지거나 무의미하게 전사했다.

 

또한신각은 도성 북방의 해유령에 매복하고 있다가 약탈을 마치고 돌아가던 적을 기습해 수십 명을 베었는데규모가 작지만 육전에서 최초로 거둔 승리였다그런데 신각이 받은 것은 포상이 아니라 사형이었다도주하던 김명원이 모든 죄를 신각에게 덮어 씌웠다그것을 믿은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신각을 처형했다진상을 알게 되었지만김명원에 약간의 추궁조차 없었다제정신으로는 믿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파직된 류성룡이 복권된 후 명에서 파견된 무관 임세록을 맞이했다류성룡은 명에게 원군을 요청할 생각이었지만명은 임세록을 통해 조선이 명을 배신하고 일본과 야합한 상황으로 의심했다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때 조선이 통조하지 않은데다불과 20일 만에 도성이 함락되는 등 의심받을 여지는 충분했다.

 

선조가 6월 22일 국경 의주에 닿았는데놀랍게도 훨씬 이전부터 명으로 망명할 결심을 밝혔다신하들은 경악했다. ‘왕이 국가인 당시에서 왕이 나라를 떠나는 것은 국가의 멸망과 다르지 않았다신하들이 당파를 초월해 반대했지만선조의 결심은 갈수록 굳어갔다신하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 선조는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고 명으로 가려했다.

 

그토록 망명을 원했던 선조는 안타깝게도 계속 조선의 왕으로 남아야 했다선조가 잇달아 사신을 보내 망명을 애걸했지만명의 반응은 싸늘했다.

 

히데요시는 이순신이 없어야지 서해 보급로를 확보하고 전쟁을 승리로 가져갈 수 있음을 알았다그는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포로 언제 오는지 고니시를 통해 조선의 조정에 정보를 전한다.

 

이순신은 거리상 부산포로 적을 맞기가 어려웠고고니시가 비록 가토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지만적장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이순신이 자리를 지키자 선조는 이순신을 없앨 기회로 여기 그를 삭탈관작한다.

 

원균은 다시 한번 삼도수군을 일시에 날려버린다.

 

적을 마주하기 싫었던 원균은 권율의 명령으로 어쩔수 없이 출전하여 세계 해전 사상 초유의 사태라 할 수 있는 삼도수군을 일시에 날려버린다사실상 조선 수군은 괴멸했다원균의 명을 어기고 십여 척 빼돌린 부하장수의 배가 조선 수군의 모든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가토를 이용한 절묘한 한수로 조선의 조정을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했다이후 보여주는 명량해전에서 승리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일본군 130척이 실재와는 달리 이순신 장군이 적선을 최소화해서 보고했다고 짐작한다선조는 이미 이순신을 어떻게든 죽이려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이순신은 짐작했고자신의 공적을 제대로 전달하면 자신의 목숨이 단축되리라 생각했다고 저자는 짐작한다.

 

근거로 명량에서 출전한 일본군 함선이 1,000여척에 이르고 실록에 등장하는 일본군 함선이 명량 앞바다를 가득 메웠다고 보아 130여 척은 제대로 된 기록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명량에서 대승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은 판옥선의 특징 때문이다원거리에서 함포 사격이 가능하고백병전을 가능한 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징비록을 읽는 동안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았던 사실을 믿기 힘들었지만실재로는 훨씬 더 비극적이고 선조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유경과 고니시와의 거짓 조약을 히데요시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히데요시는 어떻게 해서든 이에야스를 출전시켜야 했기에 그가 출전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문이 멸문하리란 사실을 직감했다고 여긴다.

 

결국 선조가 성을 버리고 파천하고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의병과 성을 버린 군주를 아무도 죽이지 않는 점등 히데요시가 이해하지 못한 사실로 이에야스는 결국 출전하지 않는다.

 

이는 결국 이에야스의 동군과 히데요시 측근으로 구성된 서군의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으로 에도 막부가 탄생하고 히데요시 가문은 멸문한다.

 

명 역시 요동 지역의 지배력을 공백이 있음이 밝혀지고 청이 발원하기로 이른다.

 

역설적이게도 류성룡의 <징비록>은 17세기 후반 왜관을 통해 일본에 흘러들어 출판되어 조선의 정치붕당육군수군 편재를 연구하는 교재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일본은 <징비록>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대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신경썼다숙종 때 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징비록>이 출판된 사실을 확인한다.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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