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속 전염병 - 왕실의 운명과 백성의 인생을 뒤흔든 치명적인 흔적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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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운명과 백성의 인생을 뒤흔든 치명적인 흔적

철저한 고증과 사실적 기록에 입각한 조선시대 전염병의 역사

 

매일경제신문사에서 출판한 신병주 교수님의 <우리 역사 속 전염병>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돌아보기 위한 조선 시대 전염병을 다루고 있다.

 

                Photo by zero take on Unsplash

저자인 신병주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조선시대사학회 회장한국문화재재단 이사문화재청 궁능활용 심의위원외교부 의전정책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으며역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전염병 책날개 중 ]

 

애청했던 조선왕조실록 팟캐스트에서 박시백김학원남경태 님과 더불어 조선 시대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알아듣기 쉬운 설명으로 뇌리에 남았던 신병주교수는 지상파 방송에서도 본인의 전공을 충분히 발휘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역사가이다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맞이해 선조들이 겪었던 전염병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의료기관이 있었으며누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이 책을 다루고 있다.

             Photo by Yohann LIBOT on Unsplash
 

<조선왕조실록>에는 역병이나 역질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2,000여 건 이상이 나타난다고 한다조선 건국의 결정적 사건이 되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거론한다첫 번째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두 번째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세 번째남쪽으로 왜구가 쳐들어올 염려가 있다다음으로 네 번째 이유가 전염병의 유행이었다전염병은 역사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쳐왔다.

 

지금 읽고 있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가장 큰 동인은 국권 침탈과 호열자다조선에서 콜레라에 대한 공식 기록은 19세기 <순조실록>에 처음 등장한다당시에는 병명도 몰라 괴질이라 했다점차 호열자虎列刺로 불렸는데콜레라의 음차인 호열랄虎列剌의 을 로읽으며 호열자가 되었다호열자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증상이 호랑이가 몸을 찢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중국에서는 호열랍虎列拉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호열랍이라는 뜻 역시 호랑이가 몸을 늘려서 꺾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Photo by Sugarman Joe on Unsplash

1902년 토지의 배경이 된 하동 평사리에 불어닥친 호열자는 전국에 유행했다고 하며춘원 이광수의 부모 역시 당대 호열자로 사망했다고 한다.

100년의 시간을 더 돌려 순조시대, 2년간(1821~1822) 조선에는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당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의 증상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때의 전염병은 콜레라였다.

 

콜레라와 더불어 조선 후기 최대의 전염병은 천연두였다천연두는 언제부터 어떻게우리나라에 유행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흔히 두 개의 경로를 통해 천연두가 전파되었다고 추측된다첫 번째 경로는 대부분 전염병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사례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랴오둥반도를 건너 들어왔다는 것두 번째 경로는 산둥지방으로부터 황해를 거쳐 들어왔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천연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의 4남인 성녕대군이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Photo by rawkkim on Unsplash

호열자천연두와 더불어 홍역은 조선 후기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가던 전염병이었다조선시대 홍역은 천연두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았다몸에 반점이 일어나는 등 증세가 천연두와 비슷하여 이를 구별하기 애매했었다홍역과 관련이 있는 기록은 <태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홍역도 일반 백성은 물론 왕실도 홍역을 피할 수 없었다한양의 인구가 증가한 것이 홍역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이러한 대표적인 전염병과 왜란과 호란의 전쟁경신년의 대기근으로 조선시대 백성의 삶은 고달팠다.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한 기관은 왕실의 의료기관인 내의원과 백성들의 의료를 담당한 혜민서전염병 치료를 전담한 활인서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이 있다제중원의 모습은 지금도 서울 대학로 서울대학병원 안에 남아 있다병원 본관 뒤편에 자리한 대한의원이 그것이다.

1908년 완공된 대한의원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적인 병원으로 초대 교장은 근대적인 종두법 연구를 이어받은 지석영 선생이다.

 

지석영 선생은 조선 후기 정약용 선생이 실마리를 마련한 종두법 연구를 이어받았다정약용 선생은 다방면에 걸친 저술과 지식을 남겼다선생은 조선 후기 홍역과 두창과 같은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한 의학서인 <마과회통>을 집필했다. ‘마과회통이란 마과즉 마진(홍역계통의 병과 그 치료법을 모두 모아 잘 통하도록 정리했다는 뜻이다.

 

정약용 선생 이전 한국을 대표하는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 선생이 있다임진왜란이라는 전쟁으로 인해 기아와 역병이 유행하자이에 대한 대책으로 왕명을 받고 편찬한 책이 <동의보감>이다.

 

조선시대는 유교 질서 아래 남녀의 차별이 강조되어 여성의 경우질병이 앓아도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기를 거부하는 여성 환자들이 있었다왕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의녀에 관한 논의가 태종대에 전개되었다태종 때 제생원에는 자질을 갖춘 의녀가 5명으로 그 수가 부족하여 다시 의녀를 뽑아 달라고 요청한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 선조들은 전염병의 위기가 닥쳤을 때 오늘날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도 이를 극복했다오늘날에도 학을 뗀다’, ‘염병할 놈이라는 말은 전염병이 얼마나 백성을 지속해서 괴롭혔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조선시대 선조들이 전염병을 극복한 역사를 미뤄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전염병의 시대도 극복하고 과거의 평화로운 일상을 다시 회복하길 바란다.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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