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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1 - 우리 역사 속 파란만장 이야기
장원섭 지음 / 푸른영토 / 2022년 1월
평점 :
우리 역사 속 파란만장 이야기
푸른영토에서 출판한 <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는 우리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지면으로 풀어내고 있다.
장원섭 교수님은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랫동안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지도해오고 있으며,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최근에는 중국학자들의 한국고대사 연구 논문을 번역하여 국내 학술지에 소개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 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책날개 중 ]
추측하건대 <자투리 한국사>는 ‘우리 역사 속 파란만장 이야기’라는 시리즈로 출판될 거로 보이는데 이번 도서는 1권에 해당한다. 소개하는 모두 13가지 이야기이다. 하나같이 흥미롭고 과거 할아버지가 우리 역사를 차근차근 알려주듯 재미난 이야기 형식으로 소개한다.
13가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비울이(魚肥里)에 떠도는 원혼 : 탁지부대신 어윤중 피살사건
빼앗긴 왕위를 되찾아라 : 김헌창의 난과 명주군왕
대야성(大耶城)에 부는 바람 : 삼국통일전쟁의 불씨가 되다
후삼국의 명운을 가른 고창(古昌) 전투 : 안동의 명문가 삼태사
효(孝)냐, 충(忠)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가문이냐, 국가냐, 선택의 기로에서
망국(亡國)의 왕자, 8백년 만에 돌아오다 :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린 베트남 왕자 이용상
어리석은 군주(君主), 한 시대의 막을 내리다 : 개로왕과 도림
조선의 치욕, 비변사(備邊司) 창고에서 시작되었다 : 우물안 개구리였던 조선
7년 전쟁의 서막, 조선은 깜깜이었다 : 무뎃뽀의 비극
비참하고도 서글픈 전쟁 신미양요(辛未洋擾) : 광성진의 혼이 된 어재연 장군
마산포(馬山浦)의 한숨 소리 : 흥선대원군 납치 사건
탄금대의 비극, 조선은 무대포(無鐵砲)였다 : 신립과 무뎃뽀 군대
이국(異國) 땅에 꽃 피운 충절 : 강항의 간양록
무엇하나 빼놓을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한국 땅에 뿌리 내린 베트남 왕자 이용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베트남 여행 때 놀랐던 사실 중 하나는 베트남과 대한민국의 역사의 흐름이 너무도 흡사하다는 점이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시기도 비슷했고, 외세의 영향을 받았던 점이나 남북으로 분단된 점과 이후 베트남은 공산화되어 현재는 다른 정치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노이를 둘러보면 베트남 리 왕조(1009~1225)의 시조 리 꽁 우언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베트남인들이 리 왕조를 흠모하는 이유는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 끊임없이 저항을 지속해 마침내 지배에서 벗어난 왕조이고 독립 국가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리 왕조 다음의 진 왕조(1225~1400)는 리 왕조를 몰살하게 되는데, 리 왕조의 왕족인 이용상(1174~?)은 지방호족의 반란과 쩐 왕조의 몰살 계획을 알아차리고 도성을 탈출해 송나라를 거쳐 안착한 곳이 황해도 옹진이었다. 2달에 걸친 험준한 뱃길을 뚫고 옹진반도의 남단 창린도에 도착한 이용상 일행은 육지로 향하는 도중 도적 떼가 마을을 약탈하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구하게 된다. 고려 조정은 그들을 크게 환영했고 이용상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으로 봉하면서 대우했다.
고려군의 쳐들어왔을 때 이용상과 부하들은 고려 병사와 함께 부대를 편성하여 수성 전략을 세웠다. 이들이 만든 성이 오늘도 옹진에 남아 있는 화산산성이다. 그들의 후예들은 화산 이씨, 정선 이씨가 되어 800년이 지나 베트남 고향의 선조의 흔적을 찾아 방문했다.
베트남에서는 리 왕조의 혈통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가 3,600km이나 떨어진 한국에 후손이 온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안타까운 전투 중 하나는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이다. 왜군은 조총을 가지고 있어 부산성도 한나절에 함락하고 한양을 향해 전력으로 북상했다. 왜란 초기 왜군의 군세는 기세가 등등했다. 부산진전투를 지휘한 충정공 정발 장군과 다대포 전투를 맡았던 윤흥신 장군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산진과 다대포를 함락한 왜군은 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개와 고양이를 포함한 살아있는 모든 것을 학살했다. 이들이 용감하게 항전했다는 사실은 전투에 참여한 왜인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왜군이 북상하자 조선군은 당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인 신립이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게 되었다. 신립은 기병으로 과거 북방의 만주족을 소탕한 경험이 있어 국가적 영웅이었다. 그는 기병의 우수함을 과신해 심지어 조선군의 수군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류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을 걱정하니 그는 창, 칼만으로 방비할 수 있다며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다.
충주 탄금대는 남한강과 달래강이 합류하는 사이에 솟아있는 산으로 본래는 섬이었다. 달래강 일대 평야 지역에서 회전을 한 사실을 두고 문경새재를 버린 신립의 판단에 후대에까지 그는 비난받고 있다. 그가 개활지를 선택한 이유는 왜군은 보병이고 아군은 기병이므로 개활지에서의 전투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또 하나는 당시 조선군은 전투 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므로 배수진을 쳐야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하게 싸울 것으로 판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왜군이 삼군으로 나눈 군대 중 좌군, 우군은 벌써 충주를 지나쳐 충주 일대가 포위망에 빠질 것을 막기 위해 개활지에서 회전을 펼쳤다고도 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조선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기록하고 한양에 이르는 길목을 내주게 된다.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어로 조총, 포를 의미하는 ‘뎃뽀’도 없이 왜군을 맞이하는 조선의 군대를 두고 ‘무뎃뽀’ 군대로 생각했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 군은 나가시노 시타라가하라 전투에서 철포도 없이 재래무기인 활과 창으로 대적하는 다케다 가쓰요리 군을 가리켜 총도 없는 ‘무뎃뽀놈들’이라고 비웃었다. 이 전투에서 ‘뎃뽀’로 무장한 노부나가 군은 ‘무뎃뽀’의 다케다 군을 전멸시켰다. 이때부터 치밀한 계획이나 사전 준비 없이 무모하게 달려드는 사람을 일컬어 ‘무뎃뽀’라 부르게 되었다.
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백제와 신라 경계를 공략하여 신라 영토로 만들고 도독부를 두어 경계를 강화했다. 이곳의 중심이 되는 성은 오늘날 함양의 대야성이다. 대야성의 성주는 도독 김품석이었다. 백제의 의자왕은 윤충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대야성을 함락할 것을 명령한다.
백제군은 항복하는 김품석 부부를 죽이고 이를 백제 왕도에 보내게 된다. 김품석의 아내인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김춘추는 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일 외에는 원수를 갚을 길이 없다고 다짐한다.
김춘추는 직접 고구려로 가서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의 목숨을 건 외교활동은 이때부터였고, 십수 년의 노력 끝에 당나라와 손을 잡는 데 성공한다.
이외에도 흥선대원군의 납치 사건, 신미양요에서 활약한 어재연 장군과 임진왜란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이 오히려 일본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사례 등 역사 속 흥미로운 사건이 수록되어 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분은 <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세계사>를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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