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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 - 광복 이후 근대적 도시에서 현대적 대도시로 급변하는 서울의 풍경 ㅣ 표석 시리즈 3
전국역사지도사모임 지음 / 유씨북스 / 2021년 10월
평점 :
광복 이후 근대적 도시에서 현대적 대도시로 급변하는 서울의 풍경
유씨북스에서 출판한 전국역사지도사모임의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는 오늘날 서울에 남아 있는 표석을 따라 서울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도서이다.
전국역사지도사모임에서는 표석으로 읽는 근대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시리즈를 출판했고, 일제강점기의 서울 풍경을 담은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개화와 근대화의 격변 시대를 지나는 대한제국의 서울 풍경을 담은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까지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을 걷다>에 이어 완결편으로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를 완성했다.
세계에서도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대도시인 서울을 전문가와 지역민 인터뷰를 거쳐 서울 도심과 부도심 지역으로 나눠 주제를 정하고, 지역에 녹아 있는 이야기를 표석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제1부 ‘근대적 도시화의 시작’은 종로 길에서 모더니스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명동 길에서 문화 예술을 용산길에서는 금단의 땅의 비밀을 소개한다.
영등포 길에서는 금융 허브를 마포 길에서는 한강의 기적을 더듬어본다.
종로는 조선이 건국되면서 만들어진 상업의 중심로였다. 아침저녁으로 성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리는 종루가 있었고, 궁궐의 남북으로 뻗은 광화문 앞길과 돈화문로도 종로에서 만나 남쪽 길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다 해서 운종가로 불렀다. 종로는 명실상부한 서울의 중심지였다.
Photo by INHYEOK PARK on Unsplash
1980년대까지 ‘종로서적’은 서점이자 만남의 광장이었다. 그때 ‘종로에서 만나’라는 말은 곧 책을 읽으며 친구를 기다리던 종로서적을 의미했다.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종로에는 지금도 광화문 교보문고 입구 벤치 위에는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저자인 염상섭이 앉아 있다.
명동은 1930년대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저밍 생긴다. 당시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의 로망은 미쓰코시백화점에서 ‘런지’를 먹고 옥상정원에 올라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명동성당 일대와 중국대사관 근처를 제외하고는 명동은 폐허가 되었다. 이후 재건하는 과정에서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양장점, 백화점, 다방, 금융기관의 본사 등이 들어서며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가 된다.
1970, 1980년대에는 군사독재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으로 잦은 시위가 있었다. 2010년대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명동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현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유동인구가 줄어 명동에는 빈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Photo by JEONGUK - on Unsplash
1945년 8월 18일 지금의 여의도공원인 경성비행장에 C-47 수송기 한 대가 멎었고 20여 명의 군인이 뛰어내렸다. 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전진부대워인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와 버드 중령과 미국전략정보처 OSS 대원들 22명이 중국 시안에서 날아왔다.
미군과 광복군은 오랜 시간 ‘국내 진공작적’을 준비했었고, 작전이 성공했다면 한반도의 분단도 한국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김구 주석은 일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이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일이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참전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라고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여의도가 비행장이었고, 당인리에는 발전소가 있었으며, 마포는 전차 종점이 있었다. 한번은 들어봤을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은 마포종점 인근에 살던 젊은 부부가 가난했지만, 열심히 살았고, 남편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다 과로사로 세상을 떠났지만,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사망 소식을 모르는 아내가 남편을 기다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편이 전차를 타고 나타날 거라는 믿음으로 한없이 기다리다 어느 날 종적을 감췄다는 내용이다.
노래 가사를 보면 당인리 발전소, 여의도 비행장, 강 건너 영등포를 나타내고 있어 당시 서울의 지리를 가늠할 수 있다.
Photo by Park Gunwoo on Unsplash
제2부 ‘현대적 대도시의 건설’에서는 서울의 도시 확장과 대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은 1960~1970년대 연평균 9%라는 고도성장을 이루며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서울로 인구가 몰려들면서 1950년 160만 명이었던 인구는 1970년 500만 명을 넘어섰고, 인구 급증은 도시문제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수도 서울의 안보와 맞물려 도심 기능의 분산 · 주택난 해결과 인구 분산 · 경제성장 등을 목적으로 서울은 행정구역을 늘리거나 넓히면서 경부고속도로와 아파트로 대변되는 영동 개발 등 도시계획과 신도시 개발을 매우 빠르게 진행했다.
1963년 이전까지 강남 지역은 아직 서울이 아니었다. 경기도 광주군 지역이었고, 1963년에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다. 이후 1975년 성동구 중 한강 이남 전역(지금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강동구)이 강남구로 분구되었다.
지금은 강남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 중간이라는 뜻으로 '영동'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실제로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 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그 당시는 강북이 곧 서울이었고, 한강 이남의 광주군 사람들은 강 건너를 '서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강남은 말 그대로 논밭이었고 도심 외곽에 불과했다.
장마나 홍수 때면 물에 잠기기 일쑤였고, 잠원동은 누에고치를 치던 곳이었고, 양재동은 말죽을 끓여 먹이던 곳이었고, 압구정은 한명회의 정자가 있는 휴양지였다. 그런 강남에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1968년은 서울 개발의 분수령이 되는 해이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안보 정국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했다. 강북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와 주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어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강 다리가 끊기면 이전보다 더 큰 비극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
서울 인구를 분산시키고 유사시 피난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방안으로 강남 개발을 결정학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토지 개발과 환지 처분을 통해 땅 주인들로부터 보류지를 기부받고 체비지를 마련했다. 체비지를 판매하여 개발비용을 충당했다.
1966년 200~400원 하던 땅값은 1970년 4,500~6,000원, 1971년에는 1만 4000~1만 6,000원까지 오르니 땅 주인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더불어 공유수면매립을 통해 땅을 마련하기도 했다. 땅 주인에게 보상이 필요 없는 국가 소유의 하천이나 간척지를 메우면 땅이 만들어졌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압구정 일대의 모래를 파내 강변을 쌓고 제방을 쌓은 곳에 지은 아파트다. 반면에 반포지구는 물에 잠기는 저지대였는데, 막대한 예산을 이유로 메우지 않고 배수펌프장을 만들고 아파트를 지었다. 물에 잠기더라도 아파트 위층으로 대피하면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강남 개발은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과 맞물려 시작됐다. 지금의 신사 · 논현 · 역삼 일대의 영동1지구는 약 1,55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이어 1970년 11월 서울시는 대치 · 삼성 · 청담 · 압구정 일대의 영동2지구 약 1,200만 제곱미터를 개발하겠다는 계획과 봉은사 남쪽 삼성동에 당시 상공부 청사와 산하 단체를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개발 초기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주를 꺼리자 정부에서는 강력한 강남 유인 정책과 강북 억제 정책을 시행했다. 서울의 중심지를 영동지구로 옮기겠다며 서울시청 영동 이전 계획을 발표했다.
반면에 1973년부터는 종로구, 중구 일대에 상점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택지 개발을 금지했다.
강남으로 핵심 인프라를 옮기는 작업도 이어졌다. 법원과 검찰청, 관세청이 이전했다. 사대문 안의 명문 고교들은 동문의 반대에도 강제로 이전키셨다. 지하철 2호선도 왕십리에서 서소문까지의 일자선 계획은 순환선으로 바꿔 강남의 대부분 지역을 편입시켰다.
반포에 고속버스터미널을 건설하고,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을 폐쇄했다.
서울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서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대도시임에도 역동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도시 체계는 세계인이 선망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서울이 지금의 서울이라는 역사를 가지기까지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졌다. 서울에 있는 표석을 따라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여정이 될 것이다.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는 소중한 사진 자료와 표석이 있는 장소를 별도로 기재해 여행자와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도시의 과밀을 해소하기 위해 인구의 밀도가 낮은 곳으로 서서히 팽창한다. 지금의 영등포, 성동구, 은평길 일대는 공업화와 함께 서울이 팽창한 지역이다.
서울에 주거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에서 내가 가장 주목하는 지역도 이 세 곳이다. 아직 집값이 많이 오르지 않은 지역이고, 60년대 7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져 이제는 구축과 신축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지역이다.
저자는 영등포를 기점으로 근현대사의 표석을 추적한다.
영등포는 철도역이 들어서며 지역이 팽창했고, 가장 유명한 사건은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생긴 경성방직(주)이다.
영등포동, 양평동, 당산동, 도림동, 문래동 일대는 공업지역으로 팽창했고 만주사변을 일어나 군수공장이 호황을 누려 이 지역의 중요성이 더해졌다.
내년에 서울에 집을 마련해야할 수도 있는 처지라 서울의 지리에 관해 궁금하던 터라 서울의 지리와 역사를 알아가는데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실 방송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이 나와 동명이나 지역을 이야기하면 어떤 지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으나, 이 책을 통해 개략적인 서울의 발달사와 더불어 지역이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바라건대, 내년에 서울에 집을 마련한다면 책에 나오는 표석을 찾아다니며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는 역사 탐방을 마음껏 해보고 싶다. 매번 서울 여행은 제한된 시간으로 가는 곳 위주로 가게 되는데, 서울의 넓은 지역은 근현대사의 흔적을 지닌 곳이 얼마나 많은지 책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추억이라는 것이 시간적, 공간적 경험을 해야 나눌 수 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서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는 지방에 거주하는 나에게는 서울의 추억을 살 수 있는 책이었다.
서울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은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를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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