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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재 열전 -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인문적 세계를 설계한 개혁가들
신정일 지음 / 파람북 / 2021년 11월
평점 :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인문적 세계를 설계한 개혁가들
파람북에서 출판한 신정일 선생님의 <조선천재열전>은 조선 시대 천재로 알려진 김시습, 이이, 정철, 이산해, 허난설헌, 신경준, 정약용, 김정희, 황현 선생에 관한 이야기다.
신정일 선생은 문화사회학자이다. 역사와 문화 관련 저술 활동을 하는 작가이자 도보여행가이기도 하다. 한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를 기획하여 금강에서 압록강까지 답사를 마쳤고, 한국의 산 500여 곳을 오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옛길인 영남·관동·삼남대로를 도보로 답사했으며, 부산에서 통일 전망대까지 걷고서 해파랑길을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불러온 도보 답사의 선구자다.
[ 조선천재열전 책날개 중 ]
“현장을 발로 뛰어야 한다.”라는 말에 가장 몸소 실천하시는 분이 저자라고 평소 생각했다. 우리 역사를 직접 현장에서 확인하고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와 근래 연구하고 있는 동학농민운동 연구를 담은 <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답사기>를 집필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김개남, 손화중 장군의 추모비를 세우는 데 노력했다고 한다.
사진기를 메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티비에서도 곧잘 확인할 수 있었고, 이번 도서 <조선천재열전>은 9명 천재의 발자취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매월당 김시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했다.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고, “배우면 곧 익힌다”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었다.
김시습은 말을 느릿느릿하게 했지만, 정신은 민첩하여 비록 읽지 못하면서도 그 뜻을 다 알았다고 하니 천재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그를 규정하는 또 다른 말은 생육신이다. 계유정난으로 세조의 정치가 엄정할 때, 3일간 크게 통곡하며 책을 불태웠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머리를 깎고, 스스로 설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전국을 떠돌았다.
사육신의 거열형을 듣고 그들의 시신을 수습한 이도 김시습이라고 한다.
김시습은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한 김일손과 깊이 사귀었다고 한다. 김일손을 찾아가 어울리던 중 김시습은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리도록 권고했다고 한다. 이는 이후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사화의 단서가 된다.
그는 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중 최초의 한글 소설인 <금오신화>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Photo by KS KYUNG on Unsplash
<조선천재열전>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이이, 정철, 이산해, 허난설헌은 동시대를 살았다. 심지어 이이와 정철은 동년배이다. 이이는 13세가 되던 후 과거시험에 응시해 우수한 성적으로 진사 초시에 합격했다. 이이는 무려 9번이나 장원에 급에 ‘9도장원공’이라 불리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이이가 크게 될 인물임을 알고 시기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명석함이 얼마나 두드러졌는지 가늠할 수 있다.
율곡이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으로 3년 상을 치르고 그는 삶과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불교에 귀의한다. 조선 시대 불교에 의탁한다는 것은 천대를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1년 동안 봉은사에서 지낸 율곡의 행적은 평생을 따라가는 꼬리표가 된다.
그는 일생을 조선의 최고 집권자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대입 수험생이 가장 애증 한다는 송강 정철은 뛰어난 글을 많이 남겼다.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 할 정도로 다사다난했다. 빼어난 천재 시인이자 실패한 정치가였던 정철은 광주 무등산 자락의 송강정에서 <서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지었다.
정철은 정치가의 필수 요소인 관용과 포용력이 없는 성품을 지녔다. 어린 시절 형과 매부의 처참한 죽음과 아버지의 오랜 귀양 생활은 정철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명종 대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정치 생활을 하지만, 선조에 이르러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는다.
선조 시절 이조판서였던 유성룡이 우의정이 되어 서인의 영수 좌의정 정철을 찾아가 세자를 세우는 일을 건의하자고 한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는 두 사람이 설득하면 같이 선조에게 건의할 거로 기대했지만, 이산해는 의논하기 위한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다 인빈 김씨의 오빠에게 정철이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
아무것도 모른 정철은 선조에게 세자로 광해군을 책봉을 건의하여 모함을 받기에 이르고 파직당한 채 귀양을 떠난다.
서인을 몰아낸 동인 세력이 제대로 권력을 장악하기도 전에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의 천재로 평가받는 이산해는 고려 말 문장가인 이색의 후손이다.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의 형 이지번의 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이지함은 “아이가 기특하고 영리하니 꼭 잘 보호하십시오.”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이산해의 사위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이고, 한산 이씨는 현대 이문구 선생에 이르기까지 집안에 문재를 많이 배출했다.
6세에 훌륭한 글씨를 써서 주위 사람에게 신동으로 알려졌다. 당대의 천재였던 이이도 이산해를 칭찬했고, 선조도 그의 시와 글을 높게 평가했다.
이산해는 선조 때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같은 계열인 동인에게 배척받았다. 그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했으나 선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후일 평해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이산해는 많은 글을 남겼다.
Photo by SeongPhil Jang on Unsplash
조선을 지킨 마지막 천재는 <매천야록>을 지은 황현이다. 선생은 동학농민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한 <오하기문>과 고종이 즉위한 1864년 전후부터 기술된 편년체의 구한말의 역사서인 <매천야록>은 조선 후기를 이해하는 필수 작품이다.
일부에서는 <매천야록>에 대해 매천이 풍문에만 따라 쓴 풍문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저자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매천은 고향에서 신문과 관보를 통해 당시 상황을 관찰하고 작품을 저술한 것으로 판단한다.
<오하기문>에는 동학의 지도자 김개남의 동학 활동과 그의 체포 과정이 자세히 실려 있다. <매천야록>은 정사는 아닌 야사이지만,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 당대를 공정한 입장에서 비판한 보기 드문 작품이기에 정사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다.
그는 을사오적인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찬성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여러 날 통곡했다. 그는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소주에 아편을 섞어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천은 전통 유학을 공부한 마지막 선비로서 위정척사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갑오개혁 이후 매천의 생각은 바뀌게 된다. 그는 서구 문물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여 국권 회복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
황현 선생이 남긴 <매천야록>을 다음에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외에도 허난설헌, 신경준, 정약용, 김정희에 관해서도 기억해야 할 많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유학을 중시한 선비의 나라였지만, 나라를 개혁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노력한 이들을 진정한 천재라 할 수 있다.
신정일 선생님의 <조선천재열전>은 잊고 있던 조선의 개혁가이자 천재였던 이들의 다양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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