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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정동호 지음 / 책세상 / 2021년 9월
평점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위한 친절한 해설서
오늘 소개할 책은 책세상에서 출판한 정동호 교수님의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이다. 저자인 정동호 교수님은 한국의 1세대 니체 학자라고 한다. 이 해설서는 저자가 번역한 책세상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해설서이다. 한 번쯤 보았을 빨간색으로 강렬함을 드러내는 책세상의 니체 전집 중 한 권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지만, 철학서라고 하기에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쉽게 다가오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떠올리면 도대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일전에 이진우 교수님의 <인생에 한 번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이 책의 핵심 개념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면 이번 도서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는 말 그대로 본 책의 순서에 맞게 전 내용을 해설하고 있다. 이렇게 친절한 해설서와 본권을 같이 읽어보니 <차라투스트라>의 의미가 더욱 명확하게 다가왔다.
<차라투스트라>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내공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이 해설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작품에 대한 것으로서, 니체 철학의 개요와 작품의 집필 과정 등에 대한 개괄로 되어 있다. 역사에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의 행적에 대한 소개도 있다. ‘길잡이의 길잡이’로 쓰인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내용에 대한 것으로서, 이 해설서의 본론에 해당한다. 이 부분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대한 간결한 정리와 해설로 되어 있다. -p.6 서문 중에서
그럼 이해하기 어려웠던 몇 가지 개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다음에 나타나는 본권의 내용은 책세상이 판이 없어 장희창 교수님의 민음사 판을 본권으로 사용했음을 양해 바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당시 동양사상이 널리 퍼지고 있었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 관해 루 살로메로부터 알게 된다. 조로아스터의 영어 이름이 차라투스트라이고, 그는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페르시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니체는 그의 이름을 빌려 기존의 도덕적인 관념에서 선과 악으로 분리되었던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도덕을 만들길 원했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서
차라투르트라교에서도 태양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의 형상으로서 경배의 대상이다. 그리고 뱀과 독수리는 차라투스트라의 반려 짐승으로서 각각 지혜와 긍지를 상징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산속에서 터득한 막중한 지혜로 힘겨워했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충격적인 내용도 그러했지만,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나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과거의 기독교 가치관이 지배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가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즉, 이 말은 세속화된 기독교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미 <즐거운 학문>에서 신의 죽음을 몇 차례 선언했다. 그는 북유럽 원시 게르만인의 신들은 즐거움과 슬픔을 인간과 함께 나눈 올림포스 신들과 달리 온갖 죽음과 파괴, 그리고 위협 따위로 인간을 괴롭혀온 공포의 대상들이었다. 그런 신을 원시 게르만 인들은 두려워했으며 증오하여 저들의 죽음을 소망하기까지 했다. 니체에게는 이처럼 두려움에 떨게하는 인간 적대적인 신의 하나가 그리스도교의 신이었다. 대를 이은 목사 가문 출신인 그는 이 무렵 이미 교회와 등을 지고 있었다.
“초인사상 (위버멘쉬)”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도중에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벌벌 떨거나 멈추어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은 위대함은 그가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 있다.”
초인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우리가 모두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초인이라 한다.
위버멘쉬는 과거 초인으로 번역했지만, 지금은 학자들에 따라 오버맨, 슈퍼맨, 위버멘쉬를 사용한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극복한다’라는 이행의 의미가 있다. 이를 굳이 우리말로 옮기면 ‘자신을 극복해온, 극복해가는 자’ 정도가 된다. 니체의 위버멘쉬에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한 가지는 상승을 한, 그리하여 상승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자신의 과거를 딛고 우뚝 서 있는 인간, 그러면서도 여전히 상승 과정에 있는 인간이라는 두 방향의 위버멘쉬 개념이 제시되고 있다.
“심연 위의 밧줄이자 교량”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를 잇는 심연 위의 밧줄이자 교량이라고 한다. 이는 앞뒤로 열려 있는 가능성을 뜻하며 인간이 확정되지 않은 존재임을 의미한다. 도정의 존재라는 뜻인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두 탑 사이에 있는 밧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인간을 완성된 상태로 창조했다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을 거부했다. 인간을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감으로써 주어진 가능성을 현실화한다.
“독수리와 뱀”
뱀은 허물벗기를 한다. 재생, 곧 회귀를 뜻하는데 그런 뱀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나는 독수리를 더하면 회귀의 의미는 배가된다.
원을 그리며 나는 독수리와 그 목을 휘감고 있는 뱀은 차라투스트라에게 그의 우주론인 영원회귀를 설명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낙타, 사자, 아이”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첫 번째 낙타는 황야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동물이다. 낙타는 순종을 미덕으로 하는 온순한 짐승이다. 그에게는 “나는 해야 한다”라는 체념 어린 복종이 있을 뿐이다. 주인은 그의 삶을 지배해온 절대자 신이다.
낙타의 단계를 극복하면 사자의 단계이다. 낙타는 사자가 되어 자신의 세계와 삶을 되찾는다. 초월적 신앙과 형이상학적 이념 따위에 매여 있는 사람이 낙타라면 사자는 그런 점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는 무신론자와 종래 도덕의 굴레를 벗어던진 자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낙타와 사자가 자기의 의지를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닐 때 비로소 도달하는 단계가 아이의 단계이다. 아이는 순수하며 정직하다. 첫걸음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시작할 뿐이다. 아이는 인간 정신이 변화를 통해 올라야 할 최고 경지이자 마지막 단계다.
이 정신의 세 단계 변화는 니체 자신이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어려서 그는 낙타였다. 신을 신앙했고 도덕 등 세상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젊어서는 사자였다. 그런 신앙과 가치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삶을 추구했다. 지금은 아이의 단계를 앞에 두고 있다.
“산허리에 있는 나무”
나무가 위로 쑥쑥 성장하려면 그만큼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처럼 인간 또한 인식의 정상을 향해 오르려면 그만큼 어두운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어두운 근원에 뿌리를 내려야 하며, 견고한 뿌리 없이는 그 어떤 나무도 자신을 지탱하며 성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타란툴라”
타란툴라는 남유럽 지중해 연안에 서식하는 독거미다. 누구든 한번 물리면 심한 통증과 현기증 끝에 정신착란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거미다. 이탈리아 남부 타란토 사람들은 타란툴라에 물렸을 때 땀을 많이 흘리면 독에서 풀려난다고 믿어 격하게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 춤에서 유래한 것이 그곳 민속춤이 타란텔라다.
인간세계에서도 타란툴라들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힘겹게 오르는 사람들을 물어뜯어 그 영혼에 현기증을 일으켜 끝내 주저앉히는 자들이 타란툴라다.
“권력에의 의지”
이 비밀도 삶 자체가 내게 말해주었다. “보라,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물론 그대들은 이것을 생식에의 의지 또는 목적에의 충동, 좀 더 높은 것, 좀 더 멀리 있는 것, 좀 더 다양한 것에 대한 충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하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이 바로 권력에의 의지이다. 초인이 되고 자기를 극복하려 한다면 권력에의 의지는 필요하다. 초인이 되려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권력에의 의지이다.
“영원회귀 사상”
니체는 영원회귀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델포이의 신탁을 받았더니, 성문에 ‘순간’이라 되어 있었다. 그는 순간이라는 의미를 깨우친다.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데,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순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 순간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의 핵심은 결국 이 삶의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바랄 정도로 충실하게 살라는 뜻이다. 과거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각 개인은 미래와 과거로부터의 운명이며, 앞으로 도래할 것과 앞으로 될 모든 것에 대한 또 하나의 법칙, 또 하나의 필연성인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토대로 우리가 삶을 바라본다면 운명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능력을 발견한다. 니체는 너의 목적을 스스로 설정하라고 전하고, 그것이 너의 운명, 즉 아모르 파티라 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난해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읽기가 만만하지 않을 뿐, 읽기 어려운 책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유인즉 사상 전개가 일관성이 있고 메시지 또한 분명하다. 이야기가 친절하고 조리 있는 편이 아니어서 자못 혼란스러울 뿐이다.
많은 분이 읽기에 도전했다 어휘가 가지는 상징과 비유를 짐작하기 어려워 중도에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인간을 위한 복음서라 했다.
<차라투스트라>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저자의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를 통해 니체가 전하는 의미를 찾아보자.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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