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명 작가들의 계절감상기
정은문고에서 출판한 <작가의 계절>은 100여 년 전 활동한 일본 유명작가 39명의 단편집이다. 이 책은 가을을 시작으로 겨울, 봄, 여름을 그려내는 글을 모았다. 일본의 유명작가지만 아는 작가는 많지 않았다. 작품으로 만난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정도였다. <작가의 계절> 덕분에 나오키상과 더불어 일본의 양대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단편을 만났고, 우리에게는 식민지 시절이었지만 일본의 화려한 시절이라 생각한 시절, 당대 일본 작가가 느낀 계절 변화와 당시 사회를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일본에도 이 시절 가장 큰 시련 중 하나는 1923년 관동대지진이다. 작가는 간혹 관동대지진이 덮친 지역의 풍경과 계절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아, 가을>의 부분을 살펴보자.
언젠가 교외에 자리한 메밀국수 가게에서 판메밀국수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식탁 위 낡은 잡지를 펼쳤더니 대지진 때 사진이 보였다. 온통 불타버린 벌판에 바둑판무늬 유카타를 입은 여인이 진이 빠진 채 홀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가슴이 타들어 가듯 그 비참한 여인을 사랑했다. 무시무시한 정욕마저 일었다. 비참과 정욕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걸까. 숨이 멎을 만큼 괴로웠다. (...)
가을은 여름과 동시에 찾아온다.
가을은 교활한 악마다. 여름 사이 모든 단장을 마치고 코웃음을 치며 웅크리고 있다. 나만치 날카로운 눈을 가진 시인이라면 그 기색을 눈치챈다.
이 작품은 그가 1939년에 잡지에 실린 글이다. 결혼하고 나서 안정을 찾은 시기에 집필한 작품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이중적인 마음이 느껴진다. 다자이 오사무는 1948년 <인간실격>을 완성한 한 달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피아노>는 요코하마의 주택가에서 대지진의 변화를 느낀 저자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 외견상으로 바뀐 것이 없지만 슬레이트 지붕과 벽돌 벽 아래 뚜껑이 열려 활처럼 휜 피아노가 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피아노 소리를 듣고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가을 날씨는 한바탕 습기를 머금은 바람을 일으킨다.
며칠 뒤 다시 같은 장소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니 피아노를 덮고 있는 밤나무를 알아챘다. 밤이 떨어져 피아노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대지진 이후로 피아노는 아무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있었으리라.
아쿠타가와는 초기에는 설화문학에서 취한 소재를 재해석한 작품을, 후기에는 예술지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다수 집필했다.
그는 매형의 자살로 인한 빚더미를 물려받았고, 후기에는 자살을 염두에 둔 작품을 다수 집필했다.
1927년 서른다섯 살에 집에서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생을 마감해 일본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요코하마 야마테 지역은 과거 외국의 공사와 주재관이 살았던 경치가 좋았던 곳이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억에 생생하다. 다음에 다시 그곳에 가게 되면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와 아쿠타가와를 추억할 수 있으리라.
나쓰메 소세키의 겨울을 너무 추워 만사가 귀찮을 정도다. 밤에 잘 때도 손난로를 배 위에 붙이고 잔다. 자고 일어나보니 주위가 얼었다. 목욕탕도 얼었고 수도도 얼어붙었다. 서재에서 작업을 하고 싶지만, 아이가 칭얼대는 모습이 불안스럽다.
눈 내리는 밤이다. 울던 아이는 다행히 잠든 모양이다. 뜨거운 메밀 면수를 호로록 마시며 밝은 양등 아래 새로 넣은 화로 속 숯이 탁탁 타들어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잿더미에 둘러싸인 붉은 불기운이 아련하게 흔들린다. 이따금 숯덩이 틈새에서 파르스름한 불꽃이 인다. 그 불빛에 오늘 처음으로 하루의 온기를 느끼며 점점 하얘지는 재를 5분쯤 지켜봤다. (93쪽)
나쓰메 소세키는 국비 장학생으로 2년간 영국으로 유학한다. 타지에서의 가난한 생활은 그에게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남겼다. 오랫동안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다고 1916년 마흔아홉 살에 생을 마감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일본에서 활동한 작가의 감각은 미묘한 계절의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나는 그중에서 화려한 시대로만 생각한 20세기 초반의 일본 사회도 혼돈이 내재하여 있음을 느낀다. 에도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의 전환과 이데올로기의 혼재, ‘탈아론’을 채택해 유럽 문화를 일찍 받아들여 오페라와 유럽 작가의 글을 탐독하는 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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