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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바라본 세계사
에발트 프리 지음, 소피아 마르티네크 그림, 손희주 옮김 / 동아엠앤비 / 2021년 9월
평점 :
객관적이고 글로벌한 시각으로 문명과 도시의 경계에서 바라본 세계사!
동아엠앤비에서 출판한 에발트 프리 교수가 저술하고 소피아 마르티네크의 그림과 페터 팔름의 지도, 손희주 옮긴이의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바라본 세계사> 기존의 세계사 책과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세계사가 유럽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평가한 역사라면 이 책은 모두를 위한 새로운 시점에서 세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철저하게 유럽의 관점은 배제하고 근대 이후 책의 말미에 유럽 편을 싣고 있어 지금까지 읽었던 책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이 책이 가지는 주요한 특징을 3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1. 유럽이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바라본 세계사.
2. 세계사의 현장에 참가한 생생한 느낌을 준다.
3. 세계사를 서술하는 시대를 조망하는 지도를 통한 인식이다.
세계사의 현장에 참가한 느낌을 주는 가장 큰 공은 소피아 마르티네크의 특별한 그림 덕분이다. 거대한 그림으로 당시 사회의 단면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은 내가 그림 속에 참여하는 느낌을 주고 당시 사회를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높은 수준의 지도 역시 이 책의 돋보이는 점이다. 과거를 묘사하는 정밀한 지도를 싣고 있어, 지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세계사에 있어 서구의 흥망성쇠가 역사의 주역으로 차지하는 시간은 5,000년의 인류사를 기준으로 하면 짧은 시간에 속하는 것에 비해 과도한 평가를 받고 있다. 저자인 에발트 프리는 독일 튀빙겐대학교 교수(근대사)로 있으며, 이곳에서 세계 역사 연구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하고 있다. 그는 세계사를 20장으로 나눠 당시 사회를 주도했던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의 흥망성쇠를 서술한다.
제임스 쿡 선장이 발견한 세계를 시작으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공간의 일치를 소개한다. 제임스 쿡의 세 차례에 걸친 탐험으로 세계는 정확한 위치에 있는 다양한 태평양의 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페인이나 네덜란드에는 쿡이 찾아간 섬에 대한 문헌이 있었으나 경도가 부정확해서 신뢰성이 떨어졌다.
우리가 사용하는 통일된 시간은 수도사인 디오니시우스와 관련 있다.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는 고유의 시간을 나타내는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 디오니시우스가 520년대 당시 수십 년 동안 정치적이고 종교적으로 격한 논쟁을 일으킨 문제인 ‘부활절이 정확하게 언제인가?’라는 문제를 풀어야 했다. 정확한 달력에 대한 계산이 향상되었고, 1582년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율리우스력을 개정한다.
이제 현생 인류가 시작된 아프리카를 살펴보자.
현생 인류를 나타내는 최소 네 종의 인류가 4만 년전에 출현했다. 해부학적으로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 두 번째 종은 네안데르탈인이고 이들은 독일 뒤셀로드프 근교의 네안데르 계곡에 있는 동굴에서 처음 뼈를 발견했다. 세 번째 종은 데니소바인이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시베리아의 한 동굴에서 발견돼 어금니 하나, 새끼손가락 하나, 그리고 발가락 한 개가 전부다. 네 번째 종은 플로레스인으로, 2003년 인도네시아에서 왜소한 키의 인간 해골이 발견되었다.
이후 저자가 소개하는 세계사의 현장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와 갠지스이다. 인류는 기원전 1만 년에서 기원전 6,000년 사이에 식량을 찾거나 사냥하는 대신 스스로 계획을 짜서 이에 맞춰 생산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부락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가장 오래된 거주지의 예는 팔레스타인의 예리코이고, 아나톨리아의 남쪽에 자리한 차탈회위크는 이보다 약간 뒤진다.
인도양에 자리 잡은 인도를 중심으로 당시 주도적인 문명을 이루었던 이집트와 중국은 서로에 대한 존재와 문화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인도양의 네트워크 안에서는 물건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변화와 함께 정보와 이념도 교환되었다. 상인들은 다양한 종교 집단에 속했다.
인도양의 역사는 로마와 사산, 무슬림의 물결에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만 흐르지는 않았다. 중국의 영향력은 통치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책을 읽는 동안 느낀 점은 저자가 젊은 세대를 위해 쉽게 써 달라는 출판사의 의도에 맞추기 위해 쉬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체를 사용하는 점이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다.
갠지스
인도 아대륙의 역사를 알려면 우선 쐐기 모양을 한 대륙의 지각적 충돌을 알아야 한다. 지각판의 충돌 결과로 형성된 산맥의 발아래에 강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때 생긴 여러 강은 지금도 남아시아 북쪽의 지형적 특색을 이루고 있다.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브라마푸트라강은 히말라야와 카라코룸, 힌두쿠시산맥과 접하는데, 바로 이곳이 강의 발원지다. 땅은 큰 강을 따라 매우 비옥해졌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가축도 길렀다. 그러면서 부유하고 경제력 있는 도시가 세워졌고, 이 도시들은 힌두쿠시 협곡을 넘어 중앙아시아에서 침입해 온 이방인이 선호하는 목표가 되었다.
남아시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럽보다 인구가 훨씬 많다.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사용 중인 언어가 30개가 이른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아대륙에 전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기원전 3세기의 마우리아 왕조와 서기 4세기 5세기의 힌두교 중심의 굽타 왕조를 자세히 조망하며 아대륙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장안
장안은 오늘날 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구로, 7세기, 8세기 때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도시는 펀수이강 하구 근처의 웨이허강 계곡에 자리했었다.
시안의 옛 이름 장안은 그 당시 유일하게 인구가 1백만 이상 되는 도시로 세계에서도 유일무이했다. 도시 역사는 천 년이 넘었고, 중국의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수도로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황제는 6세기 말부터 도시에 이제껏 세상에 한 번도 없었던 무엇인가를 설계했다. 도시 성곽은 83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에워쌌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이 수도를 계획할 때 본보기가 되었다. 이 거대한 성곽 안에 100만 명에서 혹자는 2백 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 주도적인 역할은 한 로마의 인구가 약 2만 명이었고, 중세 유럽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컸던 비잔티움의 인구는 1,200년경에 최대 5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는 중국의 수와 당 왕조를 조망하며 중국의 역량을 소개한다.
시데바이
유라시아의 지리적 중심은 시데바이다. 이곳은 구 소비에트 연방이 원자폭탄을 실험하던 세메이에서 1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카자흐스탄의 초원 지대에 자리한다. 지금도 인구밀집도가 낮지만, 원자폭탄 실험이 있기 전에도 인구수는 많지 않았다.
카자흐스탄이 유라시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시데바이에서 유라시아의 고도 문명이 발생하고 최초의 도시들이 세워졌다.
모체계곡
모체계곡은 오늘날 페루의 도시 트루히요 근처에 있으며, 수도인 리마에서 북쪽으로 500킬로미터 떨어져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강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강 가까이에는 태양과 달의 사원인 ‘우아카 델 솔’과 ‘우아카 데 라 루나’가 우뚝 서 있다. 이곳은 서기 500년경에 영향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곳으로, 이곳에 살던 사람은 중심지에서부터 북쪽과 남쪽으로 태평양 연안의 강 유역을 따라 300킬로미터 이상을 지배했다.
옆에 있던 계곡에서는 점토 벽돌로 만든 궁전과 피라미드가 서 있던 수많은 작은 도시 중심가가 발견되었다. 1만 5천 명 정도가 거주할 만한 크기다. 모체족은 국가 형태에 유사한 구조를 갖춘 남미 최초의 사회였다.
테노치티틀란과 쿠스코
테노치티틀란과 쿠스코는 올멕과 마야, 모체 이후에 수백 년 동안 한편에서는 남아메리카를,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남아메리카의 서쪽 지역을 지배했던 두 대제국의 수도였다. 아즈텍왕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은 오늘날 멕시코시티의 주택 아래 묻혀있다.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페루 지역 안데스산맥의 해발 3천 미터보다 더 높은 곳에 아직 존재하며, 인구는 35만 명에 달한다.
오늘날 쿠스코의 많은 집에는 잉카 시대 때 세운 담들이 아직 그대로다. 최초의 유럽인은 중남미의 대도시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 광경에 압도되었다. 1325년경에 세워진 테노치티틀란의 인구수는 1520년경에 20만 명 혹은 30만 명에 가까웠다. 도시는 텍스코코호 위의 여러 섬에 지어졌다.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테노치티틀란보다 더 오래된 도시였다.
이 두 메트로폴리스는 통치자와 그 수호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분명한 계획에 따라 조성되었다.
킬와
로마 시대 때는 아프리카 사막을 지나는 길이 놓여 있었다. 사하라 사막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은 낙타 덕분이었다. 낙타는 4세기 때부터 사막 무역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베르족과 투아레그족은 단봉낙타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7세기와 8세기 초, 상인 대부분은 북아프리카를 정복했던 무슬림이었다.
11세기 스페인의 학자인 알바크리와 오늘날의 모로코 출신 법학자인 이븐 바투타(1304~1368)는 사막의 다른 편에 있는 사람과 도시, 자연에 관한 지식을 모아 여행기를 펴냈다.
스페인이 1500년경에 카리브해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쪽으로 항해를 해 이곳을 접수했다.
1498년에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 선장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향했다. 훗날 축하받은 이 탐험 여행길에서 최초로 들른 동아프리카 항구는 바로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항구 중 한 곳이엇던 킬와였다. 오늘날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에서 남쪽으로 300킬로미터 정도 더 내려가면 있다.
킬와는 과거 동아프리카 교역의 메트로폴리스였고 역사를 증언하는 유적지를 곳곳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샤자하나바드
인도는 모든 ‘탐험가’가 도달하고자 노력한 궁극의 목표혔다. 1700년까지 남인도 연안에 영향력을 행사한 주제는 인도 북서부 무슬림 왕국인 델리 술탄국과 수르왕조, 그리고 무굴제국이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중심지에서 시작하여 비옥한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분지의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인도 역사 전체를 좌우했다.
6~18세기에 걸쳐 있던 무굴제국은 인도 역사상 장기간 가장 중요하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무굴제국은 몽골족이 세운 제국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무굴인이 몽골인이라는 말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다. 제국의 시조인 바부르가 자신을 티무르의 후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프 프랑세
영국이 1763년부터 1858년까지 인도에서 주도권을 쥐고 인도양을 대영 제국의 중심지로 만들었을 때, 1770~1830년에 대서양에 접한 많은 이웃 나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 거주지는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미합중국으로 결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인이 먼저 프랑스 왕에 반대해서, 그다음에는 유럽을 상대로 혁명을 일으켰다.
카리브해 지역에서였다. 아이티에서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노예 혁명이 성공적으로 일어났다. 결국 중남미에서 자행되어 온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가 끝났다.
세계사는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해석을 놓고 다양한 논의가 가능하다.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기존의 학설은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바라본 세계사>는 확실히 독창적이고 지금까지 주목해서 다루지 않았던 도시와 국가를 다루고 있다.
세계사에 관심을 가진 분은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바라본 세계사>로 새로운 세계사 서적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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