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三別抄
이동연 지음 / 창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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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만여 명의 삼별초 일행은 천여 척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거쳐 강화에서 진도, 다시 제주까지 남천했나?

세계제국 원나라에 대한 항거이자, 동시에 고려 건국 기조에 대한 수호와 존엄한 인간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확보 의지였다.

 

창해에서 출판한 이동연 작가님의 <삼별초>는 고려 시대 몽골군의 강압에 최후까지 저항한 삼별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전에 삼별초의 최후 결사 이후 흩어진 삼별초 군이 오키나와에 흘러들어 슈리성의 축조와 류큐가 왕국으로 도약하는데 이바지했다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삼별초의 결말이 궁금했는데, 이 소설에서는 제주도 항파두리성에서 결전과 그 이후를 암시하고 있다.

 

 

삼별초는 1219(고종 6) 최충헌(崔忠獻)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방도(防盜)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 병사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前衛)로서 다분히 사병적(私兵的)인 요소도 있었다. 그러나 항몽전(抗蒙戰)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으며,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講和)가 성립되고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중 ]

 

 

모두 개경으로 환도하라.”

 

몽골에 간 원종이 쿠빌라이 칸 앞에 엎드려 몽골 황녀를 며느리 삼게 해달달라고 간청했을 뿐 아니라, 몽골군을 증원해 강화도까지 점령해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모두 사실로 드러났고 환도 명령이 떨어졌다.

 

 

몽골 수군은 강화도 상륙과 기습을 시도했지만 그럴 때마다 배중손의 고려 수군에게 혼쭐이 났다.

자존심이 상한 몽골군은 38년간 내륙을 여섯 차례나 휘젓고 다녔다. 환도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종 때 잠시 환도하려 했던 것 이외에는 고려가 줄기차게 몽골에 맞섰다.

 

적이 항복하면 고스란히 놓아두어라. 만일 반항하면 씨를 말려라.”

이것이 칭기즈 칸의 전쟁 원칙이었다. 바로 이 원칙 하에 바그다드에는 십만 해골탑이 쌓였고, 중앙아시아 최강 제국 서하는 아예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어야 했다.

 

당연히 고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그다드보다, 아니 서하보다 더 지독하게 고려를 괴롭혔지만, 고려인은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반발했다.

 

그중 승려이거나 천민 등 하층민일수록 더 질겼다. 이들의 자발적인 유격전에 수시로 당하던 몽골군은 혀를 내둘렀다. 용인 처인성에서 몽골 사령관 살리타이가 명줄을 놓았고, 충주성 등 곳곳에서 몽골군이 참패했다.

 

자존심이 상한 몽골군은 더욱 내륙을 할퀴고 다녔지만, 고려인을 굴복하지 않았다. 단 강화도로 피신한 귀족들은 예외였다.

이들은 천도를 앞두고 개경 고수파와 강화 천도파로 나누었고 어느 쪽이 항몽에 유리한지를 두고 다투었다.

 

몽골이 출륙환도를 요구한 1247년 무렵부터 귀족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백성들은 고려가 고구려 동명성왕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해 죽으면 죽었지 북방오랑캐에게 굽힐 수 없었다.

 

최우 사후 무신정권 내부 권력 다툼이 심해졌다. 급기야 1258년 김준과 임연이 대몽 강경 노선을 고수하던 최씨 무신정권을 쓰러뜨렸다.

 

왕실은 이를 기회로 권력을 조금씩 회수했고, 고종의 아들 원종을 강화의 조건으로 몽골 조정에 입조하게 했다. 그해 고종이 사망했고, 몽골 사대주의자로 변신한 원종이 즉위했다. 영특한 원종은 임연을 시켜 김준을 제거했다. 그 후 원종은 노골적으로 개경 환도를 추진했다. 궁지에 몰린 항몽파는 원종을 폐위시켰지만 기울어진 대세는 어쩌지 못했다.

 

몽골의 후원을 받은 원종을 복위시켜야 했고, 원종은 강화로 입도하지 않고 개경에서 출륙환도를 명했다.

 

 

<삼별초>에서 눈여겨볼 점은 무신정권이 집권층이 이전하는 과정이다. 역사 시간에 왕을 강조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신정권을 강조해서 배웠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최충헌의 경우 왕이 될 수 있었지만, 허수아비 같은 왕이 되느니 실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왕은 교체함으로써 유명무실한 왕보다 실권을 가진 자신의 위치에 만족했다.

 

최씨 무신정권을 뒤이어 김준의 시대가 도래했고, 다시 임연으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이전투구와 서로를 이간계를 사용하는 것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광종의 강화한 왕권은 문신의 무신에 대한 차별이 본격화하면서 무신의 분노는 쌓여갔다.

 

다른 특징은 불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정도가 심했다는 점이다. 원래 고려 초기의 불교는 의례 중심이었던 교종 중심이었고, 11대 문종의 아들 의천이 대각국사가 되면서 교종은 더욱 강해졌다. 무신 집권 후 선종이 득세하게 된다. 소외된 교종의 승려 2천 명이 기어이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의방을 죽이겠다고 몰려다녔지만, 이의방의 반격으로 몰살당하고 말았다.

 

교종은 이의방 시대,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시대까지 숨죽여 지냈다.

무신 권력층에서 발생한 대충돌의 발단은 사소했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집 비둘기를 강탈한 것이다.

 

여기서 이의민과 최충헌은 김통정 장군의 어머니 자운선을 놓고 벌였던 앙금이 살아났다.

 

 

김통정의 어머니인 자운선은 양수척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백제를 정복할 당시 가장 드센 무리만 따로 모았다. 그들은 천민으로 강등시켜 양수척이라 부르고 압록강 삭주 일대로 집단 이주시켰다. 이들에게는 호적, 부역 의무, 혼인 관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태반이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 양수척 여인이 천하제일이라는 소문이 개경까지 돌면서 권문세족 자제들은 삭주의 장군이 되길 원했고, 양수척 여인을 첩으로 삼으려 했다.

 

천하제일이라는 양수척 여인 중 제일 미녀로 꼽혔던 자운선을 보고 이지영은 이성을 잃었다. 최충헌도 그녀를 차지하려 손을 뻗었다.

 

자운선은 김판술이라는 정인이 있었고, 이지영은 자운선이 자신을 따르지 않은면 양수척을 몰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운선에게 징수권을 준다는 당근과 채찍으로 자운선을 차지하고, 자운선은 징수권을 김판술에게 이임한다는 조건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이때 태어난 아이가 김통정이다.

 

이지영은 개경으로 자운선을 데려와 팔관회에서 황제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운선을 데리고 최충헌을 쏘아보는 모습에 이의민은 무례한 아들이 자랑스러웠고 최충헌은 이의민 일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소설의 주인공인 김통정 장군은 진도에서 몽골군과 싸우다 전사한 배중손 장군에 뒤이어 삼별초를 이끌었던 장군이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집권한 지 6년 째인 1225년은 몽골 칭기즈 칸의 6년 서방 원정이 성공리에 끝난 해였다. 몽골은 중앙아시아는 물론 페르시아 등 이슬람 지경을 석권했다. 이제 남은 곳은 서하, , 남송, 고려였다.

 

서하 정벌이 시급한 칭기즈 칸은 고려에 엄청난 공물을 요구했다. 이때 사신으로 온 저고여가 귀국 도중 도적들에게 피살당했다. 도적들은 역대 왕들의 신위 둔 태묘구실까지 들어가 백금을 훔쳐 갔다. 도적을 잡기 위해 최우는 무신정권의 호위 부대를 창설하고자 했고, 야별초가 탄생했다. 차츰 야별초의 규모가 커지자 좌·우별초로 나눴고 결국 관군을 능가했다. 훗날 강화도 천도 후 몽골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병사들로 신의군을 조직했다. 이들과 좌·우별초를 합쳐 삼별초가 탄생하게 되었다.

 

삼별초는 원종의 출륙환도를 따르지 않고 항몽하기로 정했다.

 

영흥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진도에 자리잡은 삼별초는 단군의 고조선과 고구려를 합쳐 조고려를 국호로 하는 나라는 개창한다. 진도가 조고려의 황도로 정하고, 고려 8대 현종의 자손인 온을 황제로 옹립한다. 단군 조선과 고구려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조고려는 개경의 무리는 몽골에게 빌붙은 조선의 후예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삼별초 지휘부는 배중손이 내놓은 3단계 목표에 동의했다.

첫 번째, 제주도를 점령한다.

두 번째, 서남해안 지역을 장악한다.

세 번째, 울릉도를 점령하고 동해안을 장악한다.

 

원종은 삼별초가 제주로 올 것을 예상하며 고여림 장군과 영암부사 김수에게 제주도 방어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1천여 병사를 데리고 제주도로 갔다. 제주가 고향인 고여림이 가장 먼저 해안을 따라 환해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고려군을 물리치고 제주를 점령한 삼별초는 2년 반 동안 고려군과 몽골군을 막기위하여 환해장성도 쌓았지만 애월읍 고성리에 토성을 쌓기도 했다. 원종 14(1273) 428일 여몽연합군 1만 여 명이 함덕포로 상륙을 하여 2년 반 동안 제주를 점령하고 있던 삼별초는 항파두리성에서 격전을 치르고 사흘 만에 전멸하고 포로를 잡는다.

 

홍다구는 여몽 총사령관 힌두를 충돌질해 포로 1,300여 명을 모두 죽이라고 하지만 김방경은 힌두와 수뇌부를 모두 죽인다.

 

소설 <삼별초>는 고려 중기 세계 최강의 몽골군을 맞이해 끝까지 항전한 김통정 장군과 결사대의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현재까지 제주도에는 김통정 장군과 관련한 설화가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소설은 삼별초를 둘러싼 고려 왕실과 불교문화, 무신정권과의 상호 관계를 밀접하게 드러내고 있다. 고려 시대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삼별초>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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