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부합시다 - 늘 깨어 있는 참언론을 꿈꾸다
정현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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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깨어있는 참 언론을 꿈꾸다 : 매일경제 창업주 정진기 선생 서거 40주기 기념 개정판을 내며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창업주에 대해선 잘 알려졌지만, 정작 가장 높은 구독률을 가지고 있는 경제지인 매일경제신문의 창업주에 대해선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회사 생활을 알려준 상사는 매일경제를 매일 읽고 용어를 정리하라고 주문했다.

 

지금 생각하면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제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도록 이끌어주었다. 덕분에 매일경제신문의 낯설기만 했던 용어도 자꾸 보니 익숙해져 어느 순간 경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공부합시다>는 매일경제신문의 창업주인 정진기 선생은 무남독녀인 정현희 님이 아버지를 기리며 남긴 기록이다. 벌써 40주년이 되었다고 하니 선생의 너무나 빠른 부고 소식이 안타깝다. 나이로 계산해보니 1929년생인 선생이 1965년에 매일경제신문을 설립하고 이듬해 창간호를 냈다고 하니, 36세의 젊은 나이에 회사를 설립했고, 198153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일경제는 MBN이라는 종합편성채널과 창간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신문에 많은 지원자가 선택하는 매경TEST를 시행하고 있어 선생이 오늘의 모습을 보면 흐뭇해할 거라 생각하니 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매일경제신문은 급변하는 언론 환경-신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미래에 대한 대비, MBN 자금 조달의 어려움, MBN 종합편성권을 따기까지의 어려움을 겪을 때 선생의 지혜가 절실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이 책은 10년 전 정진기 선생 서거 30주년 책의 개정판이라고 한다.

 

정진기 선생은 자신이 깨어있는 도구로 공부를 강조했다고 한다. 스스로 부족한 영어 공부를 위해 외국어 학원에 수강하고, 미국으로 산업 시찰을 겸한 어학연수를 통해 영어를 통달하고자 했다.

 

폴 새뮤엘슨의 <경제학>을 통독하고자 수많은 단어를 찾고 나중에는 홀로 읽게 된 책을 보니 만학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미국의 경제학파에 대한 이해와 경제학자의 저술을 이해한다는 것을 공부를 넘어 생존에 절실했다.

 

이에 선생은 당신 스스로 공부는 물론이고 직원들에게도 공부를 강조했다.

 

나는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사람, 특히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제일 싫다.”라는 그의 생각을 잘 나타낸다.

 

선생의 공부에 대한 집념은 아마 집안 내력이었나보다. 선생의 할아버지가 나주 향교의 전교(향교의 지도자)를 맡아보았고 호남지방 유림 모임의 계주였다. 할아버지는 늘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나만을 위한 사사로운 일을 하기보다는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러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소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현해탄을 건너기 위해 밀항선을 탄다. 무일푼의 소년에게 일본 생활은 고생길이었다. 해방되고 한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경찰과 빨치산들의 대결로 아비규환이던 시기를 겪었다.

 

삼도 서국민학교에서 교장 직무 대리를 맡았던 시절 무장 공비의 습격을 받아 죽도록 구타당한 후 공비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죽기 살기로 뛰어 탈출했다. 이어 다른 초등학교로 전근 명령을 받았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후 한국전쟁 동안 중매로 결혼했고 서울로 이사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검정고시를 거쳐 조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은 운명처럼 평생 선생의 생활이 되었다.

 

가진 것 없는 시골 청년에게 서울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은 막 도농 판뿐이었다. 일주일 동안 쉼 없이 일했지만, 공사판에서 쫓겨난 그가 찾아간 곳은 광화문 네거리 국제극장 뒷골목이었다. 그곳에서 담배 좌판대를 들고 담배를 팔았다.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도 광화문 뒷골목에 차를 대고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고 한다. 기업의 대표가 되어 과거 담배 좌판을 들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는 꾸준히 자기 계발을 했고, 1960년에 평화신문에 스카우트됐다. 곧이어 서울경제신문에서 일하게 되고 1964년에는 대한일보 상무를 영전되어 자리를 옮겼다.

 

활발히 취재하고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정부가 국민을 위해 수립하였다는 정책들을 살펴보고 국민이 정말 원하는 것이 빠져있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실망했다.

 

국회는 경제문제가 아닌 정략을 앞세운 공방만 하고 있었고, 기업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덕심도 망각하고 눈앞의 이익만 추구했다.

 

선생은 이런 상황을 보며 새로운 신문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신문사를 창업하기 위해 모 신문사를 인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계약 소식이 전해지자 신문사 기자들이 파업을 계획하고 인수를 반대했다. 그는 새로운 신문사를 창업하는 것으로 마음을 돌렸다.

 

신문사 창간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정부의 허가였다. 특히 윤전기가 있어야 신문사를 창간할 수 있는데, 윤전기를 수입하는 조건에는 기존에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회사만이 윤전기를 수입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는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공보부를 발이 닳도록 찾아갔다. 마침내 공보부 홍종철 장관에게 윤전기 수입을 허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써 매일경제신문사가 탄생했다.

 

그는 모든 직원을 소중하게 여겼고, 특히 윤전기를 담당하는 부서와 같이 몸으로 일해야 하는 직원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윤전기를 고속 윤전기로 교체했다.

 

신문사의 주 수입원인 광고라는 것이고, 광고를 게재하기 위해선 많은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높은 양질의 기사가 많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19801117일에는 언론 통폐합 조지가 발표됐다. 전국 64개 언론사 (신문 28, 방송 29, 통신 7)는 신문 14, 방송 3, 통신 1개로 통합하고 지방 언론사는 11사를 원칙으로 하는 조치였다. 4대 경제지 중 서울경제는 한국일보에 흡수·통합되며, 내외경제는 코리아헤럴드에 통합한다. 국제일보는 부산일보가 흡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도 매일경제신문은 살아남았다.

 

매일경제신문은 재도약 희망의 해로 1981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정진기 선생을 건강은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그해 췌장암 말기를 선고받았다.

 

많은 분이 선생의 갑작스러운 유고 소식에 놀랐고 충격을 받았다. 그 이듬해, 언론계를 발전시킨 선생의 공로가 인정되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 책으로 매일경제신문 창업주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이제는 언론을 바라볼 때 언론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을 눈여겨보게 된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매일경제신문은 가장 중립적인 입장에서 경제 뉴스를 전달하는 언론사이다.

 

매일경제신문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우리, 공부합시다>로 창업주인 정진기 선생의 삶과 철학을 배워보는 기회로 이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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