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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대국의 입지가 흔들리다 - 냉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ㅣ 세계통찰 시리즈 15
한솔교육연구모임 지음 / 솔과나무 / 202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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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솔과나무에서 출판한 한솔교육연구모임의 <세계통찰 미국 : 초강대국의 입지가 흔들리다>는 전쟁을 수행하지 않지만, 실제 전쟁상황이 연출된 냉전의 시대와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 전쟁, 독립과 통일을 위한 베트남 전쟁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한솔교육연구모임으로 역사연구모임의 책에는 일종의 기대감이 있다. 아무래도 그룹으로 논조를 정해 책을 저술해 집단지성으로 여러 의견을 모은 관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개인이 필자로 참여한 책은 저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지만 모임에서 저술한 책은 그런 점에서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임에서 저술한 책에도 편향된 관점을 전달하긴 하지만 좀 덜하다는 느낌이다.
한솔교육연구모임에서는 미국과 중국을 시작으로 주요 대륙의 주요 국가를 중심으로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 시리즈를 기획했다. 이 책은 그 첫 번째 국가인 미국에 관한 책이고, 총 16권 중 15권에 해당하고 전쟁 편 4권 중 세 번째 책이다.
냉전의 시대
지금까지 미국이 초강대국의 입지를 굳히기까지 미국을 전쟁을 수행하면 높은 승률로 주변 국가를 압도해왔다. 미국의 패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전쟁은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미국과 소련은 나치 독일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 힘을 합쳐 싸웠다. 하지만 전후 두 나라는 함께하기에 너무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독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였고, 소련은 민주주의를 실제로 경험하거나 겪어 보지 못한 나라였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노출한 균열은 유럽 사회에는 기회의 시간이었다. 소련이 무기를 갖추고 급성장한 배경에는 독일을 막기 위한 미국의 무기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이제 미국은 유럽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독일을 지원해야 할 차례다.
양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공산주의를 막아야 하는 자유세계의 선봉장이 된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미국은 마샬 플랜을 통해 서독과 서베를린을 지원하기로 한다. 일차적인 과정은 화폐 개혁이다.
소련은 전승국으로서 얻은 국제사회 영향력을 더욱 확장하려 들었고, 루마니아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화했다.
서방 연합국은 긴장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재무 장관 조지 마셜 국무장관이 발표한 유럽경제재건계획의 가장 선두에 서독이 자리했다. 서독에 막대한 경제 지원은 서독과 동독의 경제력의 차이를 가져왔다. 특히 서베를린의 경제 발전을 지켜본 동베를린 사람은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려 했다. 이런 물결이 차츰 심해지자 동독과 소련은 동베를린에 장벽을 설치하게 된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소련이 서베를린으로 진입하는 육로를 봉쇄한 경우이다.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유세계 진영은 항공편을 통해 서베를린 국민이 생존할 필수품을 전달했다.
독일 사람의 명절인 부활절에는 하루 1천3백여 편의 수송기가 열 달 동안 수송기 17만 8,228편의 식량과 물자, 연료 등 232만 6406톤을 실어 날랐다. 독일 어린이를 위한 ‘초콜릿 폭탄’ 작전에 돌입하는 날이면 하늘에서 초콜릿과 사탕을 가득 실은 상자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서베를린의 육로를 통제하면 서방 연합군이 철수할 거라는 소련의 계산은 빗나갔다.
소련은 전승국으로서 얻은 국제사회 영향력을 더욱 확장하려 들었고, 루마니아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화했다.
이들 나라 중 체코는 1968년 개혁파 정치인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공산당 지도자가 되면서 체코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민주화를 맛보게 되었다. 같은 해 소련군은 바르샤바조약기구 소속 대군 20만 명 이상이 체코를 침공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소련은 체코를 장악하자마자 둡체크를 권좌에서 쫓아내고 꼭두각시를 권좌에 앉혔다. ‘소련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공산 국가들을 무력으로 침공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며 동유럽 국가의 주권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실제 전시상황과 마찬가지인 냉전을 지속했다. 스파이를 이용한 첨예한 전쟁은 이들을 목숨을 담보로 무수한 작전이 수행되었다.
한국 전쟁
중국 마오쩌둥은 소련이 관리하고 있던 만주를 다시 차지하고자 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70세 생일에 스탈린과의 담화를 통해 이를 얻고자 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말에 격노해 회담장을 나가버렸다.
마오쩌둥은 모스크바에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기다리며 마침내 회담을 통해 만주에 관한 지배권을 획득했다. 스탈린이 내건 조건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예정이니 중국이 이를 도와 전쟁에 참전하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만주를 얻기 위해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세계 최고의 부유하고 군사 대국인 미국과 인구 대국인 중국이 한반도에서 오랜 시간 교전하게 되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해 이 일을 허락했다.
김일성이 그토록 간절하게 요청한 남한 침공 작전이 무르익은 배경이다.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야심한 새벽을 이용해 거침없이 침공했다. 북한군의 질주에 스탈린 역시 당황했다. 한국군이 오합지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약체일 줄은 몰랐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 안보리가 열렸다. 상임이사국의 반대가 있을 거라는 관측과 달리 소련 대표가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아 유엔 안보리는 유엔군의 파병을 의결해 역사상 처음으로 16개국이 참여한 다국적군을 결성했다.
이들 나라 중 특히 터기와 에티오피아는 인상적이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뿔’,‘커피의 나라’로 알려졌지만, 우리에게는 한국 전쟁 때 유엔의 일원으로 참전군을 보내 준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가 침범했을 때 국제연맹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들은 끝까지 투쟁해 1941년 기적적으로 승리해 에티오피아에서 이탈리아를 몰아내 독립을 이룬다.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 도움을 받지 못한 서러움을 잘 아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1950년 7월 중순 유엔으로부터 한국 파병을 요청받자 세계평화를 위해 황실 근위대인 강뉴부대 파병을 결정한다.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 승리한 황실 근위대 강뉴부대.
강뉴부대 대원들은 ‘초전박살’이라는 부대 이름에 걸맞게 치열한 전투 속에서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자신들과 아무 상관 없는 우리나라를 지키던 용감한 군인이었다.
안타깝게도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공산주의자들이 에티오피아의 정권을 차지해 실각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한 강뉴부대원은 공산주의 국가를 상대로 참전했다고 해 지금도 푸대접을 받고 있다.
티카와 한국이 형제의 나라라 불리는 데는 오랜 인연이 있다.
삼국 시대부터 한민족과 인연을 맺은 터키의 조상은 한반도 북쪽에서 돌궐족으로 불리며 살았다. 6세기에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중원에 자리 잡은 수나라를 견제했고, 7세기에는 당나라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고 돌궐족을 탄압하자 고구려 유민의 귀족 계층 중 상당수는 돌궐족과 함께 서역으로 이동한다.
이들이 서역으로 이동하며 아랍인과 광범위한 혼혈이 이루어지고 최종적으로 정착해 튀르크족으로 불리며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여러 나라를 건국했다.
물론 터키의 참전에는 소련과의 전투에 대항하여 미국과 유대 관계를 강화해 나토에 가입하려는 이해득실도 있었다. 동유럽을 오랜 기간 점령했던 오스만 튀르크와 슬라브족의 대표하는 제정 러시아, 소련과 전쟁이 빈번했다. 미국의 원조로 군사 강국으로 거듭난 소련에 대항할 수 없었던 터키는 유럽 세계와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다.
한국 전쟁의 참전은 그런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한국 전쟁에 참여한 터키군은 예니체리의 후예답게 백병전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한다. 총과 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터키군은 151고지 전에서는 열 배가 많은 중공군이 차지하고 있는 고지를 탈환하는 믿기 힘든 전과를 보여준다. 터키군이 착검하고 휘두르는 총은 마치 칼춤과 같아 중공군은 백병전으로 터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고지를 버리고 도망갔다.
터키군 병사들은 대한민국 고아를 돕기 위한 선행에도 앞장서 ‘앙카라 고아원’을 설립하고 전쟁고아 600여 명을 돌보았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권이 흔들리는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참전하는 미국은 베트콩이 구사하는 전술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들은 주민과 군인을 구별하기 힘들었고 베트남은 결정적인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승기를 잡았다.
미국은 한국 정부의 파병을 요청했고, 한국 정부는 군사 최강국 미군이 고전하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주저했다. 미국은 한국 내 주둔하는 미군을 베트남으로 파병하겠다는 압박으로 한국군은 최초로 해외 파병에 나서게 된다.
미국 내 베트남 전쟁의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하는데 편파 보도를 한 에디 애덤스 탓이 크다.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한 장의 사진이 미국 전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그 사진은 길거리에서 즉결처분하는 생생한 사진이었는데 사실은 적법한 전쟁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사이공식 처형’이라 알려져 응우옌응옥로안 장군은 곤경에 처한다.
오랜 역사를 비교하며 한반도와 베트남의 역사가 비슷해서 놀라게 된다. 같은 한자어를 사용하며 유교문화를 가지고 있고, 분단국을 경험하고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베트남은 지금 개혁과 개방의 문을 열고 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직접 파병된 군인뿐 아니라 미국에서 출항하는 선박을 통한 수출길이 열려 산업화에 성공하게 된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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