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의 총성 맞서 싸우는 독립전쟁사 1
정명섭 지음, 신효승 감수, 남문희 만화 / 레드리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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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자가 승리한다!

 

레드리버에서 출판한 정명섭 작가님의 글과 남문희 작가님의 그림으로 되돌아본 <봉오동의 총성>은 홍범도 장군부터 무명의 용사까지, 만화로 만나는 가장 생생한 독립운동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봉오동 전투에 대해 알게 된 건 학창 시절 역사 시험을 위해 단편적으로 외웠던 청산리~ 김좌진, 봉오동~ 홍범도라는 공식처럼 시험 문제를 위한 암기였다. 시간이 지나 장군의 아들, 장군의 딸, 장군의 손자라며 김좌진 장군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홍범도 장군을 만나게 된 건 국영방송에서 전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가 카자흐스탄의 집단 농장에서 낮에는 정미 공장 근로자로 일하고 밤에는 고려극장의 야간수위로 일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극장에서 봉오동 전투에 관한 내용이 상영되고 있을 때, 수위로 일한 그를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독립을 앞둔 1943년에 사망했다. 지금도 그의 묘지는 크질 오르다에 있다. (히스토리2 블로그 홍범도 중에서 )

 

 

1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를 휩쓸고 난 후, “모든 민족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라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상태를 겪고 있던 많은 나라에 해방과 독립에 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가 말한 저의는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국의 식민지를 차지하지 못 하게 하고 미국이 식민지를 가지고자 한 속셈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전승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일제는 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다. 그런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도 이에 발맞춰 1919년 민족의 운명을 걸고 태극기의 물결이 일어난다.

 

3·1운동 이후, 한성 정부를 비롯한 국내외에 많은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안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임시정부는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그의 주장에 따른 외교를 통한 독립을 달성하는 방법과 이동휘 국무총리와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대 창설과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단체와 안창호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협심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실력을 먼저 길러야 한다는 단체로 의견이 나누어졌다.

 

1919년 가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한 후 10년 동안 조국을 되찾기 위한 전쟁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광복을 위해 투쟁하자는 아오야마의 맹세를 지켜 독립군으로 전향한 지청천, 김경천 장군이 신흥무관학교에 합류한다.

 

 

홍범도는 누구인가?

1868년 평양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홍범도는 머슴으로 일하다 1883년 군대에 지원한다. 먹고 살기 위해 군인이 된 홍범도는 4년의 세월을 보내다 자신을 무시하는 상관을 폭행해 끝나고 만다.

 

상관을 폭행한 홍범도는 평양을 떠나 황해도 수안으로 향한다. 수안에서 종이를 만드는 제지소에서 일꾼으로 생활하다 월급을 떼먹는 제지소 주인에게 항의하다 주먹질을 하게 된다.

 

제지소 주인을 폭행한 홍범도는 황해도를 떠나 강원도 금강산의 신계사로 간다. 그곳에서 스님 노릇을 하던 홍범도는 역사에 관해 깨닫게 된다.

 

승려가 된 홍범도는 절의 비구니와 사랑에 빠져 도피행각을 벌이고 뜻하지 않게 불량배들에게 아내를 납치당한다.

그가 택한 길은 산에 불을 놓아 밭을 갈고 농사를 짓는 화전민이 되어 농사와 사냥을 하는 생활이었다.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을묘왜변 등 조선의 급격한 변화는 강원도 깊은 산골의 홍범도에게 영향을 끼쳤다. 사냥을 통해 뛰어난 사격 실력을 갖추게 된 그는 을미의병에 가담한다. 홍범도 부대는 사냥꾼들로 구성되어 일본군을 괴롭힌다.

 

일본은 홍범도 부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가족을 협박하는 방법을 택한다. 홍범도의 부인에게 회유 편지를 쓰게 하고 아들 양순에게 이를 전달하게 한다. 아들을 마주한 홍범도는 귀순을 거절하였고 부인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양순은 의병에 합류해 아버지를 따라 일본군과 싸우다 1908년 함경남도 정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후 국외 투쟁을 목표로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면서 금광에서 광부로 일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소총과 탄약을 구입하면서 독립전쟁에 대비했다.

 

1919년 하반기, 대한독립군을 창설한 홍범도는 그동안 양성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국내진공작전을 개시한다.

 

1920년 일본은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남양파견대라는 수비대를 조직했다. 지휘관 니이미 중위는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기로 한다. 강을 건너 추격한다는 월강추격대를 유인하여 봉오동의 지형과 매복 작전을 활용해 군대 조직 간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둔다.

 

특이할 점은 봉오동 전투의 전과에 대해 한국, 일본, 중국의 기록이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는 전투 참가자의 기록에 따라 일본군 156명 사망 300명 사상으로 나타나고, 일본은 1명 사망 5명 부상, 중국 측 서육린의 기록에 의하면 52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봉오동 전투의 핵심은 월등하게 우세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했지만, 독립군은 이를 저지한다.

 

 

체코 군단과 적백내전

 

 

독립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모으게 된 체코 군단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체코는 독일과 함께 동맹국을 구성하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일부였다. 오랫동안 지배를 받아오던 체코에서는 19세기 후반, 마사리크 박사를 중심을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전선에 나간 체코인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연합국에 투항한다. 특히 같은 슬라브 계열인 러시아에 항복한다. 마시리크 박사의 끈질긴 청원에 연합국은 체코인들로 구성된 독자적인 부대의 편성을 허락한다.

체코군단이라고 불리는 이 부대는 프랑스의 서부 전선과 러시아의 동부 전선에 각각 나뉘어 있었다. 주력은 동부 전선의 러시아 쪽 체코군단이었다.

 

하지만 1917년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긴다. 바로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를 폐지하고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의 리더 레닌은 동맹국과의 전쟁을 멈추려고 한다. 19183월 레닌은 독일과 휴전 조약을 체결한다.

 

동부 전선의 전쟁이 멈추자 체코군단의 존재는 골칫거리로 전락한다. 마사리크 박사는 체코군단을 프랑스로 이동시키자고 연합국에 제안하고 연합국을 이를 수락한다. 문제는 중간에 독일이 있어 이들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편을 이용해 유럽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혁명 이후 러시아는 적백내전에 휘말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던 체코군단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트로츠키가 체코군단의 무장을 해제하려고 했다.

 

19186, 체코군단은 무장해제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킨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도중 적백내전의 혼란 속에서 적군과 싸우며 길을 열고 전진한 체코군단은 마침내 하나둘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든다.

 

191811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독립을 하게 된 체코군 병사는 1920년부터 무기를 반납하고 귀환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무기의 일부가 흘러나와 독립군에게 판매된다.

 

그렇게 사들인 무기로 화승총이 아닌 신식무기로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싸울 수 있었다.

 

 

 

만주 학살, 적백내전, 자유시 참변

 

 

일본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패배로 만주의 조선인을 학살했다. 이른바 경신대학살이다.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만주를 떠나 연해주로 향하게 된다.

1921년 러시아 아무르주 자유시로 피신한 홍범도와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들은 이념 문제로 무력 갈등이 벌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볼셰비키 적군은 대한독립군을 흡수하여 백군과의 내전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소련은 자유시로 들어온 대한독립군에게 공산당을 위해 싸워달라고 요구했지만, 대한독립군은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공산주의계 독립군 세력을 지지하던 소련군은 치안유지를 위해 독립군 간 무력 갈등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독립군을 학살했다.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고, 1,800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소련군에 강제로 편입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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